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마을 구석구석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여주마을 구석구석 78] 740년 된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는 점동면 뇌곡리
 
아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10/21 [16:56]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뇌곡2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뇌곡리의 유래
뇌곡리는 본래 여주군 점량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우리처럼 생겼으므로 우리실, 우레실, 또는 뇌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세거리를 병합하여 뇌곡리라 해서 점동면에 편입시켰다. 뇌곡리 자연마을은 우레실, 세거리 두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거리 앞에는 넓은 황새들이 펼쳐져 있다. 우레실은 이곳이 일체의 천재지변이 없는 안전한 지역으로 우레(우뢰)마저 치는 일이 없다 하여 우레실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산중에 우레가 오히려 심하고 어느 때 낙뢰로 초가에 불이나 마을 전체가 소실되어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어 낙뢰를 맞았던 계곡마을을 뜻하는 우뢰실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 우뢰실은 오갑산 중턱의 작은 마을이지만 고려시대에는 행정관청이 있었다 하여 그 흔적으로 옥터, 방울장터 등의 지명이 아직도 전래되고 있다. 이곳을 고려시대에는 여흥골이라 하였는바, 여주를 여흥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곳 지명에서 연유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곳이 여흥 이씨(李氏)의 집성촌이라는 사람도 있다. 세거리는 야산 기슭에 위치하는데 점점 아래쪽 도로변으로 마을이 확장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아랫세거리라 불렸다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고목인 팽나무와 향나무가 있었고 서낭이 있었던 곳이다. 세거리 마을에서도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곳은 양달말이라 하고, 지형상 음달진 곳이 있어 음달말이라 부른다. 산중턱에 자리 잡은 우레실과 근접한 마을로 우레실 아래에 위치한 마을은 아랫땀이라고 부른다. 

▲ 740년 된 뇌곡리 은행나무.     © 세종신문
  
뇌곡리 은행나무
뇌곡리 은행나무는 점동면 뇌곡리 42-2번지 뇌곡리 야산 중턱에 있는 740년생 은행나무이다. 뇌곡리 우뢰실에서 오갑산으로 오르는 중턱에는 바위에서 샘이 나오는 약수가 있고 이곳을 약수터라 부르는데 고려시대 관청터로 알려져 있다. 나무는 양지바른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수세가 안정되어 있다. 굵은 줄기가 잘 발달 되어 있고 잔가지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뇌곡리 은행나무 원줄기는 없어지고 원줄기 주변으로 가지가 자라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갑산
오갑산은 여주시 최남단에 위치한 해발고도 609m 산으로 뇌곡리를 품에 안 듯 감싸고 있다. 오갑산은 여주시와 충청북도 음성군, 충주시의 경계를 이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압산은 주 남쪽 10리에 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여지도서』에는 “오갑산은 주 남쪽 40리에 있다.”고 하여 그 한자표기나 거리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조선지도』, 『비변사방안지도』, 『1872년지방지도』에도 오갑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동지지』에는 “오갑산은 남쪽으로 40리에 있으며 충주와 경계를 이룬다.”고 하였다. 삼국 시대 때는 오압산으로 불렸다 하는데, 이곳 정상에 진을 치고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오갑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한때 오압사라는 거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군과 전투를 하기 위해서 이곳에 진을 친 이후로 그 정상을 이진봉이라 불렀다 하는데 현재 정상에 세워둔 표지판에도 이진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 여지도에 나온 오갑산 일대.     © 세종신문

