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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77] 선조가 하사한 안릉이 있는 곳 가남읍 심석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10/13 [14:42]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가남읍 심석2리 마을전경.     © 세종신문

심석리의 유래

심석리는 본래 여주군 소개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 때 공심리와 흑석동을 합하여 심석리라 하였다. 자연마을 공심이는 심석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부락 뒤쪽에 산봉우리가 3개 있는데 모양이 공(公)자처럼 생겼으며 부락 앞으로는 산허리가 마음심(心)자형으로 굽어 있어 그 모양을 따서 ‘공심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심이를 공심동이라고도 하는데 공심리 윗쪽 마을을 웃공심이 또는 웃말이라고 하며, 아래쪽 마을을 아랫공심이 또는 아랫말이라고도 한다. 월편은 아랫공심이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바라본다 해서 월편(越便)이라고 하며, 옛날부터 이곳 월편은 마을이 형성될 당시 초승달 모양으로 생겨서 달 조각의 형상이므로 월편(月片)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흑석(黑石)은 검은 바위가 많아 흑석이라 하고 흑석동이라고도 한다. 이곳 마을 앞산에 옛날부터 병풍바위와 신랑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비만 오려고 하면 이곳 신랑바위가 검은색으로 변하므로 이 바위를 상징하여 검은 바위. 즉, 흑석(黑石)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미륵바위

흑석 동쪽에 있는 돌미륵으로 높이 약 1.8m이다. 옛날 부락 뒤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정신이 이상한 여자가 비오는 어느 날 이 바위 위에 올라 오줌을 누다가 별안간 벼락이 쳐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한다. 지금까지도 오줌을 누던 흔적이 희미하나마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다. 원래는 벼락바위라 불러오다가 언제부터인지 미륵바위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 심석2리 여산 송씨 선산 입구.     © 세종신문
 
안릉과 여산 송씨 족보

심석리에 있는 안릉은 조선 선조 때 문신인 송언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의 묘역을 일컫는다. 심석2리 안릉 표지 앞 기념비에 [선조대왕께서 송언신에게 임진왜난 평양 피난시 평양감사로서 왕실 역대 임금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보물 60여점을 잘 관리하였다가 전난 후 빠짐없이 환납하고 함경도관찰사 때 왕실 분산으로 생사불명인 왕녀 2명 왕자 1명을 구하여 왕을 뵈니 맨발로 뛰어나와 손목을 잡고 고마움을 크게 치하하시었다고 한다. 또 수복 즉시 소실된 종묘재건 등 많은 공훈 대가로 높은 관직과 후상을 하사함을 모두 사양하시고 공은 오직 조상님을 모시는 소원뿐이라고 하시니 성상께서 그 청을 받아들여 시조 송유익 시제일을 만물이 소생하는 동지날로 정하고 공의 할아버님과 아버님 묘는 예장(지금의 국장)으로 하사하여 이로부터 안릉이라는 묘역을 불러 내려왔다고 전해지며 1970년 성남지역 개발로 가남면 심석리에 이장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여산 송씨 족보.     © 세종신문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9호인 여산 송씨 족보는 1606년에 송언식(1542-1612)이 처음으로 편찬하여 1610년에 송일이 청주에서 1책으로 간행하였고, 그 뒤에 이를 송희업이 보완, 상하 2책, 226장으로 편찬하여 1653년에 간행했다. 지금까지 전하는 족보 중 17세기 이전 족보가 별로 없어 1600년대에 간행된 이 족보는 희귀본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이 족보는 여산 송씨 시조 송유익 이하 19세까지 기록하고 있고, 본편 외에 추록 2권이 추가 되어있다. 한 면을 세로로 6칸으로, 적서는 구분하지만 남녀는 구분하지 않은 채 출생순서에 의해 기록하고 있으며 딸의 후손은 4대까지 기록하고 있다. 14세까지는 양자 입양 사실이 거의 보이지 않고 14세 이후에야 양자 입양이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당시 여산 송씨 문중의 가족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출생순서에 의한 기록은 조선 초기 족보에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17세기 중엽까지도 장자상속제도가 완전하게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딸의 후손을 4대까지 기록하는 것 역시 18세기 이후의 족보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남녀 차별이 덜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족보를 통해 17세기 이후에야 양자제도가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가남감리교회

1934년 최초로 김동숙, 김동훈, 김동면이 맹골교회에 출석하면서 가남의 기독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938년 2월 가남면 심석리 265번지 김동면 씨가 자신의 집 대청에 기도처를 설립하고 7월에 예배당을 신축하여 ‘심석교회’를 설립했다. 1939년 이천지방 여남구역 심석교회로 등록하고, 1950년 교회예배처소를 3칸에서 9칸으로 증축했다. 1957년 5월 심석리 월편동 뒷산 언덕에 교회 터를 마련하고 신축기공을 했다. 1960년 교회명칭을 심석교회에서 가남교회로 변경했다. 1993년 심석리 709번지에 450평 예배당 기공예배를 하고 1997년 9월 건축봉헌식을 하였다.  

▲ 가남감리교회.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김인호(77) 선생

심석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나?

