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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65] 동학과 서학이 공존한 강천면 도전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7/23 [14:43]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강천면 도전2리 전거론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도전리의 유래

도전리는 본래 강원도 원주군 강천면의 지역으로 1906년 여주군에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탑전리, 전거론리, 원심리, 도성리를 병합하여 도전리라 했다. 자연마을로는 뒷대, 중벌, 원심동, 정거원동, 툇골이 있다. 뒷대는 도성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지금의 도전5리로 도전리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중벌은 뒷대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의 도전4리다. 이 마을은 원심천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마을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원심동은 도전3리로 원래의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도 있고, 옛날 도성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지름길로 길손이 쉬어갈 수 있는 시설이 있어서 원막이라고 한다. 전거원동은 도전2리로 전거른이라고도 하며, 원심이 남쪽 마을이다. 툇골은 옻나무 다불 이라고도 불리는데 아랫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옻나무가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최시형 선생 피체지.     © 세종신문

해월 최시형 은신처
 
도전2리에는 지금도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은신처가 남아있다. 해월 최시형은 1827년 경주 출생으로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였다.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영덕·영해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고, 이 해 7월 북도중주인으로 임명되어 8월 14일 도통을 승계 받았다. 탄압과 관헌의 추격을 피해 다니면서도 1880년 5월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세워 『동경대전』을 간행하였고, 1881년 단양에도 경전간행소를 마련하여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에 따른 관헌의 신도수색과 탄압이 가중되었는데, 동학의 교세도 만만치 않게 성장하여 1892년부터는 교조의 신원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제1차 신원운동은 1892년 11월 전국에 신도들을 전주 삼례역에 집결시키고, 교조의 신원과 신도들에 대한 탄압중지를 충청도·전라도관찰사에게 청원했으나 여전히 탄압이 계속되자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에서 40여 명의 대표가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 측의 회유로 일단 해산하였으나 태도가 바뀌어 오히려 탄압이 가중되자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 3월 10일 보은의 장내리에 수만 명의 신도를 집결시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고부군청을 습격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신도들의 뜻에 따라 4월 충청도 청산에 신도들을 집결시켰고, 9월 전봉준이 다시 봉기하자 적극 호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년 12월 말 동학운동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전력을 다하였고 이천식천설(以天食天說) 등의 신앙관을 피력하였다. 1987년 8월경에 강천면 정거론에 은신하며 그해 12월에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3월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 원진여의 집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장수폭포

여주시 강천면 도전2리에 있는 폭포를 ‘장수폭포’라고 부른다. 도전2리 무두치 고갯마루에 위치한 장수폭포는 자연폭포를 10여 년 전 마을주민들이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이 폭포 아래 산언덕 밑에 해월 최시형 선생의 피체지가 폐허로 쓰러져가고 있다. 무두치는 자동차 길이 생기기 전에 있던 옛길 고갯마루로, 도전리 사람들이 북내면 운촌리를 거쳐 여주 장에 다니던 길이다. 폭포로 떨어져 흐르는 계곡물이 맑아 옛사람들은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 여주시 강천면 도전리 장수폭포.     © 세종신문
 
북내초등학교 도전분교

도전분교는 강천면 도전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로, 북내면 당우리에 있는 북내초등학교의 분교이다. 1936년 4월 북내공립보통학교 부설 도전간이학교로 개교한 이후, 1948년 9월 도전국민학교로 승격하였다가, 1985년 3월 북내국민학교 도전분교로 편입되었다. 교훈 '큰 꿈을 키우자‘를 실천하고 있으며, 학교를 상징하는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개나리이다. 학교 총부지면적 18,778㎡, 교사대지면적 13,778㎡ 위에 1층 건물로 지어졌다.  

[마을人터뷰] 김연동(88) 선생

언제부터 도전리에 살기 시작했나?

나는 강원도 횡성 둔내에서 1934년에 태어났다. 올해 여든여덟이다. 우리 아버지가 세간을 양평으로 나셔서 양평에서 컸다.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살다가 6.25전쟁 때 피난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원심리에서 터를 잡고 살다가 여기 정거론으로 시집을 왔다. 외삼촌이 원심리에 살아서 외삼촌을 의지해 원심리에 살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에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다.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우리는 여기 원심리에 머물고 아버지 혼자 양평 집으로 갔다 오셨는데 집이 홀라당 다 타버리고 없어져 버렸다. 
 
도전2리로 어떻게 시집을 오게 되었나?

우리 남편 당숙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나를 자기 조카에게 달라고 하도 졸라서 우리 엄마는 나이가 어리다고 반대했는데 아버지가 허락해서 이 서방네로 시집을 왔다. 전쟁 끝이라 결혼이라고 해야 얼굴도 한번 못보고 바로 시집을 왔다. 이 서방네 할아버지가 그래도 선을 봐야하지 않겠냐고 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아 내 딸이 병신 아니고 사위가 병신이 아닌데 무슨 선을 보느냐’고 그래서 신랑얼굴을 결혼식 당일에 봤다. 50년 동짓달에 피난을 갔다가 원심동으로 들어와서 51년 동짓달 열 여드렛날에 식을 맞췄다. 날이 많이 추웠다. 신랑이 가마를 타고와 우리 집에서 혼례를 올 리고 그 가마에 내가 타고 정거론리 시댁으로 왔다. 여기 이 서방네가 그 당시는 집안이 빵빵했다. 시댁에 와서는 폐백이나 뭐나 그냥 조상님들에게 알리는 제사를 지냈다. 

