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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문자로 된 기록의 가치를 아는가?”
[인터뷰] 서문재역사문학관 묵제 문제봉 선생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11/12 [13:01]

여흥동 단현2리에 조선 후기 세도가 김병기 가옥을 옮겨와 그 옆에 서재 대장서고를 더한 역사문학관 서문재에서 전통과 문화를 지키고 있는 묵제 문제봉 선생을 만나보았다. 묵제 선생은 평생 공부할 사주를 타고났다고 하며 배우고 또 배워도 끝이 없는 것이 배움이라고 하며 오늘도 부지런 시를 쓰고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 문제봉 선생(오른쪽)과 아내 김수자 여사.     © 세종신문

 

문익점의 후손이라고 들었다

 

우리 집안이 여주로 내려온 지 한 500년 된다. 삼우당(문익점) 할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삼우당 할아버지의 손자인 감찰공(문치창) 할아버지가 세조를 도와야 되는데 단종을 돕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딴 양반은 다 참수시켰는데 감찰공 할아버지는 참수시키면 안 된다 그래 갖고 귀양을 갔다가 풀려난 후 낙향을 해 여기로 왔다. 능서 매산서원에는 삼우당 할아버지가 모셔져 있다. 그 삼우당 할아버지가 가정 이곡 선생님한테 공부를 배우러 여주에 오신 거다. 산청에서 여주까지 올라오셔서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목은(이색) 선생하고 교류가 두터우셨다. 목은 선생은 산소가 없다. 돌아가신 날짜도 정확하지 않다. 조선건국 후 이방원이 목은 선생을 계속 불러 같이 하자고 그랬는데 목은 선생이 반대를 했다. 이방원의 부하들이 왕터 앞 제비여울 갈대밭에 숨어 있다가 목은 선생이 내려오니까 쫓아가 참수를 했다. 같이 오던 사공도 함께 난도 쳐 고기 밥 되라고 강에 뿌려버린 거다. 그러니까 목은 선생 자손들도 모르고 산소도 없고 죽은 날짜도 정확하지 않아 우리 삼우당 할아버지와 매산서원에 같이 모신 거다. 우리 7대조 할아버지(문겸)가 매산서원을 지었다. 매산서원이 지어지기 전에는 그 자리에 감찰공 할아버지가 세운 비석만 있었다. 북내면 가정리에 귀향 와 살았던 가정선생의 아들이 목은 이색 선생이다.

 

한학 공부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나는 1954년 여주 홍문리 63번지에서 태어났다. 여주에서 서예학원을 오랫동안 했다. 여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충주 작은 형 집에서 다녔다. 한학은 선친으로부터 몇 해 배우다가 인천으로 가서 송석 정재흥 선생님께 붓글씨를 배웠다. 그리고 사군자는 고광 박종득 선생님한테 배웠다. 한학 공부에서 시서화를 다 해야 완벽한 예술이 되는 거고 거기서 하나가 모자라면 짝짝이가 되는 거다. 내가 한학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사주를 그렇게 타고 나서 그럴 거다. 한학은 배우면 배울수록 학문의 깊이도 알고 또 사람의 도리를 알아가니까 점점 더 배우고 싶어진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항상 모자란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부를 하다 보면 더 깊이 배우고 싶어진다. 유학을 배우다 보면 또 불경 공부도 하게 되고 이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게 된다.

▲ 묵제 문제봉 선생.     © 세종신문

 

 

여주에서 서예학원을 몇 년 했나?

인천에서 10년 공부를 하고 서울 예술원에 잠깐 있었다. 그 예술원이 금방 없어져서 인사동에 서예학원을 차리려고 했는데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그래서 돈이 별로 안 드는 여주로 내려와 서예학원을 시작했다. 여주에서 서예학원을 30년 동안 했다. 처음에는 학원이 많지 않으니까 운영이 곧잘 됐었는데 시운이 자꾸 변하면서 여러 학원들이 많이 생기니까 지금은 거의 안 된다. 고려서예학원이었다. 학원 위치가 처음에는 경찰서 옆 홍문네거리에 있다가 상리 목욕탕 2층으로 옮겼다. 그리고 중앙통 새마을금고 2층에서 학원을 마무리했다.

 

김병기 가옥을 어떻게 단현리로 옮겨오게 되었나?

