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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63] 반만년의 역사와 유적을 간직한 여흥동 멱곡동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7/05 [10:18]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해바라기가 피어있는 멱곡동 마을 전경.     © 세종신문

멱곡동의 유래

멱곡동은 본래 여주군 근동면의 지역으로 늪이 있어서 멱 감는 터가 있어 멱골 또는 멱곡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능촌 일부를 병합하여 멱곡리라 했다. 2013년 9월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멱곡리에서 멱곡동으로 개칭되었다. 현재는 자연마을인 새터, 칠울말 지역은 멱곡1통, 멱골 지역은 멱곡2통으로 분동되었다. 옛날 이곳의 논들은 매우 메마르고 척박한 땅이었기에 ‘메고울’, ‘멱골’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새터는 멱곡1통 지역으로 멱골 남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우만리에 살던 윤씨 집안사람들이 왜군의 침입을 피해 우만리에서 조금 떨어진 산 너머에 움을 만들어 숨어 지내다가 그 자리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 살았다 하여 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칠울말(치루리)은 멱곡1리 새터 동남쪽에 있는 들판이다. 예전엔 이곳에 마을이 있어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나 지금은 넓은 들이 되었다. 멱골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로 다른 마을에 비하여 논밭이 메말라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고락골은 멱곡동에 있는 골짜기로 근처에 조선시대 돈녕부 벼슬을 지낸 최돈녕의 산소가 자안마루 부근에 있다. 부근의 안산이 마치 고래형국으로 되어 있어 고락골이라 한다. 장터거리는 지금의 멱곡1통과 2통 사이에 있는 넓은 터를 말한다. 예전에 이곳을 중심으로 장터가 형성되었기에 주변을 장터거리라 하였다.
  
멱곡동 유적

멱곡동은 다양한 문화유적이 발굴된 곳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빗살무늬토기편이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민무늬토기편·석기·검파두식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여주시사에 따르면 멱곡동 산17-1 일대에 삼국시대 유물산포지가 있다고 한다. 여주지역의 삼국시대 유물 산포지는 멱곡동 뿐만 아니라 연양동, 우만동, 전북리, 다대리, 신근동, 천서리, 적금리, 태평리, 도리 등에 분포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는 백제토기 등이 수습되었다. 4세기 이후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이 본격적인 정복전쟁을 한강 중·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함에 따라 그 연변에 위치한 여주지역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여주지역은 남한강 남안에서 합류되는 지류와 인접한 저평한 구릉지역에서 백제유적이 여럿 확인되었다.  

▲ 멱곡동 향나무.     © 세종신문

▲ 멱곡동 느티나무.     © 세종신문
멱곡동 향나무와 느티나무
 
멱곡동 멱골(2통)에는 오래된 향나무와 느티나무가 가정집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다. 멱곡동 마을 우물 앞에 있는 향나무는 보호수 지정 여주-6으로 수령이 약 300년 정도 된다. 잎과 가지가 무성하고 영양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외부에 별다른 상처가 없으나 나뭇가지가 처지는 것을 철제 지주로 받쳐 놓았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물맛이 좋아지길 바라는 의미에서 우물가에 향나무를 심곤 하였다. 향나무가 서 있는 마을 우물에 해마다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느티나무는 보호수 지정 여주-7로 수령이 약 200년 정도 되었다. 수세는 부채모양으로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생육상태가 좋으며 잔가지가 무성하게 잘 발달되어 있다. 밑동에 외과수술 흔적이 있으며 나무 주변에 시멘트로 만든 제단이 조성되어 있다. 
 
멱곡동을 가로지르는 연양천
연양천은 여주시 중앙에 위치한 연하산 남쪽 여흥동 상거리와 하거리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삼교리를 지나면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멱곡동을 지나 점봉천과 합류하고 단현동·신진동·연양동을 거쳐 남한강에 유입되는 하천이다. 남한강에 유입되는 하류 연양동의 동리 이름에서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연양천은 멱곡1통과 2통을 가로질러 흐르며 멱곡동의 넓은 들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   

▲ 멱곡동을 가로지르는 연양천.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정석봉(78) 선생

어린 시절 멱곡동은 어떤 모습이었나?

예전에는 멱곡리가 하나였다. 저 건너2리 멱골이 먼저 생기고 그 뒤에 1리가 생겼다. 그래서 멱곡1리를 새터라고 한다. 나는 새터에서 1944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 기억은 6.25동란에 피난 갔던 것이 기억이 난다. 7살에 피난을 갔는데 어려서 거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쑥뒤’(가남읍 연대리)라고 하는 대로 피난을 갔다. 아버지와 삼촌은 제1국민병으로 가고 어머니, 막내삼촌, 나, 동생 둘 이렇게 피난을 갔다. 할머니는 피난을 가다가 ‘에이! 죽어도 집에 가서 죽는다’고 하며 그냥 집으로 들어갔다. 그 추운 겨울에 잠잘 곳이 없어서 꽁꽁 언 논바닥에 솔가지를 꺾어다가 깔아놓고 그 위에서 자고 그랬다.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이불을 덮어주니까 자기는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언 논바닥이 녹아서 솔가지 사이로 물이 올라와 옷이 젖었다. 피난 갔다 와서 둘째 동생은 홍역으로 죽었다. 지금의 코로나처럼 그 시절에 홍역에 걸리면 다른 마을에 가지도 못하고 다른 마을 사람들이 오지도 않았다. 나도 동생이랑 같이 홍역에 걸렸는데 다 죽다가 살아났다. 제1국민병에 갔던 아버지와 삼촌은 전쟁이 끝나고 제대해서 돌아오셨다. 우리 삼촌은 몇 년 전에 구순이 넘어서 돌아가셨다. 

