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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60] 넓고 하얀 모래밭이 장관이었던 금사면 금사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6/17 [15:52]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위) 여주시 금사면 금사리 전경. (아래) 금사리 강변 전경. 강 건너편은 양평군 개군면이다.     © 세종신문

금사리의 유래

금사리는 지형이 새처럼 생겼다고 하여 금새 또는 금계동(金鷄洞), 금사(金沙)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점평리를 합하여 금사리라고 했다. 이곳에 금사천으로 불리는 하천이 있었는데 사금이 많이 나와서 금사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금사리는 점뜰과 금계동, 벌말의 3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계동과 벌말이 1리, 점들이 2리로 행정구역이 편성되어 있다. 금계동은 금사리의 옛 이름으로, 옛날에는 이 지역에서 사금이 많이 났었다고 하며, 또한 닭을 많이 길렀기 때문에 이 지역을 금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점들은 금사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무기를 만들던 곳이라 하여 점뜰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약 100년 전 옹기점이 있어 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점들 아래쪽 마을을 아랫말 이라 하며, 점들 안쪽에 있는 마을을 안말, 금사리 위쪽 마을을 모두 일컬어 웃말이라고 한다. 점들 양지쪽에 있는 마을은 양지말이며, 금사리 동북쪽 강변에 있는 마을이 벌말이다.
      
금사팔영(金沙八詠)

금사리는 경치가 매우 좋아서 목은 이색이 「금사팔영」이란 시를 지어서 더욱 이름났다. 목은 이색이 지은 시 금사팔영은 서산채미西山採薇, 동강조어東江釣魚, 용문착약龍門斲藥, 호곡경전虎谷耕田, 한포농월漢浦弄月, 파성망우婆城望雨, 장흥습률長興拾栗, 주읍심매注邑尋梅로 고려 말 조선 초의 금사리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과 목은의 시대정신이 담긴 시로 보여 진다. 그 중 몇 편을 소개한다.  
 
한포에서 달을 희롱하다(한포농월漢浦弄月)
해가 지니 모래가 더욱 희고 구름이 옮겨 가니 물이 더욱 맑구나
고결한 선비 밝은 달 희롱하노니 다만 자란생이 없어 아쉽도다
 
장흥에서 밤을 줍다(장흥습률長興拾栗)
가을바람 우수수 막 불어오니 밤송이가 점차 주렁주렁 하구나
알밤이 벌겋게 떨어질 때 나 홀로 찾아간 일 기억하노라
 
여강의 끝 금사리 강변

여강은 여주시를 관통하는 남한강을 일컫는다. 여강은 남한강이 섬강, 청미천과 만나는 점동면 삼합리에서 시작해 외평리 여울목을 지나 금사리의 강변의 넓고 새하얀 모래밭을 지난다. 예로부터 여주지역 사람들은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을 여강(驪江)이라 불렀다. 여강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부의 북쪽에 있는데, 나룻배가 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곧 한강 상류이며 주 북쪽에 있다.”고 하여 여주를 지나는 한강을 여강으로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동지지』에도 “곧 한강 상류인데 주치를 감싸 안고 돌아 서북쪽으로 흐른다. 강 가운데 양도가 있고 동쪽 연안으로 보은사(신륵사의 다른 이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금사천.     © 세종신문

사금을 채취했던 금사천
 
금사천은 금사면 장흥리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 외평리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한강수계의 지방하천으로 남한강의 제1지류이다. 계천수계는 본류와 2개의 지류인 소유천과 상호천으로 이루어져 있고 하천연장 5.8km, 유로연장은 11.52km, 유역면적 23.84㎢이다. 하천의 이름은 발원지의 지명에서 유래했으며, '금사‘는 관내 사금이 많이 채취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人터뷰] 심대섭(78) 선생

집안 대대로 금사리에서 살았나?

