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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104] 만석지기가 난다는 금사면 장흥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2/08/01 [18:03]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금사저수지에서 내려다본 장흥리 마을.     © 세종신문

장흥리의 유래
옛날에는 지금의 금사면 장흥리 일대를 장흥동이라 하였으며, 마을에는 인가가 없고 장흥사라는 큰 절만 있었다고 한다. 장흥사는 황창부위 변광보의 묘를 쓰게 됨에 따라 어명에 의해 원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장흥사가 있었던 마을이라 장흥골 또는 장흥동, 장흥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흥리가 됐다. 자연마을로는 양달말과 음달말이 있다. 양달말은 장흥리 위쪽 마을로 양지가 드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음달말은 장흥리 아래쪽 마을로 응달이 지는 지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느티나무골은 장흥리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으며 현재는 골프장 숙소가 들어서 마을은 없어졌다.   

▲ 변광보와 경순궁주 합장묘.     © 세종신문
  
변광보와 경순궁주 합장묘
장흥리 상두산 증선에는 부인인 소현세자 7녀 경순군주와 합장한 변광보의 묘가 있다. 장흥리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은 황주 변 씨는 17세기 후반경인 17세 광재와 아우 광보 때 여주로 입향하였다. 현재 금사면 장흥리에 10호가 안 되는 가구만 남아있다. 변광보는 소현세자 3녀인 경순군주(1643~1697)와 혼인하여 황창부위에 봉작되었는데 일찍 죽었다. 당시 토전과 함께 노비도 있었고, 관직도 순의대부오위도총부부총관 증직되었는데 자식이 없었으므로 특명으로 종손 치은, 즉 형인 광재의 아들 일의 2남에게 대를 잇도록 하였다. 

장흥사지와 약천암
장흥리 상두산 내 남쪽 골짜기인 절골에 옛 절터가 있는데 이곳이 장흥사지다. 장흥사지 앞에 직경1미터 정도 되는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동네에 부정한 일이 있을 때는 우물물이 뒤집힌다고 한다. 때문에, 상여가 이곳을 지날 때는 가마니나 거적으로 이 우물을 덮는다고 한다. 또한, 겨울에 우물물이 마르면 그해 여름에 가물어서 농민들이 물 걱정을 하게 된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현재는 장흥사지 뒤쪽으로 조그마한 암자가 하나 있는데 약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어 약천암(藥泉庵)이라 불렀다고 한다. 

▲ 변재덕 가옥 안채.     © 세종신문

변재덕 가옥
장흥리에는 1800년경에 지어진 변재덕 가옥이 있는데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 가옥은 황창부위 변광보와 경순군주의 합장묘를 위한 묘막 겸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황창부위 변광보는 소현세자의 막내딸 경순군주의 부군이다. 경순군주는 소현세자의 셋째 딸로 1643년 태어나 세 살 되던 해 그 아버지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효종이 친딸같이 길렀고 14살 되던 해 황창부위 변광보와 혼인하였다. 변광보는 황주 변 씨로 망암 이중의 증손자로 당초 영평(지금의 포천) 갈현에 장사지냈으나 1686년 3월에 지금 자리로 이장하고 1698년 경순군주를 합장하였다. 이 가옥의 터는 당시 사패지로 불하받은 것이라 하며 이 가옥은 만석지기 집, 궁택, 별궁, 변부마댁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 금사저수지.     © 세종신문

금사저수지
1968년에 완공된 장흥리에 있는 저수지를 금사저수지라 부르는데 금사면과 흥천면 일대 논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다. 성원저수지라고도 부르는 금사저수지는 1968년 호연천의 주류인 구상천과 원상천이 합류하는 곳을 막아 건설하였다. 1977년 물을 보충하기 위해 호연천의 물을 다시 퍼 올리는 역수양수체계로 완공하였고 저수지 물은 금사리와 서원리, 흥천면 일대의 관개용수로 공급되고 있다. 2012년 둑 높이기 사업이 준공되어 현재는 제방 높이 45.6m, 제방길이 285m로 일대에서 가장 큰 저수지다. 금사저수지에서 시작된 금사천은 지류인 소유천과 상호천을 만나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마을人터뷰] 홍갑례(88) 여사

장흥리에서 얼마나 살았나?
올해 내 나이가 여든여덟이다. 열여덟에 장흥리로 시집을 와서 70년을 살았다. 태어나기는 저 건너 양평 강상면에서 1936년에 태어났다. 

▲ 홍갑례(오른쪽에서 세 번째)여사와 장흥리 주민들.     © 세종신문

일제강점기 때 기억이 있나?
지금 생각에 왜정 때 소학교에 입학면접을 보러 갔는데 일본사람들이 빨간 모자, 하얀 모자를 쓰고 앉아 있었는데 어떻게나 무섭던지 벌벌 떨었다. 달 그림, 해 그림을 그려 놓고 이게 뭔지 맞춰 보라고 했다. 콩, 팥, 조, 수수 이런 곡식을 올려놓고 이름을 맞추라고도 했다. 너무 무서워서 대답도 못 했는데 그게 입학시험이라 떨어졌다. 내가 열 살 때 해방이 되었는데 일본사람을 막 두들겨 패서 쫓아내고 그러면서 양평읍이 하도 복닥거리니까 시집 간 우리 언니가 잠깐 집으로 와 있었다.
 