나는 1945년에 심석2리 흑석동에서 태어났다. 6.25 이후 기억으로는 여기 마을을 심석리라고 하면서 그 안에 공심동과 흑석동이 있었다. 지금은 저 아래 학교(제일중고등학교)가 있는 공심동이 심석1리가 되었고 우리가 사는 여기 흑석동이 심석2리가 되었다. 어려서 기억이라고는 6.25전쟁 때 깜짝깜짝 놀랐던 것이 몇 가지 기억이 난다. 태평리 다리를 끊는다고 비행기에서 폭탄을 떨구는데 뻥 소리와 함께 불이 번쩍번쩍했던 장면에 얼마나 놀랬던지 지금도 생생하다. 여름전쟁(50년 6월)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 건너 연대리로 피난을 갔다. 1.4후퇴 겨울피난 때는 충북 보은으로 갔었다. 나는 피난이 뭔지도 모르고 등에 미숫가루 같은 가루를 짊어지고 새 옷 입고 어디로 간다고 마냥 좋기만 했다. 그렇게 떠났는데 어디쯤 가니까 춥고 발도 시리고 정말 죽을 것 같았다. 험한 길을 갈 때는 우리 당숙이 나를 무등 태우고 가고 그랬다. 며칠 가는지도 모르고 갔는데 어디 쯤 가니까 지프차가 하나 다리 밑에 불에 타서 떨어져 있는데 그 안에 시커멓게 사람이 불에 탄 채로 있었던 것 같아. 보은에서 고향으로 돌아 올 때는 내가 홍역을 했다고 하더라. 우리 어머니가 나를 업고 왔는데 그 겨울에 나도 나지만 우리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다. 집으로 왔는데 우리 작은 할아버지가 외양간 앞에서 고삐를 움켜쥐고 소를 지키고 있었다. 미군하고 통역하는 사람들이 껌을 한 보따리 가져와서는 소 달라고 자꾸 꼬셨지만 우리 막내 할아버지는 껌만 몇 개 받아서 씹고는 소를 내주지 않았다. 나도 그 껌을 몇 개 얻어 씹었다. 

▲ 김인호 선생.     © 세종신문

학교는 어떻게 다녔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 학교가 열려 가남초등학교에 입학 했다. 32회 졸업생이다. 태평리 앞에 있는 대신천 다리를 건너 다녔다. 학교 다니기 전에도 그 다리가 있었는데 장날에 어머니 따라 가남 선비 장을 다닐 때 그 다리를 건너려면 너무 높아 겁이 나고 그랬다. 초등학교 마치고 지금의 제일중학교 전신인 신성중학교에 입학했다. 6회 졸업생이다. 우리 당숙이 신성중학교 교장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는 마을 뒷산을 넘어 웃공심이로 해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수학여행은 트럭 뒤에 학생들을 태우고 남한산성으로 갔다 왔다. 여기서 여주가 꽤 먼데 한글날 기념식을 세종대왕릉에서 하면 초등학교 고학년들과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걸어서 그 행사에 참석하고 그랬다. 아침밥 먹고 출발해서 행사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먹고 그랬다. 중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서울 한양공고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하숙을 했는데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도 알리지 않고 하숙집에서 밥만 먹고 놀다가 나중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시절 하숙비를 쌀로 냈다. 전차 타고 뚝섬유원지에 놀러 많이 갔다. 한양대 앞 살구지 다리를 지나 뚝섬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안계시고 집에 어머니 혼자 계셨다. 

▲ 여주제일중‧고등학교.     © 세종신문
 
청년기는 어떻게 보냈나?

내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오자 우리 어머니는 나를 고향에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하시며 가산을 정리해 나를 데리고 서울로 아예 이사를 하셨다. 고향의 전답은 아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를 위해 서울로 같이 가신 거다. 스물아홉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군대도 2대 독자라고 가지 않았다. 철이 늦게 들었던 거다. 서울에서 취직도 마땅치 않고 세월만 보내다가 이렇게 서울에서 허송세월을 보낼 이유가 뭐냐 싶어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 짓겠다고 하고 내려왔다. 우리 어머니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처음에 반대 하셨지만 내가 간다고 하니까 어머니도 허락해 주셨다. 
 
결혼은 언제 했나?

결혼은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하게 되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나이가 차가니까 그렇게 중매가 많이 들어왔다. 어머니가 선을 보라고 해서 보긴 했지만 결혼할 마음이 없어 다 그만 뒀는데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려고 하니까 안식구가 꼭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충북 음성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선보는 날 어머니와 둘이서 처가 될 집으로 갔다. 딱 보고 나는 부모들이 다 만들어 놓은 자린데 당사자들이 뭐 더 할 얘기가 있겠냐 싶었다. 처녀랑 단 둘이 있어서 자리가 멋쩍고 어색하고 불편하고 그랬다. 일상생활 그런 거 몇 마디 하다가 내가 괴로워서 ‘불편하실 것 같은데 중매하시는 분들과 대화를 나누자’고 하고 나왔다. 단 둘이 30분도 채 못 있었다. 선을 보기 전에 장모 되실 분이 우리 집에 미리 한번 오신 적이 있다. 장모님이 참 인상이 좋고 인자하면서 강해보이셨다. 그래서 장모님의 딸이니까 똑 같겠지 생각이 되어서 첫 선보러 갈 때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하고 갔다. 첫선 볼 때가 누에 칠 때니까 봄이었다. 결혼은 이듬해 정월에 했는데 중간에 처가에서 약혼식을 했다. 상차림을 하고 예를 올리고 반지를 주고받고 사진관에 가서 약혼사진을 찍었다. 약혼식을 할 때가 가을쯤 되었던 것 같다. 결혼은 장호원 예식장에서 올렸다. 태평리에서 장호원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그렇게 집사람을 만나 여기 심석리에서 터를 잡고 평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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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0/13 [14:42]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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