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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79] 장수촌이자 피난골인 금사면 소유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11/04 [10:16]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금사면 소유리 아랫말 전경     © 세종신문

소유리의 유래

소유리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새가 알을 품고 있는듯하다고 하여 소유실, 소리실, 소우실, 소우곡, 수우실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소유리로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명은 소리실이고, 박 씨 집성촌이다.
자연마을 ‘소리실’은 소유리의 옛 명칭으로 마을의 삼면이 울창하고 험난한 산으로 에워싸여 있는데,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면 새가 알을 품고 있는듯하다고 하여 새집 소(巢)자를 써서 소리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리실도 윗말과 아랫말로 나뉘는데 윗말은 소리실 위쪽에 있는 마을이고, 아랫말은 소리실 아래쪽 마을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광산촌으로 막을 치고 인부들이 약 400가구가 살았다고 하여 막골로 부르기도 하였다.         
 
소유천

소유천은 남한강 제1하천인 금사천의 지류로 소유리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 하호리에서 금사천에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소유천은 하천연장 1.3km, 유로연장은 2.86km, 유역면적 3.26㎢이다.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가 하천을 가로지르며 지나간다. 소유천 유역 내 토지 대부분은 임야로 이용된다. 소유리에는 소유천이 있어 산골임에도 고래실과 같은 물이 풍부한 농토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과거 한 때 금광을 운영할 때는 빻은 금광석에서 금과 먹돌을 구분하는 용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소유리 입구 한 가정집 울타리에 서 있는 석상.     © 세종신문

팔보금산 광산터
 
팔보금산은 소리실 웃말 박 씨 종중산인 소유리 산 3-1에 위치한 폐금광으로 1960년대까지 금을 캐던 곳이다. 소유리 팔보금산에서 광부를 지냈다는 주민 박광학(87)씨의 말에 따르면 팔보금산은 수직갱으로 지하 300자(약90m)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박 씨가 광부로 일할 때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렸는데 내려가는데 만 30분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사다리를 붙잡고 오르내릴 때 손에 카바이트 불을 들고 깜깜한 90m 수직광의 불을 밝혔다고 한다. 수직광 바닥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뚫고 들어가 금을 캤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에도 소유리에 전기가 들어와 물은 펌프로 퍼 올렸다. 금돌은 하얀 돌에 누런 금이 쫙 박혀 있는데 그 금맥에 구멍을 뚫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서 걷어 올렸다고 한다. 현재 광산터 아래 자리를 잡은 목장이 있는 자리에도 금돌을 깨는 곳이 있었고 소유리 입구에서 조금 올라오면 있는 저수지에도 금돌을 깨는 곳이 있었다. 박 씨는 금돌을 분쇄하는 것을 ‘금방아 찧는다.’고 했다.  

박득중의 묘
 
박득중의 묘는 소리실 아랫말의 뒷산 구릉 중턱에 상하원(上下原)으로 조성되었다. 박득중은 고려 말 문신으로 본관은 밀성이고 시윤 또는 문하시중을 역임했다고 전해진다. 박득중의 둘째아들 박갱이 정종대왕의 장녀 함양옹주와 혼인을 하여 조선2대 임금인 정종대왕과 사돈지간으로 밀령위에 봉해졌다. 

남향으로 자리 잡은 묘역은 위쪽 봉분에 박득중과 첫째 부인 함양 박 씨가 합장되어 있고 아래쪽 봉분에 둘째 부인 문화 유 씨가 단독으로 모셔져있다. 위쪽 봉분 주위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문인석은 봉분 앞 좌우에 서 있고, 장명등은 옥개석을 새로 얹었다. 최근에 세운 묘갈의 비신 앞면에 ‘고려조 삼중대광문하시중 밀성 박공휘득중 배 국부인 밀양박씨지묘소 배 국부인 문화유씨 상하원’이라 새겼고 뒷면의 묘갈문은 송재욱이 지었다. 아래쪽 봉분 주위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고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은 근래에 다시 만든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묘표의 방부는 원래의 것이고 비신은 새로 세웠다.