1944년도에 태어났다. 우리는 청송심씨로 명종의 처남인 13대 할아버지 형제가 8겸인데 인의예지효제충신해를 따서 인겸, 의겸, 예겸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었고 우리 할아버지는 셋째 예겸이다. 우리 집안에서 왕비가 세 명 나왔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우리 12대 고모할머니고,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우리 13대 고모할머니, 경종의 비 단의왕후가 우리 7대조 고모할머니다. 단의왕후는 세월리에서 태어나서 왕비가 되었다. 우리 청송심씨는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 이런 분들은 한양과 김포에서 살다가 12대 할아버지가 세월리로 낙향하셔서 그때부터 세월리에서 살기 시작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여기 금사리로 나와서 살았다. 

▲ 금사리 심대섭 선생.     © 세종신문

어린시절 일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나?
 
나는 5남매 중에 장남이다. 우리 어머니가 9남매를 낳았는데 내 위로 한 명이 죽고 아래로 동생 세 명이 어려서 죽어 다섯 명이 살아 성장했다. 내 밑으로 남동생 둘이 태어나서 1년도 안돼서 죽었다. 해방 후에 마을에 공의라고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보건지소에 근무하는 의사들이다. 그 당시는 페니실린이 개발된 초창기인데 애들이 아프다고 하면 공의가 페니실린을 그냥 찔렀다. 애들이 페니실린 쇼크로 죽었다. 페니실린 쇼크반응 테스트를 해야 하는 데 그런 거 없이 페니실린을 맞고 난 동생이 엄마 등에 업혀 외평리쯤 오다 보면 다리가 뻣뻣해 지더라고 했다. 바로 밑에 동생이 그렇게 죽었는데 그 후에 태어난 셋째 동생도 똑 같이 돌전에 죽었다. 그 밑에 여동생은 6.25때 이천군 율면까지 피난을 갔는데 거기서 홍역을 앓다 죽었다.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그렇게 죽었다. 참~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학교는 이포초등학교 나왔고 중학교는 이포중학교를 나왔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1년 동안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그 이듬해 우리 할아버지가 “야! 구학문도 배워야 하지만 요즘은 신학문을 배워야 해” 하시고는 내 손을 끌고 가셔서 중학교에 입학을 시켜줬다. 그 당시 이포중학교는 정식 인가가 안 난 학교였다. 금사면장이 이포중학교 교장이었다. 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휘문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이 중학교는 한 해 선배인데 그 놈들 중 두 명이 먼저 휘문고등학교를 갔다. 그래서 나도 휘문고를 갔다. 
 
휘문고에 입학하게 된 과정은?

당시 휘문고가 어디에 붙었는지 원서를 어떻게 사는지를 몰랐는데 친구 놈들이 먼저 갔으니까 나도 욕심이 생겼다. 그 중 한 친구에게 부탁을 해 휘문고 원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안 보내 주려고 했다. 친구가 원서를 보내줘서 휘문고 원서를 넣고 입학시험을 보고 내려와 합격날짜에 가 봤는데 석차를 쫙 뽑아서 써 놨는데 내가 14등을 했다. 합격을 하고 언제까지 입학금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데 입학금이 그때 돈으로 3만환이었다. 그 때는 원이 아니라 환이었다. 쌀로 따지면 한 20가마 값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아버지 “야 임마 너 어떻게 하려고 그기에 원서를 넣었냐?”하시었다. 그래서 내가 아랫마을 정생원을 찾아갔다. 의원인데 우리는 생원, 생원 이렇게 불렀다. 내가 그 정생원을 찾아가 절을 꾸벅 하니 너 아무개 아들이 아니냐 어쩐 일이냐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어르신 저 돈 3만원만 꿔 주실래요?” 그러니까 “야이 미친놈아 뭐하려고 그 큰돈을 꿔달라고 해?”그러셨다.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를 가고 싶어 휘문고에 붙었는데 아버지가 돈이 없어서 안 보내 주려고 하는 걸 내가 원서를 구입해서 넣고 시험을 봤는데 붙었다. 그런데 입학금 3만원이 없어서 그렇다고 다 얘기를 했더니 그 양반이 “야! 그래 내가 해준다. 그 돈은 네 아버지에게 받는다”고 하시더니 그냥 서랍에서 돈 3만원을 내줬다. 그걸 받아서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는 말을 안 하고 어머니에게만 살짝 얘기했다. 입학금을 내고 어떻게 휘문고를 1년 다녔지만 그 뒤로 도저히 학비를 댈 수 없어서 결국은 중퇴를 하고 양평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 (위) 1960년도 이포중학교 우등상. 당시는 면장이 교장이었다. (아래) 여주고등농민학원 수료증.     © 세종신문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했나? 
 
