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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101] 높은 산 넓은 들 점동면 관한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2/07/16 [10:30]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관한2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관한리의 유래
관한리는 본래 여주군 점량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관곡동, 한전동, 원양리 일부를 병합하여 관곡과 한전의 이름을 따서 관한리라 하여 점동면에 편입하였다. 관한리는 오갑산 정봉아래 형성된 어우실과 한밭들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앞 서편에 청미천이 흐르는데 청미천에 이르는 넓은들 즉 한전(황새들)이 있으며 오갑산을 오르는 산 입구에 저수지를 막아 농사에 이용하고 있다. 자연마을 어우실은 관한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오갑산 아래 깊은 계곡에 위치한 마을이다. 오갑산 이진봉을 분수령으로 충청도와 경기도의 경계에서 동남방 2㎞지점에 위치하여 있고 옛날부터 오갑산 깊은 산중에 호랑이가 울면 ‘어흥’ 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와 비슷하다하여 어우실이라 불렀다 한다. 정월 보름날에는 산제당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웃말은 어우실에서 오갑산으로 오르는 길가에 있는 마을이고 새터는 어우실 아래로 새로이 인가가 형성된 곳을 새터라 한다. 한밭들은 관한리 저수지 공사 전에는 마을 앞 넓은 들에 갈대만 무성한 황무지로 한가한 들이었다 하여 한밭들이라 했다. 농사를 짓지 못하는 넓은 들을 한밭들이라고 하고 인접한 마을의 이름도 한밭들로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은 한밭들이 농토로 개발되어 옥토가 되었고 마을도 크게 번성하였다.   

▲ 한밭들.     © 세종신문
 
어우실 산신제
과거 여주에서는 마을이 평안하고 농사가 잘 되며 가축도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널리 행하였다.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대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날을 정하기도 하고 음력 10월에 지내기도 한다. 산신제를 지내기 전에 제일(祭日)을 결정하는데, 제일이 결정되면 마을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 제사를 주관할 제관을 뽑는다. 제관은 ①상주가 아닌 사람, ②그 해에 여하한 불상사도 없었던 사람, ③집안에 임산부가 없는 사람, ④제일까지 부인에게 월경이 없는 사람, ⑤가급적이면 가족 수가 적고 집안 살림이 정결한 사람이어야 한다. 지금은 그 같은 금기가 예전처럼 철저하지는 않지만, 과거에는 제관으로 선정되면 부인과 함께 방을 쓰지 않는 등 여러 가지 금기사항을 준수해야 했다. 매일 냉수에 목욕을 하고 정결한 복장을 하며, 원거리 외출을 금하고 부정한 언동을 금하며, 부정한 것을 보거나 상가에 가지 않았으며, 비린 생선이나 육식을 금하고, 문 앞에 황토를 펴고 금줄을 늘여 잡인의 접근을 금하고,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는 등 금기사항이 따랐다. 관한1리인 어우실에서도 오갑산 중턱 병풍방위 아래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에 산신제를 지내왔으나 근년에 들어 중단되었다. (여주시사)

▲ 원부저수지.     © 세종신문
 
원부저수지
관한리에 있는 원부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38부터 3년간 공사를 하였고 최초 이름은 ‘흥하소지’였으나 크게 부자가 된다는 뜻에서 원부저수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원부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지금의 저수지 아래 한밭들에 물을 대지 못해 황무지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원부저수지가 만들어지고 저수지 아래 한밭들에 물을 대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관한리 주민들은 물 걱정을 모르고 농사를 짓고 있다. 또한 쌀 수확량이 늘어 주민들의 생활이 윤택해 졌다. 

▲ 어우재미술관.     © 세종신문

어우재미술관
관한1리 어우실 오갑산 초입에는 도예가이자 공예가이며 서양화가인 백종환 작가가 자유롭게 운영하는 어우재미술관이 있다. 여우재미술관은 여주시 두 번째 사립미술관으로 경기도 등록 미술관이었다. 백종환 작가는 ‘흙그림’을 그리는데 가마에 구워낸 흙을 캔버스에 붙이고 그 흙 위에 채색을 하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서양화를 그리는 작가다. 최근에는 한글을 추상화해 그림에 그려 넣는 화법도 사용하고 있는데 여주지역 예술의 특징인 도자기와 한글을 이용한 흙그림으로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고 있다. 
 
옻샘
관한리 원부저수지 옆에는 ‘옻샘’이라는 샘터가 있다. 옻이 오른 사람이 이 샘에서 나는 물로 몸을 씻으면 말끔하게 치료가 된다고 하여 이 샘물을 옻샘이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귀촌한 어떤 사람이 이곳의 옻샘을 보존하고 ‘토리샘’이라는 이름으로 외식업과 숙박업을 겸하고 있다. 

▲ 옻샘.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한창규(77) 선생

조상 대대로 관한리에서 살아왔나?
우리 집안은 6대째 여기 관한리에서 살고 있다. 나는 1945년 8월에 관한리 한밭들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후에 태어났는데 만세소리에 놀라서 태어났다는 말을 가끔 하고 그랬다. 우리 어머니 열여섯에 나를 장남으로 낳았다. 할아버지도 독자고 아버지도 독자라 장가를 일찍 들였는데 나는 형제가 9남매다. 막내 동생과 나는 스무 살 차이가 난다. 
 