여주민들레학교
2004년 출범한 여주민들레학교(교장 김진명)의 뿌리는 1993년 한우물학교에서 기원한다. 한우물학교는 학교 부적응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여주지역 중학생들을 모아 단기교육을 시작했고, 2004년에 여주민들레학교로 개명 했다. 여주민들레학교는 2008년 여주지역자활센터 청소년 교육사업단 연계사업을 시작으로 2011년 경기희망학교 단기, 장기 위탁기관으로 지정되었다. 중학생들을 위탁 교육하던 여주민들레학교는 2012년부터 고등학생 교과과정으로 개편해 첫해 단기위탁 203명, 장기위탁 7명의 학생들이 수료했고, 2011년 정식 개교 이래 단기위탁 450명, 장기위탁 75명의 학생들을 학교로 돌려보냈다. 2017년부터는 대안교육 장기위탁기관으로 위기학생들을 돌보고 있다. 여주민들레학교는 2016년 4월부터 폐교된 뇌곡초등학교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뇌곡초등학교는 1939년 4월 1일 점동공립심상소학교 부설 뇌곡간이학교로 설립인가를 받고 1944년 4월 점동공립국민학교 뇌곡분교장 인가를 받았다. 1950년 5월 뇌곡국민학교 승격 후 5월 9일 제1회 졸업식으로 19명을 졸업시켰다. 2002년 3월 3학급으로 점동초등학교 뇌곡분교장으로 통합되었다가 2012년 3월 1일 폐교되었다. 

▲ 여주민들레학교 정문.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신도균(71) 선생

고향은 어디인가?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뇌곡리로 이사를 왔다. 5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우리 막내는 여기 뇌곡리에 와서 태어났다. 우리 아버지가 화투와 술을 좋아 하셨는데 감곡면 문촌리 우리 집 옆에 주막이 있었다. 그 주막에서 아버지가 술과 노름으로 돈을 다 까먹으니까 우리 어머니 큰 맘 먹고 여기로 이사를 오신 거다. 추운 겨울에 이사를 왔다. 그 당시는 이 동네가 다 초가집이었다. 안방 웃방 두 칸짜리 초가집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7남매가 같이 살았다. 

▲ 신도균 선생과 아내 유재인 씨.     © 세종신문
 
학교는 어떻게 다녔나? 
감곡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여기로 이사를 와서 2학년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다시 1학년부터 다녔다. 뇌곡초등학교가 그 전에는 지금의 자리보다 위에 동네 속에 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는데 새 학교 지을 때는 교실이 없어서 남의 집 처마 밑이나 대청마루에서 수업을 하고 그랬다. 내 기억으로는 뇌곡초등학교 학생수가 500명이 넘었는데 교실이 없어서 오전반 오후반 나눠서 공부를 했다. 중학교는 점동중학교로 안가고 감곡으로 중학교를 다녔다. 감곡중학교 42회 졸업생이다. 여기서 8km정도 되는데 걸어 다녔다.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일하기 실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도망갔다. 

청소년 시절 서울에서는 어떻게 보냈나?
우리 둘째 형이 늦은 나이에 서울에 혼자서 돈 벌면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데 우리 형도 중학교만 마치고 서울로 도망가서 영등포 경찰서 소사를 하면서 동양공고를 다녔다. 작은 형 자취방에 있다가 어디 취직을 해야 해야겠다는 생각에 금성라디오에 취직을 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만 두고 우리 4촌 매형이 운영하는 목공소에서 일을 했다. 나도 목수기술을 배운다고 대패질을 하는데 내가 대패질을 하면 나무를 망쳐놓기 일수였다. 한 1년을 채 못 있었는데 이것도 아니다 싶어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어느 비오는 날 하염없이 서울거리를 걷다가 작은 형 집으로 갔는데 비는 오고 형은 군대 가고 없고 해서 그 길로 바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결혼은 언제 했나?
결혼은 스물일곱에 했다. 내가 군대에서 휴가 나오는 날이 우리 작은형 제대 하는 날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버스가 청미천 건너 37번국도 덕평리 앞에만 섰다. 청미천은 여름 장마철에 물이 많을 때는 나룻배로 다니고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철다리로 건너다녔다. 휴가 나오니까 작은형이 제대 한다고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버스정류장으로 리어카를 끌로 나오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갔다. 6월이었는데도 장마 전이라 철다리가 있었다. 그때 우리 동네 아가씨들이 강 건너 덕평리로 복숭아 봉지 씌우러 다녔다. 철다리 건너 강가에 한 처녀가 혼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걸어볼까 하고 기웃거리는데 그 처녀가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 시절에 손목시계는 정말 귀한 거였다. 그래서 내가 막차시간이 지나갔는지 물어보며 말을 걸었다. 그날 형이 오지 않아 그 처녀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낮에 친구들과 바둑을 두고 있는데 우리 동네 집배원이 나에게 와서 ‘어제 배터에 갔었느냐?’고 물었다. 거기서 몇 시냐고 시간 물어본 아가씨가 있었냐고 하며 ‘그 아가씨 한번 사귀어 볼 거냐?’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 집배원에게 쪽지를 한 장 전해서 어제 그 시간에 강가로 나오라고 했다. 그 집배원이 덕평리 사는 사람이었다. 그 아가씨가 내 군복의 명찰을 보고 이름을 외우고 집배원에게 물어봤던 거다. 내가 저녁 때 청미천 철다리로 가니까 집배원이 자전거를 타고 서 있다가 건너가서 그 처녀를 데리고 왔다. 바지에 빨간 윗옷을 입었는데 여간 이쁘지 않았다. 청미천 모래사장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했는데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그렇게 둘이 사귀기 시작해서 군대 있을 때도 연애편지를 많이 주고받았고 휴가 나올 때 마다 만나고 그랬다. 그렇게 제대를 했는데 얼마 후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처녀가 어떻게 알고 우리 집으로 와서 장례를 다 치를 때까지 일을 하다 갔다. 며칠 후에 그 집 큰 오빠가 찾으러 왔다. 오빠가 돌아가고 그 다음날 그 처녀가 자기 집으로 갔는데 그 다음날 다시 우리 집으로 왔다. 자기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해서 다음날 저녁 무렵에 처녀 집으로 갔다. 가자마자 냅다 큰절부터 했다. 장인 표정은 영 어두웠다. 그래도 나를 잘 봤는지 건넛방에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해서 자고 왔다. 그게 허락이었던 거다. 그 다음날 그 처녀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우리는 첫애를 먼저 낳고 그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 돌아가신 직후라 결혼식을 바로 올릴 수 없었다. 

