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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103] ‘금계포란’의 명당 흥천면 상대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2/07/28 [15:34]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상대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상대리의 유래

상대리는 본래 여주군 홍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계명재 다리동과 이천시 백사면의 현암리, 온방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상대리라 했다. 자연마을은 계명재, 다리, 장자터가 있다. 계명재는 계명현이라고도 불렀는데 상대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상대리의 으뜸 되는 부락으로 산세가 아침에 닭이 홰를 치고 우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다리는 다리동이라고도 불렀는데 계명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아랫다리는 다리 남쪽 마을이다. 옛날에 형성됐던 마을로 지금도 서너 가구가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장자터(장괴터)는 계명현에서 외사리 쪽으로 나가는 길목 위에 옛날에 권씨 부자가 살던 기와집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계명재 마을 ‘금계포란’

상대리도 외사리와 같이 ‘금반형지’의 전설 속에 있는 명당에 포함된다. 상대리의 계명재 마을은 원적산 아래 옥녀가 알을 품은 닭에게 먹이를 주는 지형이라는 ‘금반형지’에서 둥지의 알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구(水口)를 우선으로 여겼다. 상대리 앞을 지나는 내사천은 넓을 들판을 지나 송말천과 만나 다대리로 흘러나간다. 내사천과 송말천이 만나는 곳이 상대리의 물이 나가는 곳인데 이 앞에 자그마한 산언덕이 있어 물이 곧바로 나가지 않고 돌아서 나가게 한다. 이런 곳이 명당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이 산언덕에 있는 바위에서 ‘금반형지’ 명당을 발견하고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덩실바위’가 상대리에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닭의 기운찬 목청을 듣고 하루를 시작했다. 닭이 어둠을 밀어내고 하루를 시작하는 힘과 다산과 다복의 상징인 ‘금계포란’의 의미를 지닌 복을 받은 터가 바로 상대리 계명재 마을이다.

▲ 상대리 은행나무.     © 세종신문
 
은행나무와 향나무

상대리에는 여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두 그루 있다. 한그루는 은행나무고 또 한그루는 향나무다. 은행나무는 상대리 200-5, 상대2리 마을초입에 위치해 있고 ‘여주-24’로 지정된 수령 200년이 넘은 나무다. 밑동에서 여러 줄기가 뻗어 올라 왔으며 수세는 안정되어 있고 수고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잔가지와 잎이 잘 발달되어 있지 못하고 수피가 울퉁불퉁하다. 도로에 인접해 있고 경지정리를 하면서 뿌리가 많이 잘려나가 가지도 손상을 많이 입은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그루는 상대리 산 74-1, 상대1리 마을 뒤 언덕에 위치해 있고 ‘여주-23’으로 지정된 수령 150년이 넘은 향나무다. 직립하여 윗부분이 둥근 수세를 형성하고 있으며 가지와 잎의 생육도 비교적 양호하다. 수피는 광택을 머금고 있다. 하지만 잔가지의 발육이 좋지 못하고 주변의 경작과 잡목의 영향을 받고 있다. 
 
내사천과 송말천

내사리에서 시작된 내사천은 상대리 앞에서 송말천을 만나 상대리를 감싸고 돌아 다대리로 흘러 복하천을 만나 남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내사천은 내사리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흘러 상대리 송말천으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으로 하천연장 2.55km, 유로연장은 4.29km, 유역면적 3.6㎢이다. 상대리 서쪽을 따라 흐르는 송말천은 이천시에 있는 원적봉 동남쪽의 백사면 송말리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 백우리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복하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내사천과 송말천은 자연적으로나 풍수지리적으로나 상대리의 옥수와 같은 존재다.  

▲ 원적봉에서 흘러내리는 내사천.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차영묵(59) 선생

상대리가 고향마을인가?
나는 상대리에서 태어나서 평생 여기서 살았다. 1964년에 상대1리 계명재에서 태어났다. 문장초등학교 이포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지금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대부분이 원주민이었는데 지금은 83가구 중에 10가구밖에 안 된다. 2016년에 상대2리가 분동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마을에서 어떻게 놀았나?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집안일을 많이 했다. 2남 2녀 중에 위에 누나가 한명 있고 장남이다. 누나가 일찍 도회지로 나가서 내가 동생들 씻기고 밥 해먹이고 그랬다. 막내 동생은 6년 차이 나는데 막내 동생이 애기 때 내가 포대기로 업고 다니고 그랬다. 우리 누나는 서울 연희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펜글씨를 정말 잘 썼다. 

▲ 차영묵 선생.     © 세종신문
 
중·고등학교는 어디를 다녔나?
이포중학교 이포고등학교를 다녔다. 상대리에서 이포중학교까지 가려면 문장리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서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이포로 나갔다. 우리 동네 중·고등학생만 해도 40명 정도 되었는데 버스가 꽉 찼다. 버스요금이 40원이었던 것이 얼핏 기억이 난다. 중학교 3학년 수학여행은 아산만 간척지를 갔었고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속리산, 경주불국사를 갔다 왔다. 중학교 3학년이 되니까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러가셨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주로 어떤 일을 했나?
80년대 초반에 중동으로 돈벌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아버지가 빚을 얻어서 논밭을 많이 샀는데 그 빚을 갚을 수 가 없어서 중동으로 가셨다. 어머니랑 내가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중3때 처음으로 경운기를 사서 내가 논 갈고, 썰고, 타작하고, 벼가마 실어오고 그랬다. 그 때만 해도 농기계가 대중화 되지 않았고 대부분이 소로 갈고 써레질하고 그럴 때다. 
 
