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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59] 왜적도 비켜간 마을 흥천면 율극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6/10 [14:34]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흥천면 율극리 밤골 마을전경.     © 세종신문

율극리의 유래

율극리는 본래 여주군 길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율동, 부극동, 효자동 일부를 합하고 율동과 부극동의 이름을 따서 율극리라 했다. 자연마을은 가막지, 밤골, 은골이 있다. 가막지는 부곡동이라고도 부르는데 밤골과 은골 사이 마을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웃 밤골은 왜군이 쳐들어왔으나 가막지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발견되지 않아 무사히 난을 피했다고 한다. 가막지 뒤에도 작은 마을이 있는데 주민들은 ‘뒤깔’이라고 부른다. 밤골은 가막지 북쪽에 있는 마을로 밤실, 율동이라고도 부른다. 능서면 구양리나 번도리에서 밤골을 보면 밤송이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은골은 지금의 율극2리인데 가막지 남쪽에 있는 마을로 ‘언곡’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싸울 때 백제군이 거의 전멸했으나 장군 한사람이 이곳에 숨어서 무사히 귀국했다가 다시 싸움터에 나서 크게 승리를 거둔 후 이 고을을 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율극리 양화천

양화천은 이천시 설성면에서 발원하여 여주시 가남면과 북성산 서쪽의 능서면을 가로 질러 남한강에 유입하는 하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두두리천은 천령현 동쪽 5리에 있는데 대교천의 하류이다.”라고 하여 그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 대교천은 곧 양화천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양화천은 신은천 · 화은천 · 대교천 · 이천 · 길천(吉川) 등의 다른 명칭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여지도서』 「이천도호부」 편에는 헌해천이라는 이명도 확인되고 있다. 현재 양화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곳에 있었던 양화나루와 관련된 것으로 전해진다. 매화리, 용은리, 신근리를 돌아선 양화천은 은골 남동쪽 나지막한 언덕을 돌아 율극리, 내양리 넓은 들을 적시며 여강으로 흘러간다. 

▲ 율극리를 돌아 흐르는 양화천.     © 세종신문

밤골 은행나무

율극리 22-3번지에는 ‘여주-29’로 지정된 200년이 훌쩍 넘은 보호수인 은행나무 한 그루가 밭언덕 위에 우뚝 서 있다. 나무의 높이는 약 18m로 원 줄기는 땅에 묻혀 있는지 언덕 위로는 여러 갈래의 가지들이 웅장한 은행나무를 지탱하고 있다. 나무의 수세는 둥글게 퍼져 매우 안정적이고 가지의 뻗음이나 잎의 생육도 양호한 편이다. 

▲ 율극리 보호수 은행나무.     © 세종신문

월화수 목공방
 
율극1리 마을회관 뒤편에 위치한 ‘월화수 목공방’은 젊은 청년이 운영하는 목공방으로 2015년에 터를 잡고 지금까지 꾸준히 목공예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이 목공방은 원목 소품, 가구, 인테리어 분야까지 원목을 재료로 한 다양한 제품 생산하고 있다. 기성 가구 업체와는 다르게 값싼 MDF나 유사목재의 사용을 배재하고 친환경적이면서 고급소재인 원목을 이용하는 것이 이 목공방의 특징이다. 이 목공방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다소 가격이 비싼 편인데 고객들 중 나만의 가구를 원하거나, 친환경 공간 조성 등에 대한 다양한 수요가 있다고 한다. 율극리 공방에서는 주로 생산을 위주로 하며 제품의 전시와 판매는 상거동 375st 아울렛 내에 있는 “씽씽스튜디오”라는 매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처음 맨주먹으로 목공을 시작한 대표는 혈기만 충만한 청년을 받아주신 율극리 주민들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출근하고 있다고 전했다.   

▲ 율극리 월화수 목공방.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이존수(73) 선생

율극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나?

1949년에 가막지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큰형이 올해 아흔 하나인데 큰형을 포함해 6남매가 다 살아있다. 우리 할아버지는 선비라 친구들이 오면 사랑방에서 시나 읊고 그랬다. 할아버지는 가을에 타작하고 마당에 멍석을 늘어놓고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멍석을 덮는 경우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수염을 길게 기르셨는데 이빨을 닦고 난 칫솔로 수염을 쓸어내리시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아버지 형제도 6남매인데 우리 아버지가 장남이었다. 할아버지가 집안일을 안 해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일을 했다. 아버지는 열네 살에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어린 시절은 주로 어떻게 보냈나?

학교 다닐 때는 양화천가에 소 뜯기러 다녔다. 개울가에 소를 고삐로 매 놓고 개구리잡고, 물속에 들어가서 모래무지도 잡고 그랬다. 그전에는 흙둑에 게가 그렇게 많았다. 게구멍에 손을 넣어보면 안에 게가 만져지면 나뭇가지를 집어넣어 살살 흔들면 게가 나뭇가지를 무는데 그때 살며시 당기면 게가 딸려왔다. 모래무지는 양화천 바닥을 쇠갈고리로 벅벅 긁으면 무래무지가 툭 튀어나오는데 그때 족대로 받아낸다. 양화천 건너 능서 쪽 상동으로는 대부분 옥수수를 심었는데 여름에 수영을 해서 건너가서 옥수수를 서리해서 쪄먹고 그랬다. 지금의 율극교 자리가 예전에는 나무를 세워서 뗏장을 엎어놓고 건너다니는 섶다리가 있었다. 

▲ 율극리 이존수 선생(오른쪽)과 장상채 노인회장     © 세종신문

학교는 어디로 다녔나?
 
