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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64] 원호·원두표 장군의 기상이 서려있는 북내면 장암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7/16 [14:14]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북내면 장암1리 전경.     ©세종신문

장암리의 유래

북내면 장암리는 금당천 가의 나지막한 산 너머 마을로 본래 강원도 원주목 지내면에 속하였는데 1906년에 여주군으로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산촌의 장자와 좌암촌의 암자를 합하여 장암리가 됐다. 자연마을로는 웃말, 아랫말, 음달말, 양지말, 토골미, 좨미, 긴미 등이 있다. 토골미는 한자로 토금동이라고 쓰는데 뒷산을 토골미산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산 이름을 토골미라고 부른 것은 옛날 작은 좨미가 바로 이 토골미산 동쪽 골짜기이기 때문에, 작은 좨미 부락이 있을 때 지어진 이름으로 텃골에 지은 산이란 뜻이다. 긴미는 장암리에서 제일 큰 마을로, 산이 길다는 뜻에서 긴(長)자와 뫼(山)자가 합쳐진 것인데 변음 되어 진미라고도 부른다.       
 
고려청자·조선백자 가마터

장암리에는 고려시대 청자 가마터와 조선시대 백자 가마터가 있다. 
고려시대 청자가마터로는 13~14세기 가마터 3곳이 있다. 하나는 장암리 원 씨 묘역의 뒤편 밭 상단부에 있다. 유물 분포범위는 약 20×20m이고 훼손이 심해 가마의 방향을 추정할 수 없다. 발, 접시 등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대부분인 발은 암녹색을 띠며 내외면에 유약 처리되었다. 이곳에서 약 1km 떨어진 민묘 부근의 두 번째 가마터는 유물 분포범위가 약 12×10m이다. 가마는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 접시, 호, 도지미, 상감청자편 등이 발견되었다. 발은 모양과 크기가 다양한데 대부분 황갈색, 황녹색을 띠며 전면 유약 처리되었다. 장암2리의 원공신도비 뒤편에 있는 세 번째 가마터는 유물 분포범위가 약 20×20m이다. 발, 접시, 호 도지미 등이 발견되었으며, 접시는 연한 녹색을 띠며 전면 유약 처리되었다. 
조선백자 가마터는 17~18세기의 가마터로, 원공신도비 뒤편의 3호 고려청자가마터 남쪽에 있다. 가마는 훼손된 것으로 보이며 유물 분포범위는 약 50×30m이다. 발, 접시, 잔, 제기, 도지미 등 유물과 소토 등이 발견되었는데, 제기는 굽을 깎아낸 것과 깎지 않은 것이 모두 있다. 대부분 담청백색이며 전면 유약 처리되었고 접지면에 흙물과 굵은 모래를 받쳐 포개구이하였다.

▲ 원호·원두표 장군 묘역     ©세종신문
원호(元豪, 1533~1592)
 
원호는 임진왜란 때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전사한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중영이다. 1533년(중종 28)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에 이어 내외직을 두루 거쳤고, 1583년(선조 16) 경원부사로 있을 때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587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전라좌도에 침입한 왜구를 막지 못하여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조방장에 임명되어 여주 신륵사 근처에서 남한강을 건너 북상하려는 왜군을 수일간 저지하였다. 이후 뒤로 물러나서 남한강 지류인 섬강에서 진을 치고 있던 중 개군면 구미포를 약탈하는 왜군을 새벽에 기습하여 섬멸하였다. 원호는 이날의 승전으로 경기도·강원도방어사 겸 여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제4진으로 상륙한 모리 요시나리 휘하의 왜군 1만 4000여 명이 한양·동두천·철원·김화·평강·회양을 점령하고 함경도 안변으로 향하자 강원도관찰사 유영길은 격문을 띄웠고, 원호도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였다. 1592년 8월경 원호는 함경도로 가던 중 철원에서 매복하고 있던 왜군 대부대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원두표(元斗杓, 1593년 ~ 1664년)