5.16혁명이 나서 그 당시 박정희가 중농정책을 썼는데 그 중 하나가 ‘고등농민학원’ 3개월짜리 나오면 고등학교 졸업한 학력을 줬다. 생각해 보니까 그게 났겠다 싶어 거기를 나왔다. 고등농민학원을 3개월을 갔다 와서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사회봉사도 하고 4H도 하고 야학도 하고 그랬다. 마을에 여자애들이 또래가 한 10여명이 있었는데 초등학교도 못나온 얘들이 절반이 넘었다. 걔들이 야학으로 한글을 다 깨치고 시집을 갔다. 우리 아버지는 돈이 안 들어가니까 고등농민학원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셨다. 잠업도 배워서 밭에 뽕나무 심어서 봄에 한 10장, 가을에 10장 누에를 쳤다.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금사리에서 살았나?

군대에 갔다 와서 농협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그 시절에 이동조합을 단위조합으로 묶다보니까 조합장은 면소재지에 가까운 사람이 봉사직으로 했다. 72년경에 단위조합을 활성화 시킨다고 단위조합별로 공채로 영농부장을 1명씩 뽑았다. 그때 농협 영농부장 공채 1기로 농협에 들어가 한 10년 정도 하다가 그만뒀다. 70년대 조합 영농부장 첫 월급이 8천원이었다. 영농부장이면 직급이 지금으로 따지면 상무정도 되는 데 월급이 겨우 8천원이었다. 
 
결혼은 언제 했나?

결혼은 스물여덟에 했다. 집사람은 개군이 친정이다. 중매쟁이 소개를 받고 어머니랑 같이 처가로 첫선을 보러갔다. 개군나루 상좌포 하좌포 나루 두 개가 있었는데 저기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을 가로질러 한 2km정도 걸어가야 한다. 강 한가운데 까지 자갈밭 모래밭을 가로질러 배턱까지 가서 “어이! 배 건너요”하고 소리를 지르면 배가 건너온다. 그 강가 쑥대밭에 종달새 떠오르고 정말 좋았다. 
 
금사리 앞 강변에 대한 추억이 많은 것 같은데….

금사리 앞 남한강변은 60년대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금모래가 기가 막히게 깔려 있었다. 그 모래자갈이 지금도 있다면 하루에 관광객이 수천 명씩 찾아 올 거다. 하얀 백모래가 강변에 쫙 깔려 있었는데 강물에서 아무리 뛰어 놀아도 구정물이 하나도 일지 않았다.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 기억이 양평까지 기차로 와서 개군까지 약 1시간 정도 걸어온다. 그러면 밤이 어두워 배를 띄우기 쉽지 않았다. 구멍가게에서 소주 한명을 사가지고 김 씨 성을 가진 사공에게 간다. 그 사람이 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배 건너달라는 소리는 못하고 내가 휴가 나왔는데 좀 늦어서 오늘 여기서 술이나 한잔 하고 눈 좀 붙였다가 내일 아침에 가야겠다고 하고 소주를 나눠 마신다. 그렇게 4홉들이 칼칼한 소주를 한 병을 먹고 나서 나 여기서 좀 자겠습니다. 그러면 얼큰해진 사공이 “아이! 가가 내가 건네줄게 어서 타”그렇게 해서 늦은 밤에 배를 건너온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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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6/17 [15:52]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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