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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102] 여강과 양화천이 감싸는 능서면 내양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2/07/25 [14:09]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내양3리 들판.     © 세종신문

내양리의 유래
내양리는 본래 여주군 길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내안동과 양화동을 합하여 내양리라 했다. 행정리는 마을별로 1~3리로 나뉘었다. 자연마을로는 양화동, 낸들, 당수동, 북간도가 있다. 양화동은 내양1리에 있는 마을로 버들고지, 곱다리라고도 부른다. 곱다리(고읍자리)는 옛날에 한 부자가 이곳에 정착하여 인근 마을까지 영향을 미처 양화나루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물산이 집하되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읍 역할을 한 곳이라 하여 고읍자리라 하다가 차츰 변음 되어 곱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낸들은 양화 남쪽들에 있는 마을로 내안들, 내안동으로도 불렸다. 지금의 내양2리를 가리킨다. 장수동은 낸들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양3리를 가리킨다. 북간도는 내양리에 있던 마을로 만주 북간도에서 온 사람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양화나루 앞 여강.     © 세종신문
    
여강(驪江)
여주지역을 흐르는 남한강을 여강이라고 하고 별칭으로 계강(桂江)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의 여강도 상류에서부터 단강(丹江), 여강(驪江), 기류(沂流) 이렇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단강은 단암과 자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산은 섬강과 달천이 만나서 강천리로 향하는 합류 지점이다. 여강은 강천면 이호리에서부터 능서면 내양리의 양화나루까지다. 기류는 양화나루에서 금사면 전북리까지다. 기류의 중심은 금사면이다. 이포나루가 있는 천양은 본래 천녕현으로 영릉 이전과 관련하여 예종 원년(1469)에 여흥부에 합해져 여주가 목(牧)으로 승격되는데 일조했다. 
남한강의 대표적인 나루터를 들면 상류에서부터 차례로 영월, 영춘, 단양, 북진, 서창, 탄금대, 목계, 홍호, 흔암, 우만, 여주, 이포, 하자포, 양근, 우천 등 15곳이다. 남한강의 15개 나루 중에 홍호부터 하자포까지 6곳이 여주에 있으니 여주는 가히 나루의 고장이라 할만하다. 

▲ 내양리 옆을 흐르는 양화천.     © 세종신문

양화천
양화천은 이천시 설성면에서 발원하여 여주시 가남면과 북성산 서쪽의 세종대왕면을 가로질러 내량리에서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양화천은 과거 신은천·화은천·대교천·이천·길천(吉川) 등의 여러 가지 명칭으로도 불렸다. 내양리의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흐르는 양화천은 내양리의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흐른 여강과 만나 내양리를 농작물이 풍부한 고장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 내양1리 양화나루 표지석.     © 세종신문

양화나루
양화나루는 세종대왕면 내양리 양화동과 대신면 초현리를 이어주는 조선시대의 나루터로 ‘내양나루’라고도 하였다. 이천과 부발 사람들이 곡수 장에 소를 팔러 갈 때 이 나루를 이용했다고 한다. 한때 양화나루 일대는 크게 번성하여 도읍을 이룬 것 같았다고 한다. 

▲ 내양3리 장미길.     © 세종신문
 
내양3리 장미길
내양3리 주민들은 약 3년에 걸친 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백석교차로 너머에서부터 능북로를 따라 율극교까지 약 1km정도 되는 장미꽃 길을 가꾸고 있다. 3년 전에 심은 장미꽃이 아직은 어려 꽃이 많이 피지 않았지만 2~3년 후부터는 봄부터 가을까지 색색의 장미꽃이 능북로를 물들일 것으로 보고 있다. 내양3리 장미꽃 길은 율극교를 지나면 연결되는 귀백리 ~ 상백리의 벚꽃 길과 함께  여주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을 것으로 주민들은 확신하고 있다.   

[마을人터뷰] 김운호(73) 선생

내양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나?
나는 고향이 경남 합천이다. 1950년에 합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가서 20대 후반에 여기 내양리로 왔다. 우리 아버지는 합천군 쌍백면에서 면장도 하고 정미소도 하고 농사도 많이 지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5촌 당숙인데 그 시절에 아버지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에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불광국민학교로 전학을 왔다. 불광동 소년원 뒤 산꼭대기에 있는 우리 큰집에서 살았다. 그 시절에는 물이 없어서 소년원 아래 공동 우물에서 물을 퍼 날랐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가정교사를 붙여놔서 어디 놀러 다니려고 해도 가정교사에게 메여서 놀지 못했다. 

