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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100] 편안하고 아름다운 강천면 강천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2/07/13 [13:38]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강천1리 전경.     © 세종신문

강천리의 유래
강천리는 원래 강원도 원주군 강천면 지역으로 개울물이 땅속으로 스며 건천이 되므로 간천 또는 강천이라 했으며, 1895년에 여주군에 편입됐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새말, 다리골, 풀무골을 병합하여 강천리라 했다. 자연마을은 본말, 중간말, 새말, 다리골, 둔터골 등이 있다. 본말은 강천1리의 으뜸마을로 강천1리 마을회관이 있는 곳이다. 중간말은 새말과 본말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풀무간이 있었다 해서 풀무골이라 한다. 새말은 상평촌이라고도 부르는데 평촌 위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다리골은 지금의 강천2리 지역으로 섬강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둔터골은 다리골 북쪽 마을이다. 본래는 노루골이었는데 둔터골로 변하였다 한다. 그 외에도 섬강다리 부근의 나루로 강천나루, 둔터골로 넘어가는 고개 창남이고개, 교동에서 풀무골로 넘어오는 고개 닷둔리고개 등이 있다.           

▲ 강천섬 입구.     © 세종신문

강천섬
강천섬은 보석과 같은 여주의 자연녹지다. 동서로 길쭉한 섬은 면적이 약 57만1000㎡로 축구장 80개 정도를 합쳐놓은 크기다. 넓은 풀밭과 듬성듬성 자란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자연의 멋이 그대로 느껴지는 강천섬은 4대강사업 과정에서 조성된 인공 섬이다. 4대강 사업 전에는 강천리와 연결되어 있었고 장마철에만 섬이 되는 습지였다. 봄에 피는 들꽃, 여름의 짙은 녹음과 가을의 은행나무길 그리고 눈 덮인 순백의 들판은 강천섬의 자랑이다. 강천섬은 한때 멸종 위기였던 단양쑥부쟁이의 자생지이기도 하며 야관문이 지천에 널려 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과 고요한 섬의 풍경으로 캠핑의 명소로 이름을 떨쳤다. 2001년 강천섬 관리권이 수자원공사에서 여주시로 넘어왔으며 현재 ‘강천섬 명소화 사업’을 통해 강의실과 전망대 등을 갖춘 편의시설을 짓고 있다.

▲ 강천리 신재순 가옥.     © 세종신문
 
신재순 가옥
신재순 가옥은 강천1리 새마을에 있는데 일제감점기인 1942년에 지어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신재순 가옥이 위치한 강천마을은 권 씨와 신 씨의 입향지이다. 마을이름도 신 씨가 사는 동네라는 뜻에서 ‘신촌’ 또는 ‘새말’이라 불렀다. 이웃집들과 인접해있는 신재순 가옥은 9.5칸 규모로 ㄱ자형 안채와 6칸의 ㄴ자형 사랑채가 마주한 튼ㅁ자형 배치이다. 서쪽으로 15도 정도 틀어진 남향집으로 안채의 건립연대는 상량문에 “축 소화십칠년 오월 삼십일 오전구시 가주 병신생 입주 상량 성조 비인간지오복 응천상지삼광 록”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942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안채는 장마루를 깐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건넌방, 좌측에 윗방, 안방, 부엌, 사랑방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사랑방이 안채의 부엌에 연접해 있는 특이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건넌방 전면에 높은 툇마루를 두고 그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지붕은 애당초 초가였으나 1970년대 새마을 운동당시 차양을 달아 슬레이트를 올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랑채에는 대문간을 중심으로 우측에 나뭇간, 헛간, 변소가 있고, 좌측에는 외양간과 광이 있다. 

▲ 신재순 가옥 탈곡기.     © 세종신문

권일형 묘
강천면 강천1리 강천마을에 권일형의 묘가 있다. 권일형은 영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신경이다. 예조참판 권우의 증손이고 의금부도사를 지낸 권익문의 아들이며 동강 조상우의 외손이다. 1723년(경종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에 이어 김천도찰방을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와 정희량 등이 밀풍군 이탄을 추대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도순문사 오명항을 따라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설서와 필선 등을 지내고 1746년(영조 22)에는 의주부윤이 되었으며, 1751년(영조 27)에 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강천리 상동 마을의 뒷산 구릉에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직사각형의 석재를 향로석으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최근에 후손들이 묘소를 정비하여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 강천리 권일형 묘.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이순태(75) 여사

고향은 어디인가?
나는 서울 쌍문동에서 태어났다. 1948년에 태어나 강천리로 시집오기 전까지 쌍문동에서 살았다. 쌍문동에 있는 한일병원 인근 광산슈퍼 옆 밤나무 집이 우리 집이었다. 한일병원 전에는 한전병원이었고, 병원이 생기기 전에는 그 자리에 한전이 있었다. 서울 쌍문동이 예전에는 샘표간장 하나 있고 허허 벌판이라 학교 갔다 와서 들에 소 풀 뜯기러 다니고 그랬다. 지금은 아파트와 집들이 꽉 들어차 있다. 