▲ 박득중의 묘.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박광덕(85) 선생

소유리에서 몇 대째 살고 있나?

나는 1937년생으로 올해 여든다섯이다. 소유리에서 원조상으로 따지면 11대째 살고 있다. 여기가 원래는 밀성 박 씨 촌이다. 나는 8남매 중 장남이다. 우리 증조부가 처음 세간을 날 때는 오막살이집을 짓고 살았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 ‘팔보금산’ 광산의 초대 광주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왜정 때 금 부자라 타쿠시(택시)타고 다니면서 종로 명월관에 작은 마누라 두고 살 정도였다. 대동아 전쟁이 나면서 일본놈들이 광산을 뺏어갔다. 우리 마을은 왜정 때 전기가 들어왔고 가구 수도 200여 가구가 넘었다. 해방되고 일본놈들이 제다 쫓겨 가니까 사람들이 전깃줄을 다 끊어서 팔아먹어버렸다. 옛날부터 여기를 피난촌이라고 불렀다. 여기는 6.25때 인민군도 중공군도 안 들어왔다. 

6.25전쟁은 어떤 기억이 있나?
 
초등학교 4학년 때 6.25가 났다. 공산주의가 들어온다고 해서 우리 집안은 전부 피신을 했다. 우리도 경기도 광주 외가로 피난을 갔다. 동네 머슴을 무슨 위원장 시켜서 잡아가고 그러니까 우리 증조부만 남고 다 피신을 했다. 수복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행히 증조할아버지도 집도 멀쩡하게 있었다. 1.4후퇴 때는 충북 진천까지 피난을 갔다 왔다. 이불보따리 짊어지고 갔다 왔다. 한 보름 걸렸던 것 같다. 그 때는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허벅지까지 빠졌다. 그 눈길을 우리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피난을 갔다 왔다. 
 
학교는 어떻게 다녔나?

1945년에 이포초등학교에 시험 봐서 들어가 몇 달 다니는데 해방이 되었다. 해방되고 학교가 운영되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마을에서 1년 동안 서당에 다녔다. 서당에서 한 1년 글공부를 하다가 이포초등학교가 다시 열려 아홉 살에 다시 입학을 했다. 셋째삼촌이 나보다 세 살이 많은데 우리 동네에서 이포초등학교 다니는 사람은 삼촌과 나 둘 뿐이었다. 여기서 하호리로 넘어가서 하오리에서 버섯고개를 넘어서 학교를 다녔다. 이포초등학교 30회 졸업생이다. 소풍은 파사성, 칠읍산, 영릉 이른 곳에로 다녔다. 
중학교는 경기도 광주에서 다녔다. 주말에는 광주에서 곤지암까지 차를 타고 와서 곤지암에서 걸어서왔다. 곤지암에서 여기까지 한 50리 되는데 건업리, 상품리, 후리, 상호리 이렇게 걸어왔다. 토요일에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밤중인데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에 또 광주로 갔다. 멀고 힘든 길이지만 그래도 집에 그렇게 오고 싶었다. 
고등학교는 공부하기 싫어서 안 갔다. 우리 부모님들은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라고 했는데 난 그냥 집으로 왔다. 우리 삼촌들은 다 서울에서 공부를 했다. 나는 왠지 그렇게 공부하기가 싫었다. 이포, 양평으로 돌아다니며 놀다가 스물세 살에 군대를 갔다. 
 
결혼은 언제 했나?

