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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57] 이천이 더 가까운 여주 땅 가남읍 상활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5/25 [18:05]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가남읍 상활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상활리의 유래

상활리는 원래 이천 동면 지역이었으나, 조선 효종 왕비 인선왕후를 영릉으로 모시고 나서 여주군 가서곡면에 속했다.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 때 상응동과 활산리를 합하여 상활리(上活里)라 하였다. 상활리는 1리, 2리로 구분하는데 상활1리를 ‘활산’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곳 마을 앞에는 위로부터 아래로 활을 잡아당긴 형상의 산이 있는데 함평 이씨가 이곳 중간 지점에 사당을 짓고 부락을 이루게 되면서 산의 모양이 활 모양이라 하여 ‘활산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상활2리를 ‘응암’이라 하는데 이곳 마을 뒷산에 매봉재라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산 전체에는 돌이 별로 없는데 산봉우리에는 큰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상징하여 응암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 때 이천시 부발읍 응암리를 이천 응암리, 상활리를 여주 응암리라고 불렀다. 그 전에 어른들은 여주 응암리를 상(上)응암 이천 응암리를 하(下)응암이라 불렀다 한다.     
 
상활리 영월 신씨

상활리에는 영산, 영월 신씨 22세 신성년이 춘천에서 입향하면서 대를 이어 왔다. 영산 신씨 시조 신경은 중국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 때 들어와 1138년(인종 16년)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주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정의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영취산 아래에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신경의 8대손에서 영월부원군에 봉해진 신온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와 이부판서를 지낸 신한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의 후손들이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그 후 22세 신성년이 춘천에서 상활리로 입향하면서 여주에 터를 잡았다. 23세 두동은 전의현감을 지냈다. 가남읍 상활리에는 현재도 영월 신씨가 약 10호 가량 살고 있다.

▲ 상활리 마을벽화.     © 세종신문

주민들의 노력이 엿보이는 마을 벽화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인 마을벽화에 대한 평가가 다양한 가운데 가남읍 상활리 마을벽화는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마을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끊긴지 오래고 연로한 노인 혼자서 사는 집이 나날이 늘어가는 것이 시골마을의 현실이다. 도회지로 나간 자녀들은 먹고 살기가 바빠 1년에 한두 번 방문할까 말까하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시골집은 담장이 허물어지고 행랑채가 쓰러져 가고 있다. 쇠락해지는 마을의 외관을 어떻게 해서라도 꾸며보고 싶은 상활리 주민들은 허물어지는 담벼락과 쓰러져가는 행랑채에 그림을 그려 넣어 그 처참함을 잠시나마 보기 좋게 꾸며두었다. 상활리의 벽화는 여주 마을의 또 다른 면모를 대변하고 있다.  
 
양화천과 해룡천

상활리 앞들에는 양화천과 해룡천이 오랫동안 두 줄기로 흘렀는데 1970년대에 제방공사를 통해 하나의 물줄기로 합하여 지금의 양화천 모습으로 만들었다. 상활리 앞들을 적시는 양화천은 이천시 설성면에서 발원하여 가남면과 북성산 서쪽의 능서면을 가로 질러 남한강에 유입하는 하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두두리천은 천령현 동쪽 5리에 있는데 대교천의 하류이다.”라고 하여 그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 대교천은 곧 양화천을 말하는 것이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북성산 서쪽으로 북류하고 있는 현재의 양화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신은천교‘로 표기하고 있는 동시에 복하천이란 지명이 그 옆에 따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지도』나 『팔도군현지도』에서도 신은천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현재의 양화천은 신은천 · 화은천 · 대교천 · 이천 · 길천 등의 다른 명칭으로도 불렸다. 현재 하천 지명을 ’양화천‘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곳에 있었던 양화나루와 관련된 것으로 전해진다.
해룡천은 경기도 이천시의 동쪽에 있는 해룡산 서편 기슭에서 발원한 물이 북쪽으로 흐르며 고담저수지를 지나 별명교 근처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장록교 앞에서 양화천에 유입되는 하천이다. 하천이 발원한 해룡산이라는 산 이름에서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1872년지방지도』에서도 해룡산 근처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표시하고 있다.  

▲ 양화천과 해룡천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박관옥(81) 선생

어린 시절 상활리의 모습은 어떠했나?
1941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가정이 어려워서 간신히 초등학교만 나왔다. 태평리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우리 마을에서 태평리 보다 부발읍 가산국민하교가 더 가까워 거기를 나왔다. 바로 위 형하고 나하고 세 살 차인데 학교를 같이 들어갔다. 피난 갔다 오고 그러다 보니까 갓 시집갈 처녀들도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와 공부를 같이 했다. 열다섯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어머니가 자기는 못 배웠으니까 우리는 배워야 한다고 여주 태평리 신성중학교에 형하고 같이 입학을 했다. 그런데 생활이 너무 어려워 우리 엄마는 아무리 가르치려고 해도 생활이 감당이 안 되니까 나랑 형이 중학교 2학년을 못 마치고 중퇴를 했다. 학창시절에 마을 앞들에 내가 큰 게 하나 있는데 학교 갔다 오면 냇가에 가서 놀았다. 어린 시절에는 딱지치기를 많이 했다. 겨울에 논 얼음판에서 팽이치기, 썰매타기를 했는데  가을 추수가 끝나면 마을에서 제일 깊은 논에 물을 대서 겨울 빙판이 될 수 있도록 물골을 막아서 빙판을 만들었다. 겨우내 거기서 온종일 놀았다. 

