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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66] 문화유적의 보고 대신면 상구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7/26 [17:12]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대신면 상구1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상구리의 유래

여주군 등신면 지역으로 효종대왕의 5녀 숙경공주 묘비의 거북받침이 있어 거북골, 웃거북골, 또는 상구동이라 했다고 한다. 한편 조선 초 고려 충신 72명 중 9명이 은거하고 살았다 하여 상구리라 하였다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자연마을 두둔이, 양지말, 안말, 윗미륵이, 평촌 등의 자연마을을 합하여 상구리라 하였다.

두둔이는 조선 초에 고려 충신 72인 중 9명이 두문불출 은거하였다 하여 두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뒷고개가 높아 쉬엄쉬엄 넘어간다는 뜻의 둔둔치(屯屯峙)가 두둔치로 변음 되었다고도 한다. 양지말은 햇빛이 유난히 잘 드는 곳이라 하여 양지말이라 부른다. 미륵이는 미륵불이 있어 미륵이라 불린다. 평촌은 옛날부터 들 복판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벌말이라 하다가 평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단종 어수정.     © 세종신문

단종 어수정
 
단종 어수정은 두둔이 동북쪽에 있는 우물이다. 지름 2m, 깊이1.5m의 크기다.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물은 양이 많고 질이 좋아서 50여 호의 식수와 앞들의 농수로 쓰였는데, 단종이 유배 갈 때 이 물을 마셨다고 한다. 1986년 4월 10일 여주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골프장 내에 위치해 있어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렵고 가뭄이 아무리 심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1456년(세조 2) 6월 단종복위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뒤 1457년(세조 3) 6월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천서리 파사성을 거쳐 이 우물에서 목을 적시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전설에 따르면 단종이 한강에서 배편으로 여주 이포나루에 도착한 후 영월까지 육로를 이용해 유배를 간 것으로 추정된다. 

▲ 숙경공주 와 부군 원몽린의 합장묘.     © 세종신문

효종의 5녀 숙경공주 묘

숙경공주는 1648년(인조26년) 당시 왕세자였던 봉림대군(효종)과 세자빈 장씨(인선왕후)의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1661(현종 2년) 우의정 원두표의 손자 흥평위 원몽린과 혼인을 하였다. 현종실록 18권에는 [숙경공주의 저택 터를 여염집이 즐비한 곳에다 잡아 철거된 인가가 30여 호(戶)에 이른다는 이유로 연달아 아뢰고 힘써 쟁론하였으나, 상(현종)이 따르지 않았다.] 기사가 나온다. 1671년(현종 12년) 1월 9일, 숙경공주는 입궁하여 왕과 대비를 알현하려다가 갑작스럽게 천연두를 앓아 집으로 되돌아갔다. 공주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현종은 공주의 시아버지인 원만리를 불러 병구완을 하게 하였으나 곧 죽었다. 숙경공주의 상에 현종이 백관과 함께 숭문당에서 곡을 하였다. 숙경공주의 남편 원몽린도 공주가 죽고 3년 뒤 사망했다. 원몽린의 묘비에는 공주가 《소학》과 《내훈》에 통달하였다고 적고 있다. 묘소는 대신면 상구리, 죽서 원몽린 묘역에 있다. 2004년 5월 6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상구리의 주산 우두산

대신면 상구리의 주산인 우두산은 북내면과 대신면의 경계를 이루고 동쪽 산 너머에는 고달사지터가 있는 명산이다. 우두산을 중심으로 고래산과 옥녀봉이 모여 있다. 이 산이 유명하게 된 것은 고려 삼원의 하나로 규모가 컸었던 고달사의 모산이기 때문이다. 현재도 3점의 보물과 국보1점이 있다. 우두산은 소나무 숲과 잡목 숲이 번갈아 가며 펼쳐져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우두산은 곳곳에 작은 바위가 있을 뿐 대체로 완만한 산세를 보이고 있는데 굵게 접힌 주름이 산 전체에 덮여 있다.

▲ 상구리 미륵불입상.     © 세종신문

상구리사지와 미륵불입상
 
상구리사지는 일제강점기 때까지 많은 사찰들이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미륵이 마을에 있지만 현재 마을에는 용화사 절터 앞에 미륵불입상만 세월의 흔적과 곡절을 간직한 채 서 있다.  용화사는 민가를 전각으로 사용하다가 작은 규모의 법당을 지었고, 산신당 안에 미륵불입상을 모셨다가 원위치로 추정되는 법당 옆의 마당으로 옮겼다. 그러나 미륵불입상은 당국의 무관심과 관리 소홀로 수차례 훼손을 당해 오다 지금은 길가에 서 있다. 미륵불입상의 전체 높이는 260cm, 신체는 너비 70cm, 두께 30cm, 대좌는 너비 120cm, 높이 30cm이다. 불상 머리에 갓을 썼고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통견 법의는 어깨부에 사선으로 흐르며 가슴과 허리 아래에는 ∪자형 주름이 잡혀 있다. 가슴에 올린 오른손은 손바닥이 바깥쪽으로 향하며 엄지, 중지, 새끼손가락이 펼쳐진 채 하늘을 향한다. 땅바닥을 가리키는 왼손은 오른손처럼 엄지, 중지, 새끼손가락을 펴고 있다. 신체에 비해 손이 크게 표현된 편이고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마을人터뷰] 윤태균(78) 선생, 서성원 옹

태어난 곳이 상구리인가?