▲ 박순태 여사.     © 세종신문

초등학교 다닐 때 추억은?
초등학교는 창동역 근처에 있는 창동국민학교를 다녔다.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는 완전 시골마을이어서 논길을 걷고 언덕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 논다랑이 길을 따라 다니다 숲에서 소나무 새순을 꺾어 껍질을 벗겨 먹고 그랬다. 학교 갔다 오면 동네 골목에 친구들이랑 모여서 납작한 작은 돌멩이를 튕겨서 땅따먹기, 자치기, 고무줄놀이, 줄넘기 이런 거를 하고 놀았다. 학교 다닐 때 도시락은 안 싸가고 양재기를 가져가면 우윳가루를 물에 타 주거나 강냉이 죽을 주고 그랬다. 지금으로 말하면 학교급식을 한 거다. 어떤 때는 학교에서 송충이 잡으러 산으로 가고 쥐 잡아서 쥐꼬리를 잘라서 가져가고 퇴비 한다고 풀을 한아름 씩 이고 가고 그랬다. 송충이는 나무집게로 집어서 성냥 곽 같은 곳에 담아 오는데 얼마나 크고 징그러운지 송충이 잡는 날은 학교 가기가 싫었다. 파리를 잡아서 학교고 가져갈 때도 있었다. 
 
청소년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중학교 진학은 못했다. 집에서 동생들 돌보다가 열여섯인가 열일곱에 손목시계 부품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다. 취직 후 얼마 안가서 회사가 문을 닫았다. 청계천 평화시장에 다니는 동네 언니들 소개로 평화시장 시다로 취직을 했다. 미싱사 뒤에서 천을 접어주고 실밥 뜯어주고 재봉이 끝난 옷을 쌓아주고 하는 그런 시다를 했다. 월급이라고 해야 말 그래도 쥐꼬리만큼 받았는데 그것도 다 어머니께 봉투 채 드리고 용돈을 받아썼다. 평화시장에 갈 때는 아침에 쌍문동에서 버스를 타고 가지만 올 때는 일이 늦게 끝나 버스가 끊기면 동무들이랑 같이 걸어왔다. 청계천에서 쌍문동까지 한 10km정도 되었는데 어떤 때는 중간 돈암동이나 길음동 심야극장에 들러 영화도 보고 오고 그랬다. 
 
결혼하고 바로 강천리로 왔나?
평화시장 시다로 4~5년 일을 했다. 그렇게 처녀시절을 보내는 데 스물 살에 중매가 들어왔다. 우리 아저씨(남편)가 나보다 한 살 어린데 부모네 들이 다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고모네에 얹혀 살고 있었다. 스무 살 되던 해 늦가을에 우리 아저씨가 쌍문동으로 찾아와 다방에서 잠깐 얼굴을 봤다. 그리고 이듬해 스물한 살 나던 해 4월에 결혼을 했다. 돈암동에 있는 예식장에서 식을 올리고 바로 강천리로 왔다. 저 아래 본말에서 살다가 지금 사는 곳으로 집을 지어 왔다. 

▲ 강천리 느티나무.     © 세종신문
 
강천리로 와서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나?
시집을 왔는데 우리 아저씨는 땅 한 평 집 한 채도 없었다. 처음에는 남의 집 일을 해주고 장리쌀을 얻어먹고 그랬다. 장리쌀은 봄에 한말 얻으면 가을에 한말 반을 갚아야 했다. 결혼하고 둘째를 낳고 나서 도저히 여기 강천리에서는 먹고 살길이 없어서 수원 남문시장으로 이사를 갔다. 수원에서 막일을 하며 한 3년 지냈는데 그 일도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다시 강천리로 돌아왔다. 
 
어떻게 강천리에서 자리를 잡았나?
1980년대 초에 우리 아저씨가 중동으로 돈을 벌러 갔다. 첫 해 번 돈은 대부분 다 빚 갚는데 썼다. 그리고 그 이듬해 사우디를 또 나가 그때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매달 27만원 씩 보내줬다. 그 당시 여주에는 국민은행이 없어서 원주로 돈 찾으러 다녔다. 쌀 8만원어치 사고 나머지는 전부다 저축을 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돈을 모아 사우디에 있는 남편에게 땅을 사겠다고 편지를 썼다. 그래서 논 여섯 마지기, 밭 340평을 샀다. 처음으로 우리에게 땅이 생긴 거다. 우리가 땅을 샀는데 동네사람들이 다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장만한 땅에서 농사를 지었나?
그 땅을 사가지고 내가 혼자서 농사를 지었다. 논두렁에 막내딸을 고무다라이에 넣어 두고 농사를 지었다. 그 여섯 마지기에서 첫해 벼를 스물두가마니를 했다. 정말 많이 나왔다. 그 전 주인도 깜짝 놀랐다. 내가 하루는 벼이삭을 다 일일이 세어봤는데 한 이삭에 낱알이 130개가 달렸었다. 지금도 130개 달린 벼이삭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우리 아저씨가 중동에서 3년 일하고 돌아와서는 나랑 같이 농사를 지었다. 밭에다 하우스를 했다. 마을에서 하우스를 좀 일찍 한 편이다. 하우스에 참외를 심어 내다 팔고 여름 되면 애호박을 심어 내다 팔고 가을에는 시금치를 심어 겨우내 팔았다. 참외 애오호박 시금치를 3모작으로 지어 내다 파니 돈이 좀 모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논과 밭을 계속 샀다. 

▲ 강천리에 있는 담배건조장.     © 세종신문

마을일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어떤가?
88년도에 부녀회장을 시작해서 6년 동안 마을 부녀회장을 지냈다. 부녀회장을 할 때는 부녀회원들 모아 놓고 영농교육도 하고 절미라고 쌀을 모아 자금도 마련하고 그랬다. 그리고 강천으로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온다고 그거 반대하면서 농민회 사람들도 알게 되어 농민회 활동도 오래했다. 여성농민회 회장도 했다. 
 
강천리는 어떤 마을인가?
여기 강천리에서 한 50년 살았는데 우리 강천리는 인심이 참 좋고 단합이 정말 잘되는 마을이다. 지금은 도회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심이 좋고 살기 좋은 곳이다. 옛날에는 정월달이 되면 집집마다 떡국 끓여서 노인네들 대접하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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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7/13 [13:38]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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