▲ 김운호 선생.     © 세종신문

청소년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중학교는 갈현중학교를 다녔다. 불광동에서 박석고개를 넘어가면 있었는데 집에서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중학교 다닐 때 좀 놀았다. 가정교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부도 했지만 어떻게든 틈을 내서 놀았다. 큰집 가정부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넘어 대문 옆 쓰레기통을 밟고 담을 넘어서 놀러 갔다. 집에 들어 올 때는 가정부 방 쪽으로 돌을 던지면 가정부 누이가 문을 열어줬다. 수유리에 있는 덕성여고 여중까지 와서 여학생들에게 빵을 얻어먹고 그랬다. 주말에는 여학생들이랑 같이 의정부 송추로 자주 놀러갔다. 그 시절에는 신촌역에서 기차를 타고 송추역에서 내렸다. ‘야외전축’이라고 휴대용 전축이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다니며 LP판을 끼워서 음악을 틀어 놓고 춤추고 그랬다. 고등학교는 용산공고를 나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했나?
용산공고를 졸업하고 한양공대에 들어갔다. 대학교 가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데모를 많이 했다. 72학번인데 독재타도니 민주화니 이런 데모를 했다. 행동대장이었는데 강의실에 들어가서 연설하고 학생들을 조직하고 그랬다. 그러다가 경찰에 지명수배를 당해 우리 큰집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 우리 큰어머니가 밥때가 되면 다락에 밥을 넣어 주고 그랬다. 그러다가 답답해서 밖으로 친구들 만나러 나갔다가 경찰에게 잡혔다.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학교는 퇴학을 당했다. 한양공대 2학년 때였다. 자격정지도 13년을 받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나?
그래서 홍은동에서 조그마한 신발가게를 했다. 보세신발이라고 수입신발인데 동대문에서 신발을 도매로 떼어 와서 판매하는 가게였다. 여직원을 한 명 고용해서 일을 했는데 신발은 자꾸 줄어드는데 돈은 없고 그래서 그 여직원도 그만두게 하고 나도 신발가게를 접었다. 그리고 데이비스코트 테니스클럽 코치를 했다. 그 시절에는 테니스가 고급 스포츠였다. 장충코트와 데이비스코트가 테니스로는 제일 잘 나가는 곳이었다. 학창시절부터 테니스를 좀 쳤는데 그 덕으로 코치를 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테니스 배우겠다는 사람이 참 많았다. 어쩌다보니 괜찮아서 돈을 좀 벌었다. 테니스 코치를 하고 있는데 건축업을 하는 손아래 매부가 나보고 건축 일을 좀 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내가 그런 거 못한다고 거절했는데 자기가 다 도와 준다고 해보라고 해서 건축 일을 시작했다. 매부가 한신공영에 간부로 있었는데 작은 일부터 시작해 일감을 주면서 돈벌이가 꽤 괜찮았다. 스물일곱인가 여덟인가 그럴 때인데 돈을 꽤 벌어 불광동에 3층짜리 건물도 샀다. 

▲ 여강과 양화천이 만나는 내양리 습지.     © 세종신문

여주는 언제 어떻게 오게 되었나?
그 무렵 여주에 사는 김석환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그 친구가 나보고 여주로 오라고 했다. 자기와 같이 여주에서 사업을 좀 해보자고 했다. 그러자고 하며 여주로 와서 지금의 내양3리에 논 4천 평과 집터 천 평을 샀다. 그 당시 땅값이 평당 3,300원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갑자기 나보고 싱크대와 타일 사업을 해보라고 제안을 했다. 갑작스런 일이라 나는 못 한다고 했다. 그것도 자기가 다 도와준다고 해서 현대정형외과 건너편에 가게를 하나 얻고 그 뒤에 있는 창고도 빌려서 싱크대와 타일 붙이는 일을 했다. 마침 여주군청을 신축해서 화장실 타일을 내가 다 맡았다. 그리고 대순진리회 건물 안 화장실도 내가 다 타일 작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여주에서도 돈을 꽤 벌렸다. 
 
여주에서 싱크대와 타일작업으로 사업을 계속 했나?
큰돈이 들어오니까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사업을 좀 키워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하남에도 사업체를 하나 냈다. 경험도 많지 않은데 무턱대고 사업을 확장하다 보니 사업이 잘 안 되었다. 너무 올라가니까 망가지기 시작한 거다. 그렇게 하나둘 까먹었는데 그래도 2010년 초반까지 일을 하게 되었다. 돈 번다고 하면서 집안도 잘 돌보지 않고 떠돌아다녔다. 한 10년 전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모든 것을 청산하고 내양리에 정착하고 농사를 짓고 있다. 농사를 짓다 보니까 내가 왜 그렇게 세상을 험하게 살았는지 반성이 되었다. 집사람 고생시킨 거 생각하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다. 
 
결혼은 여주에 와서 했나?
결혼도 여주 와서 했다. 여주토박이 처녀를 소개를 받아 사귀다 결혼을 했다. 내가 현대정형외과 맞은편에서 싱크대와 타일 사업을 할 때 중앙통에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아가씨였다. 자전거를 타고 직접 물건을 배달하는 매우 활달하고 성실하며 고운 아가씨였다. 농협 건너편 극장 옆에 있던 가게에서 선을 봤다. 마침 그 아가씨 집도 내양3리였다. 택시를 타고 신륵사와 영릉을 한 번 돌아보고 가깝게 사귀기 시작해 결혼까지 했다. 내양리 처갓집 방 뒷문으로 드나들며 만나고 그랬다. 85년 가을에 만나 12월 5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식은 서울 홍제동에서 올렸다. 신혼여행을 차를 한 대 빌려서 한 열흘 동안 강원도 속초에서 해안선을 따라 인천까지 갔다. 신혼살림은 내가 미리 사두었던 서울 불광동 3층짜리 건물 3층에서 시작했다. 한 6개월 놀며 신혼을 보내다가 다시 여주로 왔다. 우리는 아들 하나 있는데 지가 알아서 잘 커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헌병대장으로 복무하고 있다. 내가 나돌다 보니 땅은 우리 집사람이 다 관리하고 농사짓고 그랬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일이다. 다행히 처갓집이 같은 내양리라 덕을 많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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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7/25 [14:09]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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