나는 해방 전 1944년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성남시 판교로 들어간다. 7살에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갔다 와서 아홉 살에 학교에 입학을 했다. 입학하고 학교가 전쟁에 불타서 칠판을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서 나무 밑 빈 공터에서 공부를 하고 그랬다. 그 당시는 미군이 나눠주는 우유가루를 납작하게 펴서 쪄 식으면서 딱딱 부러지는데 중요한 간식이었다. 1.4 후퇴 때 피난을 갔다 오니까 그 큰 기와집이 다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산 밑에 밤나무를 쪄서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 서성원 옹(왼쪽), 윤태균 선생(오른쪽).     © 세종신문

청소년기도 광주에서 보냈나?
 
형님이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중학은 형님 집에 있으면서 서울에서 다녔다. 형님의 고향친구가 서울에서 중학교 선생님을 했는데 그 중학교에 입학을 해서 들어갔다. 조양중·고등학교라고 사립학교가 있었는데 내가 고등학교 때 폐교가 되어 없어졌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버지가 농사 짓는데 거들어 달라고 해서 집으로 내려왔지만 일도 별로 도와드리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형님들 밑에 있다가 군대를 갔다. 
 
상구리에는 언제 내려왔나?

군대 갔다 와서 결혼하고 서울에서 한 40년 살다가 20여 년 전인 1999년 4월에 여기 상구리로 연고도 없이 내려왔다. 서울 충무로에서 요식업 장사를 하다가 돈도 잘 벌었지만 몸이 안 좋았다. 부동산에다가 서울에서 두 시간 이내 코스는 어디든지 좋다고 조용한 집하나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부동산에서 이 아래 하림리에 집이 한 채 있다고 하며 나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주택을 보여 준 것이 아니라 무너진 집을 보여주며 그 자리에 집을 다시 짓고 살라는데 섬뜩하고 무섭고 싫었다. 그래서 깨끗하게 지어 논 집, 공기 좋은 곳이면 되니까 산 밑에 조용히 살 수 있는 곳으로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서울로 가면서 하림리에서 고개를 넘어 오는데 산 밑에 있는 외딴 집 한 채를 가리키며 “저기 저 집은 어떻습니까?” 그랬다. 고개에서 보니까 산 밑에 우리 집이 딱 한 채가 있었다. 지금은 양쪽 집들이 있지만...그 때는 그 집이 하나가 딱 있고 마당에 호두나무가 두 아름을 안아야 손이 닿을 정도로 큰 게 한그루 있었다. 내가 보기에 산 밑에 조그마한 집이 큰 호두나무 아래 있는 게 보기가 좋았다. 그래서 선득 시선이 가서 보고가자고 해서 가 보니 집이 조금 작아서 그렇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집값 계산을 하고 샀다. 
 
상구리에서 잘 적응하고 살았나?

집을 사고 이사를 와서 텃밭을 가꿔보니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모종을 심어서 자라서 열매가 열리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가 없었다. 상추, 고추 이런 거를 내 손으로 키워서 먹는 게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늘 밭에 가서 살았다. 50대 후반이었는데 밭에만 있자니 심심해서 뭐 소일거리가 없나 생각하다 어린이집 아이들 태워다 주는 차량운행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15인승 차를 샀다. 그 차를 가지고 곤지암에 있는 어린이 집에 들어갔다. 곤지암이 여기서 좀 먼데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곤지암을 가려면 산북면을 지나가는데 이포대교 지나서 상품리로 넘어가는데 그 꼬불꼬불한 길이 마치 작은 대관령을 올라가는 것처럼 드라이브 하는 기분이 참 좋았다. 그걸 한 1~2년 하다 보니 여주에서도 차량운행을 하는 어린이집이 곳곳에 많이 있어서 여주로 옮겨 한 3년 했다. 그것도 그만 두고 복지관에 한 10년 다녔다. 처음에는 내가 나이도 어리고 그래서 마을회관에도 나오기가 좀 그랬다. 65세가 넘어가면서 마을회관에 나왔다. 

▲ 숙경공주 묘 제각.     © 세종신문

상구리의 어떤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나?
 
서울에서 그렇게 머리가 아팠는데 여기 와서는 싹 다 나았다. 충무로에서 장사를 하면서 서울에 공기가 탁하니까 그게 나랑 맞지 않아서 머리가 아팠던 거다. 서울서 40여년 살다보니까 시골생활이 자꾸 떠오르고 시골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겼다. 4월에 이사를 왔는데 집에 원두막이 있었다. 5월에 원두막에 나가서 드러누워 있으면 소나무 숲 아래에 원두막이 있어 솔잎향이 은은히 나오지, 꾀꼬리 울고, 뻐꾸기 울고 그러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마음이 편안하니 완전 내 세상이었다. 그래서 내가 늘 그랬다. 그때가 김대중 대통령 때 인데 “김대중이도 부럽지 않다”그랬다. 그런 기분으로 살아서 그런지 여기 내려와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마을에 잘 적응한 것 같은데 비결이 뭔가?

비결이 뭐 따로 있겠나? 이해하고 양보하면 된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 처음 이사 왔을 때 4월 8일인데 다음날 9일에 양지말 사람 한 분 돌아가셨다. 그래서 내가 문상을 갔다. 고려병원으로 문상을 갔더니 상주가 모르는 사람인데 어디서 왔냐고 물어서 어제 마을에 이사 온 사람이라고 인사를 했다. 그 이튿날 장사를 마을 고개 너머로 모시는데 거기도 참석하고 우리 집사람도 그 집 가서 일손을 도와주고 그랬다. 장례식장에서 동네사람들과 다 인사를 했다. 장례식장에서 점심 먹고 오후에 마을사람들이 다 화투치러 가는데 따라 갔다. 그렇게 해서 동네사람들과 수월하게 사귀었다. 나이가 어려서 마을회관에 못나왔지 동네사람들과는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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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7/26 [17:12]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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