초등학교는 흥천국민학교를 나왔는데 여기서 한 10리 되는데 어렸을 때는 그렇게 멀었다. 겨울에 춥고 그러면 한교 가다가 묘 옆 따뜻한 곳에 누었다가 그냥 집으로 오고 그랬다. 중학교는 흥천에 중학교가 없어서 이천중학교를 다녔다. 이천농고랑 같이 있었다. 내 바로 위의 형이 이천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같이 학교 옆에서 자취를 했다. 그 시절에는 밑반찬이라는 게 변변치 않아 마가린에 간장을 넣고 많이 비벼먹고 다녔다. 고등학교도 이천농고를 나왔다. 마을에서 이천 학교를 가려면 신근1리 주유소 앞에서 여주에서 이천가는 버스틀 타고 갔다. 처음에는 버스로 통학을 했는데 여기서 신근1리까지 걸어 가려며 너무 멀었다. 밥 먹고 들고 뛰어야 겨우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다. 여기서 학교 왔다 갔다 할 때 장날에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이천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장보러 가는 사람들이 짐을 한보따리씩 들고 타니 우리 같은 학생들은 도저히 버스를 탈수가 없었다. 
 
 
결혼은 스물여섯에 했다. 처가는 경기도 양주다. 아버지와 집사람 작은 아버지가 아는 사이였다. 장인이 일찍 돌아가셔서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다. 그 당시 집사람 작은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보고 나이가 찬 조카딸이 하나 있는데 결혼할 신랑감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중매를 하고 말 것도 없이 우리 아들하고 하면 되겠네!’ 그러셨다. 첫선은 서울 다방에서 봤다. 나는 누나와 같이 나가고 우리 집사람은 서울 사는 작은엄마와 같이 왔다. 결혼하기 전에 집사람이 경기도 부천에서 직장을 다녔다. 우리 누나와 집사람 작은 엄마가 자리를 비켜줘 우리 둘이서 서울 구경을 하다가 시간이 되어서 헤어져 여주로 돌아왔다. 결혼하기 전에 그거 딱 한번 만났다. 첫선 볼 때가 겨울이었는데 봄에 결혼했다. 농사일 끝내놓고 선을 보고 봄에 농사 시작하기 전에 바로 결혼을 했다. 서울에서 결혼식을 했다. 그 시절에는 축의금을 곡식이나 음식으로 했다. 누구네 집에 잔치한다고 하면 쌀을 내거나 떡이나 술, 감주 등 잔치음식을 해서 축의금으로 내고 그 다음에 자기 집에 잔치가 들면 떡이나 음식으로 받고 그랬다. 잔치음식 품앗이라고 할 수 있다. 혼수도 그 당시는 옷감으로 해서 저고리감, 치맛감 이렇게 몇 감 이렇게 해 오고 그랬다. 결혼식을 끝내고 신부랑 같이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노인회장: 왔다! 신혼여행을 갔다고? 호강했네! 그 시절 서울 사람들은 결혼하면 택시타고 남산 한 바퀴 돌고 오는 게 다였는데...)

나도 친구들 하고 택시타고 남산에 갔다가 마장동에서 버스타고 온양으로 신혼여행 갔다. 온양온천에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바로 서울 처가로 갔다. 원래는 여주로 왔다가 이틀 뒤에 처가로 재향을 가야 맞는데 차편이 귀해 온양에서 여주 왔다가 또 서울 가느니 바로 서울로 가서 처가에 인사하고 여주로 내려왔다. 지금도 우리 집사람이 가끔 그런다. “오빠가 ‘암만 시골이라고 해도 땅이라도 있고 그러니까 가면 밥은 굶지는 않지 않겠냐’며 자꾸 강요를 해서 시집을 왔다”는 거야. 자기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오빠 때문에 왔다고 그런다. 허~참!
 
농사는 주로 어떤 작물을 재배했나?

논농사는 벼농사만 지었다. 옛날에는 이 마을 논이 대부분 천수답이었다. 그래서 논 마다 웅덩이가 있었다. 웅덩이 물을 퍼서 논에 대고 그랬다. 옛날에는 시구뎅이 논, 고래실을 최 상답으로 여겼다. 가을에 벼를 벨 때도 푹푹 빠지는 논이었다. 지금은 빠지는 논은 논으로 치지도 않는다. 율극리에서 귀백리로 넘어가는 길가 논이 다 다랭이논이었다. 쓰레질은 좀 어려운데 우리 아버지에게 배웠다. 처음에 내가 쓰레질 하러 논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가 어디로 해서 어디로 어떻게 쓰레질을 하라는 것을 다 일러줬다. 쓰레질은 우리 마을 광자 아버지가 상일꾼이었다. 마을에 쓰레질 잘하는 사람이 두 사람밖에 없었다. 나는 쓰레질 배우다가 바로 경운기를 샀다. 인근 마을에서 내가 경운기를 제일 먼저 샀다. 밭작물은 보리, 밀, 고구마, 감자 농촌에서 하는 거는 다 심었다. 대부분 집에서 먹는 거고 고구마는 내다 팔았다. 짚으로 짠 가마니에 담아서 팔았다. 고구마를 캐고 나면 가마니 채 차에 실어 서울에 가져가서 팔았다. 고구마 한 가마니가 7~80관 나갔다. 옛날에는 고구마 겨울양식이었다. 방 윗목에 수수깡 발을 엮어서 거기다가 고구마를 잔뜩 저장해 두고 겨우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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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6/10 [14:34]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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