학교 다닐 때 소로도 농사를 직접 지었나?
경운기 끌기 전에는 소로 쟁기질 하고 한 때는 써레질도 배웠다. 우리 큰아버지가 이천 장에서 소를 사고 파는 일을 했다. 큰아버지에게 부탁을 해서 일 잘하는 소를 한 마리 구해 달라고 했는데 그 소가 정말 말을 잘 들었다. 경운기를 구입하고부터는 하루에 논 1천5백 평을 갈았다.
 
학교 공부에 지장이 있었을 것 같은데….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이 우리 집을 여러 번 찾아왔다. 내가 논일한다고 학교를 안 가니까 담임선생이 동네 친구를 앞장 세워 우리 마을로 찾아온 것이다. 내가 논에서 경운기로 일을 하고 있으니까 “학교는 왔다가 출석만 부르고 다시 가라”고 그랬다. 그나마 고1~2학년 때는 학교를 많이 갔지만 고3때는 학교를 거의 못 갔다. 그 시절에 경운기로 하루에 논 한만지기 갈아주면 1만5천 원 씩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어떻게 보냈나?
1983년 2월에 이포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한 1년 정도 있다가 1984년에 군대를 갔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는 집에서 돼지를 키웠다. 70~80년대에는 돼지도 귀했다. 시골에서 마땅한 수입원이 없으니까 집집마다 돼지를 먹였다. 소는 2년 넘게 먹여야 겨우 팔수 있는데 돼지는 3개월이면 출하를 한다고 해서 돼지 50마리를 먹였다. 내가 돼지를 키우자마자 돼지파동이 나서 다 망해먹었다. 내가 84년도 여름에 군대를 갔는데 그 해 5월 16일에 귀국하셨다. 돼지를 키우다 말고 아버지에게 떠넘기고 군대를 가버린 거다. 아버지가 중동에서 일할 때는 우리 어머니가 매달 서울 종로4가에 있는 외환은행으로 통장을 들고 가서 찍고 왔다. 내가 논일 하며 번 돈도 전부 엄마에게 드리고 나는 용돈을 받아썼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용돈이 풍족했다. 돈이 아쉬웠던 적은 없었다. 
 
결혼은 언제 했나?
스물한 살에 군대에 갔다. 제대하고 용달차를 운영했다. 용달차를 하다가 그만두고 화물사업을 시작했다. 화물사업을 하면서 스물일곱에 결혼을 했다. 집사람을 친구 소개로 만났다. 4년 연애하고 결혼했다. 그 당시 문화는 레스토랑 가서 돈가스, 오므라이스 이런 거 먹는 것이 최고의 데이트였다. 4년 내내 돈가스 오므라이스만 먹었다. 그것 말고는 영화를 같이 보거나 어디를 놀러가거나 그러지 못했다. 사실 일하느라 바빠서 그런 짬을 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우리 집사람은 고향이 전북 정읍이다. 집사람 4촌 오빠가 이천에서 화장품 회사 간부였다. 사촌 오빠가 고향 마을 처녀들을 집단으로 화장품 회사에 취직을 시켰다. 약혼식은 따로 안하고 양가 부모 모시고 중국집에서 상견례를 약혼식을 겸해서 했다. 결혼식은 정읍에서 올렸다. 신혼살림은 우리 집에서 시작했다. 안채는 부모님들이 쓰고 우리는 행랑채에 방을 넣어 신혼살림을 꾸렸다. 
 
결혼 후 생계는 어떻게 꾸려나갔나?
IBM터지고 운수업을 접고 우리 집사람은 이천에서 ‘쌀밥집’을 시작했다. 그것도 처음 하는 일이라 잘 되지 않아서 1년 만에 들어간 돈만 회수하고 팔아버렸다. 쌀밥집 판 돈에 대출을 더 받아서 비닐하우스를 2천 평 시작했다. 하우스에 오이, 호박, 가지 이런 거를 심어서 서울로 올리는데 마침 4대강 사업과 겹쳐서 수입이 굉장히 좋았다. 하우스 3년 하니까 통장에 6천만 원이 쌓였다. 쓸 거 쓰고 남은 돈이니까 꽤 벌었다. 그래서 대박이다 싶어서 그 돈으로 우리 집사람 차 바꿔주고 하우스도 더 늘렸다. 그런데 그때부터 매년 까먹기 시작하였다. 4대강 사업을 하면서 통상, 100m짜리 하우스 2만 동이 폐기가 되어 하우스 재배에서 나오는 농작물이 귀해서 잠깐 수입이 좋았던 거였다. 4대강 사업이 끝나고 곳곳에서 하우스 재배가 늘어나면서 적자를 보기 시작했다. 하우스 농사를 짓다 보면 저녁에 작업한 농산물을 싣고 서울에 가서 부려 놓고 오면 다음날 새벽 2~3시가 기본이었다. 그리고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해야 하는데 매번 적자였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래서 지금은 벼농사만 짓는다. 우리 집 벼농사를 짓고 동네 어르신들 벼농사도 대신 지어주고 1년에 얼마를 받는 식으로 하고 있다. 하우스 재배보다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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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7/28 [15:34]  최종편집: ⓒ 세종신문
 
여울목 22/08/09 [12:10] 수정 삭제  
  상대리의 마을 역사가 세월이 가면서 전통적으로 전래되지 않고 일부 잘못으로 변질되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더군다나 마을탐방순례가 개인적인인터뷰보다 마을에 문화,역사,현주민의 자랑거리를 취재하는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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