원두표의 묘는 원호의 묘 바로 아래 있다. 원두표는 조선후기의 문신, 공신이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였으며 서인 중진으로 원당의 당수였다. 자는 자건, 호는 탄수·탄옹, 시호는 충익, 본관은 원주시중공계이다.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원계군 원유남 등 여러 대신들과 힘을 합하여 인조반정에 성공하였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뽑히고 평원군으로 책봉되었다. 또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전주 부윤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위하여 어영대장을 지냈다. 이후에는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전출되었다. 이후 호조판서로 임명되었으며 효종 때 호조판서, 공조판서, 좌참찬, 판의금부사, 형조판서를 지내고 연이어 개성유수를 한 뒤 다시 판의금부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뒤 우의정, 현종 때 좌의정에 올라 내의원·군기시의 도제조를 겸하였다. 그 손자 원몽린은 효종의 다섯째 딸 숙경공주와 혼인하여 흥평위에 봉해졌다.   

[마을人터뷰] 성원식(75) 선생

장암리에서 얼마나 살았나?

1947년에 장암리 아랫말에서 태어났다. 6.25때 네 살이었는데 엄마 등에 업혀서 피난을 갔다 왔다고 들었다. 장암1리는 교회를 기준으로 위는 웃마을이고 그 아래는 아랫말이다. 장암2리는 저 산 고개 너머에 있다. 마을 뒷산을 소랑산(소달산)이라고 하는데 그기에 있는 절을 마을 사람들은 ‘소랭이절’이라고도 하고 흥왕사라고도 한다. 상교리 고달사지하고 소랭이절이 두 형제가 절을 지었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장산줄기 타고 두 형제가 내려와서 헤어져서 하나는 고달사지에 절터를 잡고 또 하나는 소랑산 중턱에 절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스승이 절터 잡은 곳을 와서 보고는 흥왕사는 절은 크게 번성은 안 해도 오래가겠고 고달사는 번성은 크게 하는데 오래 못가겠다고 했다는 말이 있다. 

▲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 성원식 선생.     © 세종신문

예전의 장암리 모습 중 기억나는 게 있나?

우리가 어릴 때는 장암리 마을 전체가 초가집들이었다. 초가집 지붕은 2년에 한 번씩 올렸다. 그 전 초가지붕 썩은 거는 뽑아내고 새 짚을 쑤셔 박고 그 위에 새 이엉을 올리는데 지붕이 두툼했다. 어떤 집은 초가지붕 두께가 사람 한 팔 정도 되었다. 우리 마을에는 수풍이 있는데 그 나무들에 예전에 왜가리들이 수북이 앉아 있었다. 6.25나고 그럴 때다. 그 시절에는 먹을 게 없으니까 산란기에 수풍을 타고 올라가 알을 꺼내 삶아먹고 그랬다. 6.25가 지난 뒤에 그 왜가리들이 전부 신접리로 다 나갔다. 이 동네는 앉아서 반경 30리가 다 원 씨네 땅이었다. 원씨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야산을 개간해서 계단식 논밭을 많이 만들었다. 

▲ 6.25전쟁 전까지 왜가리가 수북이 앉아 있었다는 장암리 수풍림.     © 세종신문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초등학교는 북내초등학교 다녔다. 40회 졸업생이다. 여기서 장암2리로 해서 여강학교 산이 첫째 담, 둘째 담 이렇게 두 골짜기가 있는데 둘째 담 골짜기로 빠져서 간다. 우리 어려서는 내복이 없어서 겨울에 솜바지를 해주면 그거 입고 두루마기 걸치고 그렇게 학교를 다녔다. 겨울에 어찌나 추운지 저 아래 마을입구 바우모랭이가 두 군데 있는데 톨미로 가는 곳으로 나가면 바람이 어떻게나 추운지 말도 못했다. 중학은 웬만해서는 다니기 어려웠다. 초등학교 한 반이 50~60명 되었는데 4반까지 해서 200명이 넘는데 그 중에 중학교를 간 애들이 10명도 안되었다. 중학교는 여주중학교 아니면 대신중학교를 다녔다. 우리 집은 살림이 어렵지 않았지만 내가 3대 독자라 멀리 학교 다니다가 사고라도 날까봐 중학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에서 서당을 다니면 한문공부를 했다. 서당에서 개몽편,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까지 배웠다. 마을에 서당이 있었는데 글삯이 1년에 쌀 한 가마였다. 
 