군대는 논산에 훈련받고 춘천으로 배치되었다가 원주에서 근무를 했다. 군복무하면서 색시를 하나 사귀었다. 춘천 의무대 수송병으로 원주에 파견 나와 있었다. 의무대가 영외에 있어서 민가에 방을 얻어 살면서 군복무를 하였다. 내 옆방에 원주여상 다니는 여학생이 하나 자취를 했는데 나를 오빠처럼 대하며 잘 따랐는데 충주시청에 다니는 자기 친언니를 소개해줬다. 그 색시가 주말이면 꼭 원주로 나를 보러 왔다. 그렇게 만나다 보니까 그 집에서 혼례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서울 마장동에 있는 세 살 많은 삼촌을 오라고 해서 한번 봐 달라고 했다. 원주 다방에서 만나 커피 한잔 하고 점심 먹고 원주역까지 바래다 드렸다. 작은아버지는 “너 그 여자와 결혼하려면 나랑 인연을 끊자. 삼촌도 아니고 뭐도 아니다” 그러셨다. 내가 우리집안 종손이라 소유리를 지켜야 하는데 그 색시는 소유리로 와서 살 여자가 아니라는 거였다. 그러고 제대를 했는데 집으로 오는 편지를 우리 고모가 받아서 나에게 주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못 만나니까 내가 밥을 먹지 못해 몸이 바싹 말라갔다. 우리 할아버지가 황구를 한 마리 잡아서 가마솥에 고아 맨날 먹게 해서 겨우 기운을 차렸다. 

▲ 박광덕(85) 선생.     © 세종신문
 
충주색시는 그렇게 헤어졌나?

한번은 등기로 편지가 와서 내가 받았다. 크리스마스 무렵인데 만나자고 해서 원주로 가서 만났다. 색시가 펑펑 울고 나도 같이 울고 그랬다. 그렇게 하루 종일 울다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밥도 안 먹고 장가도 안 간다고 버텼다. 곳곳에서 선이 들어와도 선을 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우리 할아버지 친구가 중신을 해서 여주 연라리 색시를 만나 오늘날까지 잘 살고 있다. 선보는 날을 잡아 놓고 내가 가지도 않았다. 그랬더니 우리 큰처남 되는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 왔다. 내가 선보러 안 나가니까 어디 장애가 있는 것 아닌가 해서 온 거였다. 큰처남이 우리 집 사랑에서 나와 술 한 잔 하면서 “멀쩡하네”그렇게 말하고는 돌아가서 바로 날태기(혼례날짜와 사주를 적은 문서)를 보냈다. 그렇게 색시 얼굴도 한번 못보고 결혼식을 올렸다. 음력 10월 9일에 혼례를 올렸다. 장가가는 날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이발도 안하고 있는 그대로 그냥 끌려가듯 갔다. 이포에서 트럭을 한 대 빌려서 그걸 타고 마장동 삼촌이 웃손으로 갔다. 그랬더니 색시 집에서 우리 삼촌이 신랑인줄 알았다는 거야. 우리 삼촌은 쫙 빼입고 갔으니까... 나랑 우리 집사람 여든이 넘었지만 노인 일자리 다니면서 운동도 하고 그렇게 잘 살고 있다. 애들도 딸 하나 아들 셋 4남매를 낳아 키웠다. 

소유리에서 생계를 꾸리고 자녀들 공부시키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집안 농토는 도지도 주고 내가 직접 짓기도 하고 그랬다. 큰 딸이 대학 들어가면서 부터는 낙농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뭔 계집애를 대학을 보내냐고 하셨지만 그래도 나는 대학을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90년도에 젖소 20마리 키워서 한 달에 한 300만원 벌었다. 낙농을 15년 했다. 막내아들 대학 마치고 그만 뒀다. 낙농으로 딸 아들 넷을 공부시켰다. 큰아들은 연구원이고 둘째 아들은 중소기업을 한다. 지금은 사위가 이천 세무서에 다니고 있어 내가 땅을 좀 줘서 딸이 우리 집 옆에 집을 짓고 같이 산다. 
 
소유리 자랑은 어떤 것이 있나?
여기 소유리는 특별히 자랑할 거는 없지만 장수촌이고 피난골이다. 우리 아버지도 아흔둘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아흔 일곱에 세상을 뜨셨다. 공기도 좋고 물도 맑아 살기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사람 사는 곳은 인심이 좋아야 한다. 여기 소유리 사람들은 하나 같이 성실하고 인심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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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1/04 [10:16]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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