▲ 청미천 다리에서 바라본 뇌곡리.     © 세종신문

한 평생 뇌곡리에서의 삶에 만족하나?
만족하고 말고 할 거 없이 그냥 살아 온 거다. 결혼하고 80년대 중반까지 뇌곡리에서 담배농사를 지었다. 담배농사가 쌀농사 짓는 것보다 백배는 나았다. 담배는 맨 아래 누렇게 익은 잎부터 먼저 따 낸다. 따 낸 잎을 차곡차곡 해서 지게로 지고 와서 새끼에 끼워서 건조실에 빽빽이 걸어서 말린다. 건조실 바닥에 연통을 설치해서 석탄으로 불을 때면 연통을 돌아 나가게 해서 연통구멍을 막고 불을 떼면 담배잎이 푹 쪄진다. 이렇게 담배를 일곱 번 내지는 여덟 번 쪄야 수매를 할 수 있다. 여기 뇌곡1리가 산골이라 가난한 동네였는데 담배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부촌이 되었다. 담배농사는 80년대 중반에 그만뒀다. 그리고 밭에서 고추, 콩 이런 일반 밭작물을 재배했다. 그 후에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어 과수원을 했다. 뇌곡리에 살면서 딸 둘, 아들 하나 낳아서 키워 전부 출가시켰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나이가 칠십이 넘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21/10/21 [16:56]  최종편집: ⓒ 세종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가장 많이 읽은 기사
전액 삭감된 ‘문화예술교’ 예산, 이번엔 통과될까 / 이재춘 기자
김영자 의원- 지역 건설사업가, 난방 안되는 독거노인 집 수리에 힘 합쳐 / 이재춘 기자
“식량은 주권, 농업의 공적 가치 인정받아야” / 이재춘 기자
부자감세 경쟁은 서민의 삶 피폐화시킬 뿐 / 박재영
파사성 발굴조사 현장에서 원형 집수지 2기 확인 / 이재춘 기자
김슬옹의 내가 만난 세종(15) - ≪훈민정음≫ 해례본을 읽읍시다 / 김슬옹
여흥체육공원 준공… 주민 건강증진 기대 / 아재춘 기자
정치가는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 / 박재영
김선교 의원 ‘무죄’, 회계책임자 ‘벌금 800만원’ 선고 / 이재춘 기자
민주평통 여주시협의회, 4분기 정기회의 실시 / 송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