해방 후에는 어떤 것이 기억 나나?
열다섯에 6.25 전쟁이 났다. 저 건너 양평 강상면에서 여기 장흥리로 피난을 왔다. 여기 장흥리에 우리 작은 어머니 친정이 있어서 우리 아버지만 집에 남고 식구들이 다 여기로 피난을 왔다. 사촌 오빠랑 같이 강상면으로 가서 쌀을 가져왔던 게 생각이 난다. 중공군들이 어떻게나 지랄을 하는지 논 언덕에 숨었다가 가고 숨었다가 가고 그렇게 한참을 갔다. 어둑어둑해서 마을에 도착하니 우리 아버지가 누구누구라고 설명을 했던 게 생각이 난다. 집에서 쌀 두 말을 이고 여기 장흥리까지 왔다. 

장흥리의 옛 모습은 어땠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 여기 장흥리로 시집을 왔다. 열여덟인가 그랬는데 집안에 입 하나라도 줄여야 한다고 시집을 보냈다. 시방은 여기 장흥리가 많이 발전했지만 6.25 전쟁 때 내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집이 몇 집 없었다. 저수지 자리도 골짜기인데 전부 다랑논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다랑논이 전부 고래실 논인데 쌀을 꽤나 거둬들였다. 저 앞 변 서방네가 그 다랑논으로 만석지기라고 했으니 대단 한 거다. 부모네들이 다 정해놓고 혼례 날 신랑 얼굴을 처음 봤다. 2월 추울 때 시집을 왔다. 신랑이 가마를 타고 우리 친정 강상면으로 와서 혼례를 올리고 그날로 그 가마를 타고 내가 여기 시댁 장흥리로 왔다. 시댁에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 둘, 시동생 하나가 있었다. 집은 삼칸 집인데 행랑채가 있었는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행랑채로 나가고 우리가 안채를 사용했다. 시어머니가 참 좋은 사람이 시집살이 전혀 안 했다. 
 
장흥리가 산골인데 먹고살기 힘들지 않았나?
장흥리 저수지가 생기기 저에는 그 자리가 전부 논이었다. 여기 장흥리에서 천석군이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논이 많고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서방네 논을 소작했다. 내 기억으로는 농사를 지으면 우리가 7을 먹고 주인에게 3을 줬던 것 같다. 밭은 겨울에 밀, 보리를 심고 밀, 보리를 베어내고 나면 콩과 깨를 심었다. 밀과 보리를 채 다 베어내기 전에 두둑 사이사이에 콩과 깨를 심었다. 그래도 콩과 깨가 참 잘되었다. 그렇게 여기 장흥리에서 6남매를 낳아 키웠다. 큰 애가 육십이 넘었다. 애들이 학교 다닐 때는 소학교는 저 산 너머 하호분교를 다녔다. 지금의 골프장이 있는 고개를 넘어 다녔다. 동네 애들이 다 같이 고개를 넘어 학교에 다녔는데 다들 다람쥐마냥 빨랐다.
 
장은 주로 이포장을 이용했나?
돈도 귀해서 현금을 만들려면 이포 장날에 쌀, 콩 이런 곡식을 한두 말 이고 가서 팔아 돈을 만들어 쓰고 그랬다. 이포 장에 갈 때면 동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저 골프장 고개를 넘어 다녔다. 나뭇단도 지고 가고 솔잎도 긁어서 단을 만들어 이고 가서 팔고 그랬다. 쌀을 이고 골프장 고개를 넘어 도곡리 가마실로 가면 이미 쌀장사들이 진을 치고 앉아서 쌀을 샀다. 쌀자루를 이포 장까지 이고 갈 필요도 없이 그냥 가마실에서 팔아버리고 빈자루를 손에 쥐고 털털 걸어서 이포 장까지 갔다. 그때만 해도 젊었으니까 우리도 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산 고개를 훌쩍훌쩍 넘어 다녔다. 이포 장에 가면 이것저것 사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꼭 필요한 것만 사고 바로 장흥리로 돌아왔다. 그 흔한 국밥 한 그릇도 사 먹지 못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 금사저수지.     © 세종신문

장흥리 저수지는 언제 만들어졌나?
장흥저수지는 6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거다. 우리 동네 사람들도 전부 저수지 공사장에 인부로 나가서 일당을 받고 일을 했다. 저 저수지 만들면서 동네에 돈이 좀 있었다. 장흥저수지 물이 저 멀리 흥천까지 간다. 저수지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인근 들판이 전부 천수답이었는데 저수지가 생기면서 물 걱정을 모르고 농사를 짓고 있다. 저수지가 생기기 전까지는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떠다 먹고 김장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랬다. 먹는 물을 아침밥 먹기 전에 일찍 떠오고 빨래는 보통 아침밥을 먹고 난 후에 했다. 눈치 없이 아침밥 먹기 전에 빨래를 했다가는 눈총맞기가 십상이었다. 
 
마을 풍습은 어떤 것이 있나?
설날, 정월대보름, 백중날, 한가위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놀고, 먹고 그랬다. 정월대보름에 마을 농악패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하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달집태우기 할 때는 자기 나이만큼 짚을 묶어서 끝에 불을 붙여 다 탈 때까지 절을 하고 한해 무탈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저녁이면 동네 조무래기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오곡밥을 얻어먹고 때로는 훔쳐먹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애들이 동네에 바글바글했다. 지금은 애들 구경하기 힘들다. 아침에 애들이 바람에 풀풀 날리는 보리밥 한 덩어리 먹고 저 고개를 넘어 학교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항상 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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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8/01 [18:03]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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