▲ 강천면 도전2리 김연동(88) 선생.     © 세종신문

전쟁 중이라 생활이 많이 어려웠을 것 같은데 어땠나?
 
시댁에는 전쟁 통에 집이 다 불타버리고 몇 채 없어서 삼칸 집에 식구들이 오물오물했다. 중공군이 여기 있었는데 그 뒤에 수색대라고 총 끝에 베를 감고 온 사람들이 여기서 파난 안간 사람들은 다 잡아다가 죽였다. 중공군이 우리가 피난 갈 때 파묻고 간 양식을 그 사람들이 알려줘서 파먹었다고 저 아래 밤상골 퇴골에 끌고 가 죽였다. 우리 남편도 학도병 출신이라고 해서 수색대랑 같이 퇴골까지 갔다 왔다. 사람들을 쭉 세워놓고 총을 땅! 쏘더라는 거야. 그래서 우리 영감은 너무 무서워서 거기서 막 뛰어내려와 집으로 왔다. 
 
도전리의 생활은 어땠나?

나는 결혼해서 5남매를 낳아 키웠다. 남편이 마흔아홉에 갑자기 세상을 떠서 내 나이 마흔여덟에 혼자되어 여직껏 여기 도전리에서 살고 있다. 여기서 여주 장을 보러 가려면 폭포수 옆 산길로 넘어가면 북내면 운촌리가 나오는데 거기로 해서 당우리를 지나 버시고개를 넘어 학동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군청 뒤로 해서 장을 다녔다. 여기서 여주까지 삼십 리 인데 갔다 오면 하루 종일 걸렸다. 장꾼들이 전부 쌀을 이고 지고해서 장에 내다 팔고 그 돈을 필요한 물건을 사서 돌아오고 그랬다. 이 마을이 이 서방네 마을인데 예전에는 부촌이었다. 그런데 여기 길 낸다고 언덕을 깎아 물을 저렇게 해 놓고 부터는 마을에 부자가 없다. 개울에 웅덩이가 있어 애들이 물놀이 한다고 내려 뛰고 그랬는데 그 물이 다 없어졌다. 개울에 물고기가 놀아야 하는데 물고기는커녕 벌레도 없다.  
 
해월 최시형 선생에 대해서 얘기를 들은 적 있나?

그 전에 살 때는 도통 아무 말도 듣지를 못했다. 폭포수 아래 산언덕 밑에 그 옛날에 동학 어른이 숨어서 살았다는 집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 옆집인데 다 쓰러져 간다. 그 분이 거기 와서 피난을 했는데 원주 어디로 숨었다가 붙들려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최근 년에 들었다. 내가 시집왔을 때는 그 집에 안수만 네가 살았는데 서울로 이사를 가고 없다. 그 뒤에 여러 사람이 살다가 지금은 양 씨가 살다가 그이도 나이가 많으니까 떠나고 없다. 그 집은 6.25 전쟁 때도 불타지 않았고 옛날 집 그대로 위에 벽을 덧대고 슬레이트를 올렸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다 쓰러져 간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집이기 때문에 동학 어른이 숨어 지내던 그 집이 지금까지 있는지도 모른다. 행랑은 이미 쓰러져 없어졌고 지금은 안채만 있는데 그것도 다 쓰러져가는 데 얼른 뜯어내든지 고치든지 해야지 지금은 영 폐허가 다되어 사람들 다칠까봐 무섭다. 땅은 이 씨네 땅이고 집만 양 씨네 소유다. 그 동학한다는 어른 살았다는 집 바로 옆집이 전주이씨 종가 집이었다. 얼마나 철저하게 숨겼는지 최근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그 집에 누가 살았는지 전혀 몰랐다. 

▲ 여주 북내초등학교 도전분교.     © 세종신문

도전분교에 대해서 기억나는 게 있나?
 
우리 애들 키울 때는 이 동네에 애들이 참 많았다. 도전학교 운동회 때면 우리 집 애들이 타 온 공책이 한아름 쌓였다. 여기 학교는 내가 시집왔을 때도 있었다. 우리 시아버지가 동네 젊은이들을 다 모아서 농악을 가르쳐 정월대보름에 저 산 너머 운촌리, 당우리 이런대 까지 가서 지신밟기를 하고 쌀을 모아 그 자리에 학교를 지었다. 가을에 운동회를 할 때는 도전리 사람들이 다 모였다. 돼지도 잡아 삶아 먹고 도전리 전체가 잔치였다. 중학교는 여주중학교를 다니다가 북내에 여강중학교 생기면서 부터는 북내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우리 영감은 어려서 문막중학교를 다녔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버스도 없어 폭포수로 해서 운촌리를 지나 여주장 갈 때 와 같이 중학을 다녔다. 그리고 버스가 생기면서 애들이 버스를 타고 북내면에 있는 여강중학교를 다녔다. 학교 마치고 집집마다 아이들이 소를 먹였다. 동네 개울가에 풀이 자랄 새가 없었다. 지금은 저렇게 풀이 우거져 물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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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7/23 [14:43]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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