금당천에 대한 추억이 많을 것 같은데….

금당천은 학교 갈 때 늘 건너다니던 곳이다. 길옆 산 밑에 외딴 집 한 채가 있었는데 그곳 앞으로 당우리 보 돌다리를 건너다녔다. 예전에는 소나무를 찍어다 단으로 묶어서 섶을 만들어 깔고 돌을 져다가 배겨서 보를 막고 물을 차단시켰다. 보안에 물이 고이면 보문을 만들고 보 도랑이 당우리 제일교회 밑으로 내려가서 동네 앞으로 해서 당우리, 신접리 건너가는 다리 옆으로 흘러갔다. 용진상회 앞으로 해서 봇물이 당우리 들을 다 돌아갔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보를 만들어 놓았는데 장 그 자리가 예전의 당우리 보 자리였다. 그 보를 건너다니면서 여름이면 멱 감고 그러던 곳이다. 지금의 북내체육공원 있는 자리가 예전에는 잔디밭이었다. 섬처럼 되어있었다. 보 도랑이 돌아가서 섬처럼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어떤 사람이 밭을 만들어서 땅콩을 심었다. 흥천 금사 대신 벌판에 땅콩 밭 만들 듯 그렇게 체육공원자리에 땅콩을 심었다. 그 뒤에 내가 장가 들 무렵에는 논을 쳐서 한 2천 평 논농사도 지어먹었다. 그러다가 그 자리가 체육공원이 된 거다. 

▲ 박정희 정부 때 산을 개간해 만들었다는 고구마 밭.     © 세종신문
 
결혼은 몇 살에 했나?

나는 3대독자 외아들이라고 스무 살에 장가를 들었다. 결혼은 한 동네에서 연애결혼 했다. 우리 마누라 열여덟에 나한테 시집왔다. 연애 하면서 저녁이면 안 가는 데가 없었다. 장암리가 좋은 게 능원사 앞 다리건너 신작로 옆으로 아키사나무가 수풍으로 쫙 배겼는데 봄에 나가면 길옆의 아카시아 꽃향기가 대단했다. 얼마나 좋던지 그 꽃길을 연애하면서 걸어 다녔다. 둘이 같이 아카시아 꽃길을 걸으며 종알거리고 개울 옆 둑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그렇게 좋을 수 가 없었다. 모심을 때 쯤 되면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다. 쌍육년(66)도에....처가가 동네 첫 집이었는데 가을일 끝나고 춥기 전에 음력 10월에 결혼을 했다. 가마타고 우리 집에서 출발을 해서 장암리 아랫말 마당이 있는 집에 상을 차려놓고 그 집에서 우선 내려서 술상을 받고 기다렸다. 윗손으로 우리 당숙이 가고 하인 하나 하고 처갓집 윗손 하인 이렇게 네 명이서 술상을 간단히 받고 대례시간 될 때 까지 기다리다가 처가로 들어갔다. 옛날 혼례는 날과 시가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그것도 볼 줄 아는 사람이 이것저것 따져가며 잡아주었다. 처가에 잔치하러 갈 때는 내가 가마를 타고 가고 대례를 마치고 돌아 올 때는 가마에는 신부가 타고 나는 친구들 손가마를 타고 왔다. 혼례를 올리는 날 초가을에 눈이 올 때 인데 비가 쏟아졌지 뭐야. 그리고 사흘 뒤에 재향 가는 날은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마당에 눈이 하얗게 소복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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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7/16 [14:14]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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