▲ 여주시 가남읍 상활리 박관옥 선생.     © 세종신문

형제들이 많았나?
9남매 중에 막내다. 그 당시 다 없이 사니까 여자들은 열대여섯 되면 다 시집보내고 우리 형들도 밥 먹기 힘드니까 전부 봇짐을 싸서 서울로 떠나버렸다. 그렇게 다 떠나고 나서 내가 제일 어리니까 부모님들이 나하고 깊이 살았다. 우리 큰형은 나보다 20살이 더 많다. 장조카가 나보다 세 살 어린데 우리 어머니가 연세가 많으셔서 젖이 없으니까 내가 우리 큰 형수 젖을 먹고 자랐다. 그 시절에는 그런 때였다. 시어머니도 애를 낳고 며느리도 애를 낳던 시절이다. 지금 사는 집도 우리 부모님이 살던 그 집터다. 
 
50~60년대 생활상은 어땠나?
그 옛날 장도 가남 선비장이 아니라 이천장을 다녔다. 여기 생활권은 이천이었다. 예전에 우시장에서 소, 돼지를 사다 길렀는데 여기서 이천 우시장까지 가서 송아지, 돼지 새끼를 사다가 길러서 팔고 그랬다. 나도 63년도에 결혼했는데 너무 생활이 어려워 빚을 얻어다가 이천장에서 송아지를 두 마리 사다가 길렀다. 그 놈들이 2년이 지나니까 새끼를 낳아 큰 소를 팔아 마을 앞에 논 천 평을 샀다. 이 앞에 논이 천 평이 나왔는데 그걸 가만히 따져 보니까 소 두 마리 팔면 사겠더라고 그래서 소를 팔아 논을 샀다. 돼지도 그렇게 해서 늘려갔다. 그 시절에 소나 돼지를 교미시키려면 동네 대여섯 집에 한 사람이 수퇘지나 수소를 키웠다. 돼지나 소가 발정을 하면 그 집에 가서 언제 오라고 하면 그 집에서 수퇘지나 수소를 가지고 와서 교미를 붙인다. 교미를 붙이면 소는 돈을 주고 돼지는 새기를 낳으면 한 마리 줬다.
 
부모님들도 억척같이 사셨을 것 같은데?
우리 어머니는 대단하신 분이시다. 우리 집이 어렵고 애들은 많고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애들을 먹여 살리려고 솜틀을 사다가 솜을 틀어줬다. 목화를 틀어서 명을 뽑아 명을 짜고 하는 그 솜 트는 일을 했다.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목화를 심었는데 한 근에 얼마씩 받고 그걸 틀어줬다. 그 다음에 우리 어머니 을지로 3가에서 국수틀을 사다가 국수를 뽑아 팔았다. 밀가루를 반죽을 해서 틀에 넣으면 평평하게 펴지고 또 그걸 접어서 쓸어 가느다란 칼국수가 나온다. 그 칼국수를 대나무 꼬챙이에 걸어서 말리면 된다. 아침에 뽑아서 하루 말려 저녁에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가져간다. 그것도 어려우니까 우리 어머니는 서울에 가서 들기름 짜는 거를 사가지고 왔다. 들기름은 들깨를 국수틀과 비슷한 기계로 빻아서 그걸 시루에 담아 가마솥에 올린 후 시루뽕을 바르고 찐다. 찐 들깨를 삼베보자기 위에 깔고 그 위에 쏟아 붓고 큰 나사를 돌리면 압력기가 내려와서 기름을 짠다. 그 시절이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니까 50년대 초반 중반 그랬다. 

▲ 상활감리교회.     © 세종신문

상활감리교회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우리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하셔서 나도 교회를 다녔다. 처음에는 우리 마을에 교회가 없어서 부발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 우리 어머니를 주축으로 동네 몇몇 교인들이 부발이 너무 멀다고 난리 통에 사용하지 않는 마을 회관을 사서 거기를 교회로 꾸며서 사용했다. 교회는 꾸며놨는데 목사님이 없어서 가산리 목사님한테 찾아가서 너무 멀어서 못 다니니까 목사님이 우리 마을에 와 달라고 요청을 했다. 목사님에게 자전거를 한 대 사줬다. 가산리에서 1부 예배를 드리고 자전거 타고 와서 여기서 2부 예배를 드렸다. 
 
결혼은 언제 했나?
결혼을 목사님 소개로 했다. 내가 총각으로서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신앙생활을 곧잘 하니까 이 양반이 천안에 있는 동기 전도사에게 물어서 우리 부부를 중매를 해 준거다. 첫 선은 수원에서 봤다. 이천에서 수여선을 타고 갔다. 우리 쪽은 목사님과 어머니 나 이렇게 나가고 저쪽에서도 목사님 그쪽 어머니 처자 이렇게 나왔다. 수원 다방에서 만나서 선을 보는데 우리 어머니는 신앙인이고 얼굴 예쁘장하게 생겼으니까 물을 것도 없이 덮어놓고 승낙을 하셨다. 스물세 살 나랑 동갑인데 검정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고 나왔다. 그게 가을인데 가을일 끝나고 나서 바로 결혼을 했다. 12월 20일에 결혼을 했다. 우리 집에서는 ‘오시땡’이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트럭에 운전기사와 우리 큰 형, 나 이렇게 셋이 타고 갔다. 결혼식을 끝내고 그 차에 우리 집사람을 태워서 이불보따리 하나 싣고 왔다. 3일 뒤에 ‘자양 간다’고 해서 두 내우가 처가에 인사를 하러갔다. 그 시절에 신부가 자양을 가지 않으면 평생 친정에 못 간다는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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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5/25 [18:05]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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