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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105] 단합이 잘되는 산재(散在)마을 대신면 가산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2/08/04 [17:21]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가산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가산리의 유래
가산리는 본래 여주군 등신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천북동, 장산동, 제가동을 합하여 제가와 장산의 이름을 따서 가산리라하고 대신면에 편입되었다. 개가말, 두라리, 사창골, 안골, 재개울, 잼말, 흥촌 등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가산1·2·3리로 행정리가 나누어졌다. 개가말은 사창골 남쪽에 있는데 천남천변 갯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두라리는 천북동이라고도 불렀는데 개와집땀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천남천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두루두루 둘러본다 하여 두라리를 천북동이라 한다. 용두동은 개가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용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재개울은 마을 양쪽으로 산이 있어 재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재곁울이라 하다가 재개울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흥촌은 어느 지관이 지나가다가 이 터에 마을이 생기면 번창할 것이라 해서 생겼다고 한다. 사창골은 가산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예전에 세곡을 모아 놓았던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사창골이라 한다.   

▲ 가산리 느티나무.     © 세종신문
 
가산리 느티나무
가산리 521번지에는 ‘여주-53’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약 180년, 높이 10m, 수관폭이 8m인 느티나무가 농가 옆 야산 입구에 우뚝 서다. 세력이 좋고 잔가지가 잘 발달되어 있고 큰 줄기도 곧고 길게 발달되어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무 위로 고압선이 지나가 나뭇가지가 고압선에 닿으면 나무에 고압의 전류가 흐를 수 있어 가지를 계속 쳤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여주시에 요청하여 고압선을 지하로 묻고 난 후 부터는 나무가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이홍렬 가옥
이홍렬 가옥이 위치한 갯가말은 전주 유씨가 터를 잡으면서 시작된 마을이다. 전주 유씨는 이 마을에서 14대 정도 거주하고 있다. 1972년의 침수로 인해 3가구가 이주하여 남은 가구 수는 4가구 정도이다. 마을 주변으로 안골, 사창골이 있으며, 갯가말까지 합해 한마을로 보이기도 한다. 개울을 건너면 앞들이 펼쳐져 있다. 이홍렬 가옥은 도로변에 남동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ㄱ자형 안채와 신축한 행랑채가 튼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이 가옥의 안채는 “귀하(龜河) 대정삼년(大正三年) 갑인(甲寅) 삼월(三月) 초일일(初一日) 사시(巳時) 입주(立柱) 상량(上樑)…”이라는 상량문을 통해 1914년에 건립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마을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 가옥은 유국희 전 대신면장의 생가였다고 한다. 

▲ 능성 구씨 재실.     © 세종신문
 
능성 구씨 재실 ‘봉선재’
여주의 능성 구씨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시조로부터 15세 구영이 16세기 중반경 광주에서 여주로 입향 하면서 부터다. 이에 앞서 전서공파로서 개성윤 및 중추원부사를 지낸 7세 도원수공파의 파시조 성로 때 여주에서 집안의 기틀을 잡았다. 구성로는 고려후기의 무신으로 1337년(우왕 3)에 대호군을 지냈으며, 1388년(우왕 14) 4월에 고려가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명(明) 정벌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강원도부원수로서 참가하였다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가담하여 그 공로로 공신반열에 녹훈되었다. 가산리 성씨의 70%이상이 능성구씨라고 한다. 2013년 3월 후손들이 조상을 잘 받들어 모신다는 뜻의 ‘봉선재(奉先齎)’라는 이름의 재실을 새로 지었다.   

[마을人터뷰] 민병주(77), 유국희(75) 선생

어린 시절을 가산리에서 보냈나?
민병주 : 나는 1946년에 여기 가산리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은 정말 어려울 때라 다들 힘들게 살았다. 6.25전쟁 때 피난을 갔는데 내가 너무 아파서 나보다 열 살 많은 우리 누이가 늘 업고 다녔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송아지도 끌러 갔던 모양인데 우리 누이가 나를 등에 업고 송아리를 끌고 산등성이를 넘어가는데 송아지가 갑자기 내달려 혼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 
 
초등학교는 어디를 다녔나?
민병주 : 초등학교는 천남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한천에서 검정고무신으로 배를 만들어 띄우고 놀고 그랬다. 마을 논 한가운데로 조그마한 길이 있어서 그 길로 다녔다. 논길 가에 한천으로 흘러가는 작은 도랑이 있었는데 학교 갔다 오다 도랑물을 막아놓고 물고기를 잡아 고무신에 담아오거나 버들가지에 꿰서 오면 어머니가 매운탕을 끓여주고 그랬다. 

▲ (왼쪽부터) 유국희·민병주 선생, 구본왕 이장.     © 세종신문

어린 시절에 주로 어떻게 놀았나?
민병주 : 여름이면 동네 애들이 전부 소 뜯기러 저 아래 남한강 가로 모였다. 사격장 섬을 기준으로 가산리 쪽이 앞강이었다. 그 앞강이 동네아이들 놀이터였다. 소를 둑방에 매놓고 빨개벗고 멱 감고 그랬다. 그 앞에 뜰이 ‘어랭이뜰’인데 한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큰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늪지대에 큰 붕어, 잉어가 많았다. 앞강에는 재첩, 배트리(다슬기)도 엄청 많았다. 우리가 배트리를 잡아 오면 어머니가 된장국을 끓여주시는데 배트리를 대추나무 가시로 빼먹고 그랬다. 
 
