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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67] 삼도 삼수가 만나는 곳 점동면 삼합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7/29 [17:27]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점동면 삼합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삼합리의 유래

삼합리는 본래 여주군 점량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닭기머리, 중간말, 아랫말을 병합하여 삼합리라 해서 점동면에 편입시켰다. 삼합리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과 충북 충주시 앙성면,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의 3도를 한눈에 볼 수 있다하여 구한말 삼합으로 명명되었다. 또는 남한강과 그 지류인 섬강, 그리고 청미천이 합수하는 지역으로 삼합이라고도 한다. 자연마을로 닭이머리, 중간말, 아랫말(단진개), 대우 등이 있다. 닭이머리는 예전부터 마을 뒷산의 생김새가 닭 머리와 같다 하여 닭 머리로 부르다 구전되는 과정에서 닭이머리로 되었다 한다. 오르는 길가에 미륵이 있었으나 도난당했다. 단진개, 아랫말은 강 하구 가까이 형성된 마을로 가장 오래되고 큰 마을이다. 수운을 이용하던 시대에는 매우 번창했던 마을이며 청미천 맨 아래에 마을이 위치하므로 아랫말이라고도 한다. 단진개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다음 몇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장마가 지나면 마을 앞강의 하상이 들어나면 붉은색을 띠므로 단진(丹津)개라고 일컬었다. 중간말은 단진개 마을이 아랫말이고 웃마을이 닭이머리이로 현재의 삼합2리다. 공양소는 오갑산 능선 맨 끝 꼬리에 봉우재라는 산이 있고 경사가 급한 산 아래 남한강이 흐르는 곳에 깊은 소가 있는데 이곳을 공양소라고 한다. 예전 공양왕이 삼척으로 유배 갈 때 이곳에서 쉬어갔다는 전설이 유래되어 공양소라 일컬어진다. 

▲ 삼합리와 장안리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     © 세종신문
      
청미천

청미천은 길이 37.56km, 유역면적 399.42㎢로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 안성시 일죽면을 지나며 장호원읍과 음성군의 경계가 되고 경기 · 강원 · 충북 3도가 접하는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 · 도리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세종실록』에 “거가가 죽산현 천민천 가에 머물렀다.”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그 발원지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죽산현 편에 “천민천은 현 동쪽 10리에 있는데 건지산과 정배산에서 발원하여 여주의 여강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명칭을 보면 이후 『동국여지지』, 『해동지도』, 『대동지지』 등에서 계속 천민천으로 기록되다가 『죽산부읍지』에 “청미천은 양지와의 경계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여강에 들어간다.”고 하여 그 명칭이 바뀌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 『광여도』, 『1872년 지방지도』 「죽산지도」 등에서는 천민천으로, 『죽산군읍지』에는 청미천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해동지도』 「여주목지도」에는 천민대천으로, 『1872년 지방지도』 「여주목지도」에는 청민천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편에서도 “경기도에서는 용인의 어비천과 음죽의 청미천 일대의 땅이 삼남과 같이 비옥하고 기름져서 살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오갑산

오갑산의 높이는 609m로, 경기도 여주시와 충청북도 음성군, 충주시의 경계를 이룬다. 삼합리는 오갑산의 끝자락인 공산, 뒷산, 봉우재, 빈양산이 청미천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삼국시대 때는 오압산이라 불렀는데, 이곳에서 고구려와 신라가 농토를 확보하기 위해 잦은 싸움을 치러 정상에 진을 치고 군대를 주둔시키면서부터 오갑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중국 명의 이여송이 왜군과 싸우기 위해 진을 쳤는데 그때부터 정상을 이진봉이라 하고 이진봉 북방 8부능선 갈대밭은 진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삼태봉에는 봉화터가 있는데 날이 좋으면 사방 100리 길이 내다보인다. 오갑산에 얽힌 전설도 많이 전해내려 온다. 조선 인조 때 미인으로 소문난 한씨 부인이 감곡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 피신가다 오갑고개에서 오랑캐의 대장 파오차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때 파초선을 든 낯선 처녀가 나타나 몸에서 강렬한 빛을 비추었다. 그 빛에 파오차의 칼이 자신의 목을 찔러 오랑캐 대장은 자결하게 되었고 한씨 부인은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갑고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 2009년 폐교된 점동초등학교 안평분교의 현재 모습.     © 세종신문

점동초등학교 안평분교
 
점동초등학교 안평분교는 여주시 점동면 장안리 480-3번지에 폐교상태로 있다. 1935년점동공립보통학교 부설 장안간이학교로 개설한 후 1942년장안공립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 1946년 안평국민학교로 개명하였고 1949년 제1회 졸업식을 가졌다. 1977년에 벽지형 급식학교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 병설유치원 1학급이 인가를 받았다. 1993년 3월 점동국민학교 안평분교장으로 통합되었고 1996년 3월 점동초등학교 안평분교로 개칭되었다가 2009년 3월 1일 폐교되었다. 지금은 자연학습장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폐허가 되어 있다. 

[마을人터뷰] 주평길(82) 선생

평생을 삼합리에서 살았나?
나는 1940년에 여기 삼합리에서 태어났다. 7대조 선조들부터 삼합리에서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도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옛날에는 주씨네와 박씨네가 많이 살았다. 2리는 주로 박씨네가 살았는데 지금은 다 헤어졌고 여기 1리는 주씨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몇 집 안 된다. 우리는 신안 주 씨다. 

▲ 삼합리 주평길 선생과 부인 조효숙 노인회장.     © 세종신문

어린 시절 삼합리 모습이 기억이 나나?