▲ 멱곡동 정석봉 선생.     © 세종신문

학창시절 학교는 어디를 다녔나?
 
초등학교는 점봉초등학교를 나왔다. 새터에서 10리가 좀 더 되는데 논들 길을 따라 앞개울(연양천)을 건너 2리 멱골을 지나 점봉리를 거쳐 학교를 갔다. 학교 갈 때 동네 아이들이 몰려서 가고 그랬는데 학교 가다 놀고 장난치고 그러다 보면 지각하기 일 수였다. 중학교는 여주중학교를 다녔다. 여기서 한 25리 정도 되는데  걸어서 다녔다. 지금의 찻길이 그전에도 있었는데 우만리, 단현리, 신진리를 거쳐 연양동으로 해서 강변길로 걸어 상리고개를 넘어 다녔다. 여주 장을 다닐 때도 그 길로 다녔다. 그 시절에는 월사금 때문에 초등학교도 못 다니는 얘들이 많아서 중학교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초등하교 월사금이 20환인가 그랬는데 그거 못 내면 학교에서는 집에 가서 가져오라고 쫓아 보내지 집에서는 돈이 없다고 안줘 결국 학교를 못가고 그랬다. 그래서 나도 중학교를 1년 다니다 결국 중퇴를 했다. 부모님들이 돈이 없다고 중학교를 더 이상 못 보내겠다고 해서 떼를 쓰다가 결국 중퇴를 했다. 밥술이나 먹는 집들에서나 중학을 보낼 수 있었다. 
 
중학을 중퇴하고 어떻게 보냈나?

중학을 중간에 그만 두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다가 군대에 갔다 왔다. 품앗이를 나가면 친구들은 일을 못한다고 쫓겨 오고 그랬는데 난 일을 잘한다고 안 보냈다. 6.25전쟁에 피난 갈 때는 3남매였는데 우리 형제자매는 전부 9남매였다. 동생들이 어려서 많이 죽었다. 나와 막내는 24년 차이가 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젊어서 세상을 떠서 동생들을 내가 다 출가시켰다. 군대 갔다 와서 결혼하고 가장이 되어 집안을 이끌어 갔다. 내가 스물아홉 때 아버지 마흔 아홉에 돌아가셨다. 군대 제대하고 잠깐 서울로 나가 막노동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제대하고 고향으로 오니 논이 한 댓 마지기 있었다. 그것도 한해 흉년이라도 들면 나락을 거둬들이기도 쉽지 않았다. 하늘만 보고 농사 짓던 천수답이라 농사가 수월하지 않았다. 쌀도 없어서 품 쌀을 받아다가 먹었다. 그 당시에는 사흘 품을 팔아야 쌀 한 말 줬다. 식구는 많고 먹을 거는 없고 그런 시절이라 죽을 쑤어 먹거나 쌀 조금에 쑥을 한가득 넣어 밥을 해먹고 그랬다. 
 
결혼은 전통방식으로 했나?

결혼은 스물일곱에 가을일 끝내 놓고 음력 11월에 혼례를 올렸다. 한동네 살면서 오빠 동생하고 따라 다니던 사이라 선을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어른들이 허락을 해서 그냥 결혼을 했다. 전통혼례를 했는데 신랑이 가마를 타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처가에 가서 혼례를 올리고 그 가마에 색시를 태우고 또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우리 집으로 왔다. 함재비는 첫아들 낳은 사람이 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동네에 잔치집이 두 집이라 하루 종일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한 잔 먹고 신부 집에 가서 한잔 먹고 그랬다. 한 사나흘 전부터 음식 장만하느라 동네가 북적북적 했다. 그 전에는 잔치에 갈 때 동네사람들이 국수 한 다발씩 이고 오거나 술을 한 대식 지고 와서 먹고 가고 그랬다. 한마디로 잔치음식 품앗이를 했다. 지금은 돈으로 축의금을 내지만 그 때는 국수, 술, 떡 이런 거를 가지고 오고 그 집에 또 큰일이 있을 때 그 만큼 내 놓고 그랬다. 마당에 채울을 치고 온 동네 사람들이 하루 종일 먹는다. 그 시절에는 신혼여행이라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결혼하고 집사람이랑 둘이서 나의 외가에 가서 며칠 있다가 왔다. 강원도 부론이 외가였는데 외할아버지께 인사하러 간다고 하며 갔다 왔다. 한나절은 걸어가는데 흔암리 아홉사리를 따라 도리를 지나 점동 독바위 쪽으로 해서 안평으로 해서 다리거리로 걸어서 산길을 따라 갔다. 나는 바지저고리에 구두신고 색시는 치마저고리에 고무신 신고 그렇게 한나절을 걸어서 외가에 갔다가 며칠 지내고 돌아왔다. 신혼여행이라고 하면 그게 신혼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안성 땅 옥바우가 하룻저녁에 삼개 도를 걷는다는 곳이다. 
 
평생을 멱곡동에서 농사를 지었나?

스물일곱에 결혼하고 여기 멱곡동에서 애들 둘 낳고 살았다. 큰 게 딸이고 작은 게 아들이다. 농사는 주로 논농사를 지었는데 예전에는 여기가 고래실 논 이라고 일 년 내내 물이 떨어지지 않아 참 좋았는데 요즘은 기계가 빠진다고 그거 다 매우고 그런다. 고래실논이 얼마 안 되고 참 귀했다. 여기 멱곡동은 크게 뭐 자랑할게 없지만 나에게는 평생 살아온 고향으로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다. 
 
▲ 멱곡동 향나무 밑에 있는 우물.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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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7/05 [10:18]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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