남한강에서 물고기를 어떻게 잡았나?
민병주 : ‘동아줄후리기’라고 새끼로 동아줄을 한 40~50미터 꼬아서 그 밑에 돌멩이, 짚 이런 거를 매달았다. 동아줄 한쪽 끝을 사람이 끌고 강 안쪽으로 들어가 반원형으로 만들면 여러 사람이 동아줄을 강가로 끌어당겨 물고기를 잡았다. 강가에 큰 양은솥을 걸어놓고 매운탕을 끓여 동네사람들이 다 같이 나눠먹었다. 밭에 마늘잎이 푸릇푸릇 할 때 마늘을 뽑지는 못하고 마늘잎을 따서 매운탕에 넣어 먹었다. 그 맛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였다. 
 
남한강에 나루터는 따로 없었나?
민병주 : 가산리 앞에는 없었고 천남리 밑에는 ‘사비나루’가 있었다. 가산리 아래 강가 내려가는 길을 ‘비트거리’라고 불렀다. 그 길의 유래는 나루터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못 봤지만 어렸을 때 동네 노인들 말이 강가에 나루가 있었는데 굉장히 번성했다고 한다. 나루터에 술집도 많이 있어서 동네사람들이 항상 그 길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 올라온다고 해서 비트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도 그 일대에는 기와장이 많이 나온다. 
유국희 : 나는 고등학교를 여주농고를 다녔는데 천남리 아래 양수장 밑 사비나루를 주로 이용했다. 그 나루터에서 나룻배로 강 건너 모래톱에 내려주면 양섬 앞으로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강 건너 모래톱에서 양섬이 저 앞에 보여도 긴 모래밭을 따라 걸어가면 한 30분은 족히 걸어가야 했다. 장날이면 동네사람들이 전부 쌀과 곡식을 한 두 말씩 이고 지고 나루터를 이용해 장에 가고 그랬다. 장마에 물이 많이 불어 여기 나루터를 이용할 수 없을 대는 오금리로 해서 학동나루로 가서 큰 배로 군청 뒤 여주나루로 가서 등하교를 했다. 

▲ 가산리 앞 남한강변.     © 세종신문
 
대신중학교로 진학을 했나?
민병주 : 중학은 대신중학교로 갔다. 당시 임세영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이분이 한의사고 한약방을 운영해서 소풍은 항상 용문산으로 갔다. 용문산에서 약초를 캐는데 그 약초를 공책과 바꿔줬다. 가을이면 학생들이 각각 영(이엉)을 한단씩 만들어 갔다. 영(이엉)은 학생들이 못 만들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만들어 다음날 지게로 져다주고 그랬다. 그렇게 모은 영을 가지고 학교 초가지붕을 새로 올렸다.  
 
학교를 마치고 나서 어떻게 보냈나?
민병주 : 중학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학교를 마치면 바로 집으로 와서 농사일을 도왔다. 그 시절은 대부분 사람의 손으로 농사를 짓던 때라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손으로 모 심고, 피살이하고, 낫으로 벼 베서 논에 가지런히 늘어서 말리고 다 마르면 걷어서 단으로 묶어 집으로 끌어들여 놓으면 집집마다 순번을 정해 타작을 했다. 타작은 발로 밟는 수동 탈곡기로 타작을 하는데 두 명이 같이 밟아야 한다. 두 사람은 탈곡기 발로 밟으며 탈곡을 하고 또 다른 두 사람은 옆에서 볏단을 건네준다. 제일 어른은 탈곡기 앞으로 떨어지는 나락의 이삭을 긁어내고 또 한사람은 나락을 틀고 난 볏단을 뒤로 던지면 그걸 한아름씩 모아둔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 단을 차곡차곡 쌓아 볏짚가리를 만든다. 
나는 중학교만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은 못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장남이라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결혼은 몇 살에 했나?
민병주 : 결혼은 군대 갔다 와서 스물여덟에 했다. 중매  결혼인데 집사람은 양평 용문 사람이다. 선은 용문 처가에서 봤다. 서로 인사를 하고 둘이서 마을 개울가 산책을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결혼을 하자고 했는데 반응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봄에 만나고 그 사이 두 번 더 만났고 나서 가을에 결혼을 했다. 처가에서 식을 올리고 그날로 우리 집으로 왔다. 갈 때는 택시를 두 대 대절해서 갔고 올 때는 택시에 트럭까지 대절을 해서 혼수까지 싣고 왔다. 첫날밤을 보내고 나서 다음날 아침에 우리 부모님들께 첫 인사를 드렸다. 
 
평생을 가산리에서 살았는데 소감이 어떤가?
민병주 : 결혼하고 가산리에서 자리를 잡고 5남매를 낳아 키웠다. 처음에는 농사만 짓다가 둘째를 낳고 나서 여주군청 공무원으로 들어가 정년퇴직을 했다. 우리 동네 가산리는 산재부락이라 집들이 띄엄띄엄 있지만 단합이 정말 잘된다. 주민들이 전부 순하고 무던해서 싸우는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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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8/04 [17:21]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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