어린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6.25전쟁 때 청주까지 피난을 갔던 게 기억이 난다. 진천 어디쯤 지나다가 진눈깨비에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개울로 미끄러져 옷을 다 버렸는데 어른들이 모닥불로 말려주고 그랬다. 피난 갈 때 4살 2살 동생이 있었는데 2살인 셋째 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가고 바로 밑에 4살 동생은 피난을 안가고 할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었다. 피난을 갔다가 오니까 마을이 전부다 불타고 없었다. 할아버지와 동생은 살아 있었는데 피난 갔다 온 직후에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앓다가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는 국군 보급대로 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다. 

▲ 관한리 한창규 선생.     © 세종신문
 
초등학교는 어디로 다녔나?
초등학교는 53년 봄에 들어갔다. 관한리가 점동면에 들어가지만 나는 감곡에 있는 매괴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당시 매괴국민학교가 매개성당 소속 학교였는데 미국선교사가 공부를 가르쳤다. 책보를 매고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관한리에서 매괴국민학교까지 약 5km정도 되는데 40분이면 갔다. 뛰다가 걷다가 하는데 그때는 정말 발이 빨랐다. 서양신부가 운영하는 학교라 옥수수빵과 우유가루를 물에 타서 점심으로 줬다. 
 
방과 후에는 어떤 놀이를 하며 놀았나?
놀이라고는 맨날 덫을 놓아 새 잡고 산토기 잡고 그랬다. 여름에는 관한저수지에 가서 멱 감고 그 곳에서 족대로 물고기 잡아먹고 그랬다. 저수지에 민물새우도 있고 토봉이라고 하는 민물새우보다 좀 더 작은 새우도 있었는데 그놈을 매운탕을 끓이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런 토봉이 다 없어졌다. 새를 잡을 때는 짚을 방석같이 엮어서 화대를 만들어 스프링을 연결해 덥치기를 만들어 낟가리 옆에 설치하고 새를 잡고 그랬다. 참새는 약아서 잘 안 잡히는데 가끔 누룩지기라고 하는 바보 같은 새는 잡히고 그랬다. 참새는 겨울밤에 초가 처마 밑에 손을 집어넣어 잡아 숯불에 구워먹는데 특히 머리가 정말 고소했다. 
 
중학교도 장호원으로 다녔나?
중학교는 감곡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다닐 때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 당시 남학생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여학생들은 전부다 걸어 다녔다. 여학생이 자전거를 타는 것은 정말 파격적인 시절이었다. 중학교 때는 머리가 깨이고 문명도 좀 접하고 그러니까 책을 많이 읽고 시를 외우고 친구들에게 시를 편지지에 써서 보내고 그랬다. 김소월의 시는 여학생들에게 써주고 그랬다. 특별활동으로 사생반을 했는데 지역문화역사유적지를 답사하는 동아리였다. 사생반 선생님이 처녀 선생님으로 아주 세련되고 친절한 분이셨다.

▲ 어우실 초입.     © 세종신문
 
고등학교 때는 추억이 많을 것 같은데….
고등학교는 매괴상고로 갔다. 상고 다닐 때는 여학생들과 장호원 빵집에서 가끔 만나고 그랬다. 그 당시 여학생들은 단속이 심해서 빵집 가는 것도 금기시 하던 때다. 여학생들이랑 몇 명이 만나서 빵집에서 문학얘기도 하며 수다 떠는 것이 최고의 낭만이었다. 매개상고도 미션스쿨이라 신부님들이 몇몇 학생들을 모아놓고 영어 웅변도 가르쳐 주고 그랬다. 한번은 내가 영어웅변대회에서 2등을 했다. 신부님이 영어웅변대회 1등 2등 3등은 미국에 초대를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장손이라고 완강히 반대해서 못 갔다. 지금생각해도 그때 미국 못간 것은 정말 아쉽다. 
 
결혼은 언제 했나?
결혼은 좀 늦게 했다. 군대 제대하고 서울에서 한 2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를 추진한다고 해서 사업을 하면 좀 될 것 같았는데 경험도 없고 돈도 없어서 하는 일 마다 잘 안되었다. 허영심에 들떠 있었던 거였다. 그러고 고향으로 내려와 장호원에 있는 토목회사에 취직을 했다. 토목회사에 취직하고 곧 바로 결혼을 했다. 형제가 9남매이고 내가 장남이다 보니 시집을 오겠다는 처녀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해서 우리 집사람을 소개를 받았다. 중매쟁이도 내가 9남매의 장남이라는 것을 속였고 나도 결혼 전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가끔 자기가 속아서 결혼했다고 투덜거린다. 처음에는 중매쟁이가 사진을 보여줬고 그 다음에는 충주에 있는 다방에서 만났다. 그 당시에는 터미널을 차부라고 했는데 충주차부 근처 다방이라고 했다. 그렇게 만나고 약혼사진을 찍고 6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내가 결혼할 때 우리 막내 동생이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우리 집사람이 동생들을 많이 돌봐줬다. 
 
평생을 관한리에서 살았나?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들 낳아 키워 모두 출가시키고 지금도 관한리에서 살고 있다. 내가 토목회사에 다니는 직장생활을 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집안일과 농사일을 많이 했다. 논이 40마지기 정도 되었는데 지금은 농사를 다 지을 수 없어서 많이 처분했다. 집사람과 함께 여기 관한리에서 7대를 이어가고 우리 아이들이 다시 8대 9대를 이어갈 거라 믿는다. 

▲ 어우실 느티나무.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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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7/16 [10:30]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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