누가 봐도 정말 오래된 고택이다. 원래는 김병기 가옥의 안채였다. 지금의 교육청 자리에 있었다. 김병기는 당상관에 오른 조선말 안동김씨 세력의 엄청난 세도가였다. 세월이 흘러 그 집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30여 년 전 그 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여주에서 서점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그 집이 서울사람에게 팔렸다. 서울 사람들은 집을 보고 산 게 아니라 땅을 보고 샀기 때문에 집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 집이 비어 있어 떠돌이 노숙자들이 빈집에서 살면서 밥도 해먹고 잠도 자고 그랬다. 주인이 목조건물인 고택에 불날까봐 뜯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해체 해 가도 되겠냐고 했더니 좋다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 집을 기왓장 하나 서까래 하나 일일이 번호를 붙여가며 뜯어서 지금 이 자리로 옮겨왔다. 그 집을 뜯어가라고 할 때 얼마나 좋던지 얼굴에 내색을 안 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그때가 내 나이 서른 두 살이었다. 그 집 목재가 전부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한 목재다. 여기 단현리 땅도 사연이 많다. 그 당시 내가 이 땅 주인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그 사람이 돈을 갚지 못해 결국 이 땅을 받았다. 당시 땅값 시세가 평당 5만원 이었는데 나는 8만원씩 쳐주고 받았다. 김병기 고택을 해체해 와서 1년 정도 쌓아 두었다가 하나 둘 복원을 했다. 지금은 가치를 얼마라고 따질 수 없다. 정말 귀한 집이다. 기와는 옛날에 만든 기와가 크기가 다 다르기 때문에 당시 와공들이 그 기와를 입힐 수가 없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새 기와를 입혔다. 김병기 고택에서 나온 기와를 쌓아 두었는데 기와가 다 너무 좋다. 기와가 살아있다. 무슨 특별한 기술이나 경험이 있어서 고택을 복원 한 것도 아니다. 그냥 한 거다. 하다 보니까 모양이 다 생각이 났다. 그냥 머릿속에서 그림이 다 그려졌다. 처음 했지만 목재를 보는 순간 이게 어디에 들어가는 건지 다 알 수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했더니 하나둘 탁탁탁 다 맞았다. 그렇게 5년이 걸려 복원을 했다. 기둥하나 세워 놓고 서예학원 나가 일하고, 서까래 하나 얹어 놓고 일하고 그러면서 다 복원했다. 김병기 가옥은 여주에서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그런 가옥이다. 김병기 그분이 집을 가지고 있을 때는 우안당((愚安堂)’이라고 했다.

 

▲ 김병기 가옥.     © 세종신문

 

서문재에서 주로 어떤 일을 하나?

서문재는 글도 쓰고 시도 짓고 그러는 집이라는 뜻이다. 우리 역사에 대해 텔레비전 같은 곳에서 잘못 방송하여 왜곡 된 거 그런 거를 내가 여기서 강의를 해서 바로 잡는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대장금은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대부분 남자들이 음식을 하고 떡을 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는 대장금이 여자로 나와 있다. 음식 만드는 남자에게 공을 붙였는데 밥짓는 반공, 두부 만드는 포공, 떡 만드는 병공 그렇게 불렀다. 인사동에서 자기네 할머니가 뭐 궁중에서 떡 만들던 사람이라고 그러지. 그거 다 거짓말이다. 그리고 궁중에서 임금이 사용하던 유기라고 하면서 막 자랑하고 그러는데 조선시대 임금은 유기를 사용하지 않고 은기를 사용했다. 전부 은기였다. 밥도 임금은 하루에 다섯 끼를 먹었다. 좀 있는 집에서는 세 끼를 먹고 대부분 백성들은 하루에 두 끼 먹었다.

 

대장서고에는 어떤 책들이 있나?

대장서고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에 있는 책 중에 없는 책이 없이 다 있다는 뜻이다. 여기 대장서고도 내가 다 직접 지었다. 나무를 평창에서 가져와서 삼발이와 도르래를 이용해 기둥과 서까래를 혼자서 올렸다. 못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전부 끼워 맞춰서 지었다. 그래서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기둥으로 세운 돌도 내가 다 직접 깎았다. 팔각기둥인데 아래는 굵고 위는 솔게 깎았다. 기계로는 도저히 그렇게 깎을 수 없다. 대장서고에는 고려시대 불경에서부터 조선시대 고서가 많이 있다. 목판도서는 우리나라 의천대사가 처음 시작했다. 그분 안 계실 적에는 그냥 필사를 했다. 그런데 그분이 중국에서 공부하시면서 중국 책을 들여오면서 그걸 다시 목판을 사용해 글을 찍어 책을 뜬 거다. 의천대사 때문에 책이 시작된 거다. 그 불경 책이 여기에 있다. ‘묘법연화경고려본이 있다. 조선왕조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역대 임금 시문집인 열성어제이런 책들도 있다. 우리 2대 할아버지가 공신록에 있어서 그 자손들이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사헌부 감찰로 들어가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검찰청 검사다. 조선시대에 책을 만들 적에는 감찰이 참관인으로 갔다. 참관인, 그러니까 책을 만들면 그 책이 어디로 가는지 살피신 거다. 그래서 책을 뜨면 감찰 좀 하라고 하면서 제일 먼저 사헌부로 보낸다. 그 책 표본을 검수 받아야 되니까. 고려나 세종 때는 집현전에서 책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규장각에서 만든 책, 첫 번에 만든 걸 저희 할아버지한테 줬던 거다. 그 책들이 제대로 내려와 훼손이 안 되고 보존이 돼 있다. 목판도 그렇고 금속활자도 그렇고 그 다음에 포활자, 도활자가 있다. 포활자는 박에 글을 새기는 거고 도활자는 도자기 활자다. 도활자가 드물다.

