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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종이다(13) 북방 개척과 대마도 정벌
 
박재택   기사입력  2022/07/10 [11:21]
▲ 박재택 전 경운대 객원교수     
4군 설치 및 6진 개척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전 왕조 고려 때까지 우리나라의 북방지역 국경은 통일 신라 시대 이후 대동강이 기준이었다. 평양 이북의 땅은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다. 고구려의 옛 영토를 포기함으로써 안정을 도모했던 것이다. 고구려 이후 함경북도 땅과 평안북도 일부 지역은 거란이나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는 상태였고 우리의 땅이라고 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에 있었다. 

1432년 내가 즉위한 지 20년 되던 해 여진족이 펑안북도 지역에 침입해 왔을 때 최윤덕을 보내 여진족을 아예 압록강 북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는 압록강 상류 지역에 여연, 자성, 무창, 우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또한 함경도 지역에 여진이 자주 침략하자 김종서 등을 보내 토벌하고 마침내 1449년에 이르러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 6진의 개척을 완성하였다. 4군과 6진의 개척으로 조선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게 되었다. 

내가 왜 이렇게 국토 정책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내력은 내가 즉위한 지 15년째 되던 해인 1433년 4월 26일, 최윤덕 등이 15,000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압록강변의 여진족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했던 해에 세종이 병조에 내린 교지에서 말한 바 있다.

“옛날부터 제왕들은 국토를 개척하여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음은, 역사책을 상고하여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노라. 또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두만강을 경계로 하였으니, 하늘이 만들고 땅이 이루어 놓은 험하고 견고한 땅이며, 힘차게 잘 지켜내 이룩한 경계였도다.”

▲ [그림] 황병석(2001).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신원문화사.     

장백산으로도 불렀던 백두산은 우리 겨레의 상징적인 산으로 남쪽으로 흐르는 줄기는 압록강, 북쪽으로 흐르는 줄기는 소하강(蘇下江), 동쪽으로 흐르는 줄기는 두만강이다. 
 
내가 이 지역을 중요하게 여긴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동북 6진 위쪽에 있는 경원부는 왕업의 기초를 닦는 곳으로 태조 때부터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여진족의 침입으로 제대로 왕업의 터로서 굳건히 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4군 6진 개척은 영토 야욕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뿌리를 지키고 평화를 가꾸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영토관은 사실 내가 즉위 초에 상왕 태종이 몸소 실천한 대마도 정벌 정신에서 배운 것이다. 

대마도란 섬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다. 험하고 궁벽하며 협소한 곳이므로 왜인들이 모여 사는 것을 들어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경인년부터 변경 해안가에서 감히 도둑질하고 방자하게 우리 군민을 살해하고 우리 백성을 포로로 하였다. 

내가 즉위한 이후에도 전라도에서, 충청도에서, 제주에서, 비인포, 황해에서 평안도까지 우리 백성을 소란하게 하였으므로  1419년 6월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종무의 지휘 아래 함선 227척과 병력 1만7285명이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정벌의 직접적인 원인은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 도중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豆音串 : 충청남도 서천군 동면 도둔리)을 침탈했기 때문이었다. 이 싸움에서 조선은 병선 7척을 잃었고, 도두음곶 만호 김성길(金成吉) 등 조선군 태반이 전사했고, 같은 달 12일 왜선 7척이 해주를 침입, 약탈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대마도주의 항복 서신 내용이다.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니 섬사람들을 가라산도(거제도) 등의 섬에서 살게 해 주시고, 대마도를 조선 영토의 주군(州郡)으로 여겨 주군의 명칭과 인신(印信·확인서)을 내려주신다면 저희는 마땅히 신하의 예절로서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고구려 패망의 교훈-고수 고당 70년 전쟁
 
나는 즉위 초, 나라의 패망과 조선의 개국으로 인하여,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고려사를 객관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또 아시아대륙의 전쟁사를 살펴보고 역대병요란 전쟁 역사책을 편찬토록 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와 수나라,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사에서 느낀 바 있어 말하고자 한다.

수나라와 고구려, 당나라와 고구려 사이의 70년 전쟁은 아시아대륙의 패권 싸움이라 생각할 수 있다. 지나 대륙의 패자와 만주의 패자 간의 한판 겨루기였던 것이다. 고수 고당 전쟁은 고구려와 수, 당뿐만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나라들도 참전한 수백만 명의 군대가 동원된 대규모 전쟁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은 고대 아시아에서 벌어진 1, 2차 세계대전이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패해 망하고 고구려는 당나라와 3번 큰 전쟁 중 2번은 크게 이기고 마지막 3차전에서 당나라 신라 연합군에 패배하여 망했다. 고구려는 싸움에서 패했다기보다는 내부 권력다툼으로 붕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전의 결과는 동이 동방 문명의 후예 고구려의 멸망이었고, 이 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는 중원문명 일방의 문명권이 성립되었고, 동방 문명은 중원문명 경쟁자의 의미마저 잃었다. 아시아의 문명 지도가 바뀐 것이었다.

내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고구려가 70년 동안 대륙의 침탈 세력과 전쟁을 하는 동안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민족인데도 신라와 백제는 왜 돕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던가 하는 것이고, 신라는 오히려 이민족인 침탈 세력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망하게 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 이만주정벌도_세종대왕기념사업회소장     ©

이러한 우리 역사에 대한 성찰이 적극적인 국방 정책으로 이어진 것이다. 곧 나는 단지 조선의 임금으로서가 아니라 단군의 후손으로서 국토를 바라보았고 일본의 임진왜란과 같은 타민족 학살 전쟁이 아닌 합리적 국제 질서를 위해 4군 6진 전쟁을 수행하였다. 또한 사민 정책을 통해 사람이 사는 진정한 땅이 되게 하였고, 토관 제도를 통해 지방 정치의 합리성을 꾀하였다. 
 
이런 나의 국방 정책에는 당연히 평생을 야전 군인으로 살아온 최윤덕과 문무를 겸비한 김종서와 같은 참모진을 잘 거느려 가능했다. 또한 파저강 토벌을 승리로 이끈 휴대용 개인화기 세총통 같은 무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의 신무기 세총통! 전체 길이 14센티미터, 구경은 0.9센티미터로 조선시대의 화기 중 가장 작은 크기다. 본래 적진에 침투하는 정찰병들을 위한 무기로 고안되었지만 이후 그 휴대의 간편성으로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여 신속한 기동력이 필요한 파저강 전투의 기습작전에서도 세총통은 큰 활약을 하였다.

국토와 평화를 지키는 것은 단순한 애국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님을 후손들은 더 철저히 깨닫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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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7/10 [11:21]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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