어린 시절 마을 모습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우리 마을은 크게 변한 게 없다. 길나고 다리 생기고 초가집이 슬래브 집으로 바뀐 거 말고는 왜정 때나 지금이나 마을이 장 그 모습이다. 삼합리 저수지가 오래 전부터 있어서 빨래는 저수지 밑에서 했다. 왜정 때 만든 저수지인데 지금은 많이 보수를 했다. 저수지 밑으로 마을회관 옆으로 돌아내려 오는 길이 예전에는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도랑이었는데 그걸 복개를 해서 지금은 길이 되었다. 그 도랑에 빨래터가 있었다. 도랑 양쪽에 빨랫돌을 놓고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다. 지금은 복개가 되면서 다 없어졌다. 
 
학교는 어떻게 다녔나?

초등학교는 안평국민학교를 다녔다. 옛날에는 장안리를 안평이라 불렀다. 안평국민학교를 다니다 4학년 때 전쟁이 났다. 6.25때 피난을 청주까지 갔다 왔다. 옛날에는 날씨가 그렇게 추웠다. 날이 추우니까 겨울이면 한강이 꽁꽁 얼었다. 꽁꽁 언 한강을 따라 충주를 거쳐서 청주까지 피난을 갔다. 여기는 고개 넘어가면 충청도, 강 건너가면 강원도고 그렇다. 얼음판을 타고서 올라가는 거다. 피난을 가다가 빈집에 들러 자고 그랬다. 쌀과 가마솥은 어른들이 지고 가는데 나도 내가 덮고 잘 이불은 멜빵을 해서 지고 갔다. 어떤 때는 잘 집이 없어서 한겨울에 밖에서 자는 경우도 있다. 솔잎을 밑에 깔고 그 위에 갈잎을 깔면 땅이 젖어도 이불이 젖지는 않았다. 청주에서 1년 반 정도 있다가 삼합리로 다시 들어왔는데 학교가 불타서 재개가 늦어졌다. 학교 뒷산 이런대로 가서 공부를 하고 그랬다. 책보를 매고 다녔지만 책이 제대로 없었다. 신은 주로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도 검정고무신 흰 고무신이 있었는데 생활권이 좀 나은 집 아이들이 흰 고무신을 신었다. 중학은 점동중학교를 다녔다. 걸어서 다녔는데 사곡리 앞으로 해서 학교 가는 길이 예전에는 그 길이 전부 소로 길이었다. 여기서 점동중학교까지는 한 5km정도 된다. 

▲ 삼합리에서 바라본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     © 세종신문

청미천에 대한 기억이 많을 것 같은데?

옛날에는 청미천을 안평개울이라고 불렀다. 가재 잡고 청미천 개울에서 물고기 잡고 그랬다. 청미천에는 피라미, 불거지, 치리 이런 거를 잡았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가을에 김장하면 절인 배추를 들고 나가 씻고 그랬다. 여름철에 날이 더우면 청미천에 나가 멱도 감고 그랬다. 모래톱이 엄청 넓었다. 한강에서 올라온 털 달린 거이(게) 이런 거도 많이 있었다. 걸어 다닐 때 청미천을 건너가려면 가을, 겨울, 봄에는 섶다리를 건너고 여름에는 배로 건너다녔다. 배는 호호 당 얼마씩 모곡을 받고 건너다녔다. 삿대로 밀고 다니는 쬐끄만한 목선인데 한 20명 타면 많이 타는 그런 배였다. 학교는 중학까지만 다니고 고등학교는 들어가지 않았다. 
 
삼합리에서 주로 논농사를 지었나?

여기는 밭이 별로 없고 대부분 논이다. 삼합리는 수리안전답이라고 해서 물을 대야 할 때는 마을대로 대고, 떼야 할 때는 떼면서 물을 조절할 수 있어서 쌀이 정말 좋은 곳이다. 마을 위에 있는 저수지(삼합지)에서 흘려보내서 삼합2리까지 다 물을 댔다. 중학을 마치고도 쟁기질도 하고 쓰레질도 하고 그랬다. 봄이면 청미천 주위로 꼬불꼬불한 논길로 된 다랭이 논 곳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소로 논을 간다고 북적거렸다. 힘든 일을 쉬일이라고 하는데 쓰레질이 쟁기질 보다 훨씬 어려웠다. 쟁기질은 소 가는대로 골을 잡아서 타고 나가면 되는데 쓰레질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논을 보드랍게 삶아야 하는데 잘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간데 또 가고 또 가고 해서 논을 잘 고르지 못한다. 쉬일꾼은 특별대우를 했다. 다 봉초담배 말아서 피워도 쉬일꾼은 궐련담배를 사 줘야 한다. 미리미리 부탁을 해서 날을 잡아 맞춰야 하는데 그것도 입에 맞는 사람이나 해 주지 잘 안 해주고 유세를 부렸다.  

▲ 삼합리 저수지.     © 세종신문

평생을 산 삼합리는 어떤 마을인가?
 
삼합리가 살기가 괜찮았다. 점동에서 여기 들어 올 때는 산골짜기 같지만 삼합리로 들어오면 넓은 들판이 펼쳐져 확 튀여 있다. 우리 마을은 마을 사람들이 다 가족같이 지낸다. 한 집에 일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다 가서 도와준다. 비닐을 씌워도 그렇고 벼 모판을 만들어도 마을회관 앞에서 다 같이 한다. 청년시절에는 축구선수도 많이 해서 충청도 사람, 강원도 사람들도 많이 사귀었다. 축구대회를 하면 충청도 앙성면, 강원도 부론면이 각 면단위로 가까워 한 동네서 언제 축구대회를 하니까 와라 그러면 3개면이 모여서 공을 찼다. 앙성면은 단암리, 부론은 법천리 우리 삼합리 이렇게 세 마을이 모여 상품을 걸어놓고 축구대회를 열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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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7/29 [17:27]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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