▲ 대장서고 전경.     © 세종신문

 

▲ 열성어제 책 표지(왼쪽)과 열성어제 내용 중 세종대왕 편 일부(오른쪽)     © 세종신문

 

 

서문재 자리를 잡을 때 집터를 어떻게 봤나?

집터는 바람이 채이지 않고 아늑하면 좋은 자리다. 앞에 주봉이 없으면 집 자리가 안 되는 거고 뒤에 있는 산이 현무다. 그 집안을 보고 집안이 어려우면 부엌을 좋은 자리를 찾아주면 재물을 모은다. 죽은 사람 산소도 마찬가지다. 산소를 잘 쓰면 후손들이 음덕을 본다. 이게 다 지서에 나오는 건데 원래 지서는 궁궐에서 임금들만 사용하던 비밀문서와 같은 거였다. 궁에서 임금들만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건데 그걸 누군가 필사를 해서 궁 밖으로 가져나온 거다. 주봉이 막히면 재물이 들어왔다가 나가지 않는 형국이고 앞이 뻥 뚫리면 재물이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형국이다. 현무 즉 집 뒤의 산이 높으면 명재상이 나온다. 집 뒤의 산이 항상 구름에 덮여 있는 그런 산이 좋다. 여기 서문재는 집터가 좀 센 곳이다. 가끔 길을 가던 중들이 집터가 세다고 절로 팔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 집터가 아무리 세도 그 집에 사는 사람의 기가 더 세면 괜찮다. 서문재는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다. 여주는 항상 구름에 덮인 현무 산이 없지만 구릉이 펼쳐지고 남한강이 굽이굽이 흘려 시인과 묵객이 많이 나오는 곳이다. 문학적 소양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는 곳이 여주다. 이규보 시인이 여주사람이다. 이규보가 고려 고종 때 강화도로 몽진 가서 돌아가셨는데 그 양반 묘가 지금은 강화도에 있지만 이 앞이 전부 여주 이 씨 종중 땅이다. 왕이 직접 강화도에 묘를 써 주어 거기 잠들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왔다면 아마도 이 앞 남한강변 어디 야산에 묻혔을 것이다. 또한 여주가 산이 높지 않고 야들야들하고 강을 끼고 있어 왕비가 많이 나왔다.

 

일평생 한학과 전통을 고수하는 뜻은 무엇인가?

부모와 선친의 영향이기도 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영향이기도 하고 한학을 아주 어린 시절을 접하고 또 스스로 타고난 팔자다. 한학은 음양의 조화 자연의 이치가 다 담겨있다. 꾸준히 공부하면서 늘 부족하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한학 공부다. 자기 사주에 학문이 안 들면 억지로 한다고 안 된다. 그러니까 하지 아니하려 해도 자기한테 그 사주가 있으면 그 길을 따라가게 된다. 공부와 창조를 쉬지 않는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주어진 거에 열심히 하면서 살아서 서문재도 지금처럼 된 거다. 서문재가 아직도 완성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와 보람. 죽는 날까지 부지런히 배우고 행하면서 살라는 팔자니까 열심히 하다 죽는 거다.

▲ 김병기 가옥 대청마루.     © 세종신문


우리가 지금 코로나를 겪고 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지구든지 사람이든지 자기가 견딜 만큼만 갖고 있다. 자기가 견디지 못하는 짐은 안 진다. 그러니까 이 지구가 이제 다시 살아나려면 덜어내야지. 이제 병이 발발 돼서 전염병이 지금의 인구가 반이 없어진다고 봐야 다시 지구의 생이 잘 될 수 있다. 신라, 고려, 조선으로 오면서 전염병이 들어왔고 지구가 사람을 반씩 줄여왔던 거다. 이번에도 인구가 반이 줄어야 종식된다. 자연형상으로 봐야 한다. 주기적으로 이게 너무 성하니까. 달도 차면 기우나니... . 꽉 찼다가 기울어지듯 어느 정도 줄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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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1/12 [13:01]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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