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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76] 갑신정변의 주역이 잠든 곳 흥천면 문장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10/08 [10:36]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흥천면 문장2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문장리의 유래

문장리는 본래 여주군 흥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문암동과 조장동을 합하여 문장리라 했다. 자연마을로는 문바실, 조장이가 있다. 문바실은 문장리 서쪽 마을이다. 옛날에 한 과부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이 마을에서 살았는데 아들을 서당에 보내면서 매일같이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에 치성을 드려 아들을 성공시켰으므로 후에 이 바위를 문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위 아래동네를 문바실, 일명 문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장이는 문장리 동쪽 마을이다. 조선 선조 임금 때 사또가 이포나루를 건너기 위해 이른 새벽에 마을을 지날 때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 조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외에도 조장이의 동북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 새터 조장이 남서쪽 쐐기나무골 아래 논 가운데 있었는데 벼락을 맞아 깨졌다는 바위로 경지정리로 매몰됐다는 벼락바위가 있었다. 또한 문바실 북쪽 마차실로 넘어가는 쉰미 밑에는 약수암이라는 절이 있다.

▲ 홍영식 선생 묘.     © 세종신문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 선생 묘

갑신정변은 우리 민족사에서 실패한 부르주아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장리 455-11번지에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우정국 초대 총판을 지낸 홍영식 선생의 묘가 있다. 홍영식 선생의 묘는 1986년 4월 10일에 향토유적 제 7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홍영식(1855~1884)선생은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개화의 주역 중에 한사람이다. 자는 중육, 호는 금석, 본관은 남양이고,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이며 충정공 홍만식의 동생이다. 홍영식 선생은 고종 10년(1873) 문과에 급제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와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참의군국사무, 참의교섭통상사무를 역임했다. 고종 20년 (1883) 협판교섭통상사무를 지내고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에 다녀오고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해 우정국총판으로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당 동지들과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우의정이 되었으나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무너지고 대역죄인으로 사형을 받았다. 이후 갑오경장으로 신원되어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라 내려졌다. 홍영식 선생의 묘는 광주군 초월면 쌍룡리에 있다가 1903년 현 위치에 이장된 것으로, 봉분의 높이는 1.1m, 둘레는 6.15m로 약 99㎡(30평) 이다. 봉분앞 중앙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우측에는 옥개를 얹은 「금석선생 남양 홍공 영식지묘(琴石先生 南陽 洪公 英植之墓)」라고 쓴 묘비가 서있다. 묘비는 1977년에 건립되었다.

▲ 여주시 흥천면 문장리 이종연 씨 가옥 광.     © 세종신문
 
문장리 고택

문장2리에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연희(광주 이 씨 종가 이종철의 처)가옥이 최근까지 있었는데 너무 낡아 허물고 현대식 주택으로 새로 지었다. 정연희 가옥은 없어졌지만 광주 이 씨 이종철의 사촌 동생인 이종연 가옥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이종연 씨의 말에 따르면 이종연 씨 집도 정연희 가옥 보다는 좀 늦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여주시사에는 정연희 가옥에 대해 [6.75칸의 ㄱ자형 안채와 4칸의 ㅡ자형 행랑채가 좁은 대지여건에 맞추어 ‘스’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가 정남향하여야 하나 서쪽으로 약간 틀어져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전퇴가 있는 ㄱ자형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과 부엌이, 오른쪽에 건넌방이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꺾인 구조이므로 서까래가 교차되는 회첨 부분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집에서는 부엌쪽 서까래를 대청 처마도리까지 배열하여 마지막 서까래 위에 대청쪽 서까래를 올려 서로 직교되게 배열함으로써 서까래 회첨 결구 부분을 단순하게 처리시켰다. 행랑채는 대문간을 중심으로 좌측에 헛간, 우측에 방과 창고를 두어 평면을 구성하였다. 기단과 주초는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상부가구는 평사량으로 꾸몄다. 지붕은 차양을 달고 슬레이트를 올린 우진각지붕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문장초등학교 전경.     © 세종신문
 
문장초등학교

흥천면 문장2리에 위치한 공립초등학교이다. 1938년 4월 23일 효지공립국민학교 부설 문장간이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뒤, 1944년 5월 1일 개교하였다. 1950년 5월 27일 제 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1996년 3월 문장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교훈은 ‘건강하고 슬기로우며 마음이 따뜻한 어린이’이며, 교목은 잣나무, 교화는 박태기이다. 전체 6학년 6학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기적성활동으로 컴퓨터, 태권도, 가야금, 종이공예, 영·일어 등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문장리 373번지에 있다. 

[마을人터뷰] 변은상(82) 선생

문장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나?
저기 저 산 양쪽으로 바우가 있어 그 바우를 문바우라고 하고 이 마을이 문바실이다. 나는 여기 문바실에서 1940년에 태어났어. 내가 어릴 때는 가구 수 한 20 가구정도 되었는데 지금은 100가구가 넘는다. 흥천·이포 톨게이트가 가까워 외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우리 어려서는 공깃돌놀이, 윷놀이, 자치기, 말 타기, 사방치기, 줄넘기 이런 거를 많이 했다. 

▲ 변은상(82) 선생.     © 세종신문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나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다. 이 아래가 문장초등학교가 있어 학교가 가까운 데도 다니지 못했다. 친구들이 학교 갈 때 나는 집안일을 도왔다. 아주 어려서부터 보리밭을 매고 소먹이고 그랬다. 내가 열한 살 때 6.25전쟁이 났다. 피난 갈 때 동생을 업고 갔다. 그 동생이 파난 갔다 와서 홍역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충주 구만장터까지 피난을 갔다 왔다. 피난 가서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김치가 없어서 김치 얻으러 갔다가 구박을 받고 그랬던 것이 기억이 난다. 닭도 먹이다가 피난 갈 때 가져갔는데 저 아래 문장사거리에서 미군들이 다 뺐어갔다. 처음 보는 외국 군인들이 샬라샬라 하면서 오렌지 그런 거 하나 주면서 닭을 다 뺐어갔다.  
내가 열두 살 때부터 어른들과 같이 품앗이를 하고 손모를 심으러 다니고 그랬다. 모심고 나서 논에서 호미로 논을 매고 그랬다. 겨울에 나무하러 가려면 마을 뒷산으로 가는데 그것도 주인 몰래 가야지 주인이 알면 나무를 전부 뺏겼다. 내가 젊어서부터 쓰레질을 배워 일 다니면 쓰레질을 많이 했다. 일하러 가면 이틀 사흘씩 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나흘 일하면 쌀 한말 받았다. 
 
평생 문장리에서만 살았나?
마을에서 농사를 짓다가 군대를 좀 늦게 갔다 왔다. 보충병으로 3년 있다가 스물아홉에 군대를 갔다 왔다. 스물아홉까지 있다가 군대 갔다 와서 결혼하고 서른다섯에 잠깐 객지에 나갔다 왔다. 서울 이문동에서 한 1년 살았다. 문장리 집을 팔아서 백만 원에 전세를 얻어놓고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목재소에서 일을 했다. 목재를 어깨에 메고 다니면 나중에 어깨가 부어오르는데 그게 굳어서 나중에는 아프지도 않았다. 그러면 두꺼운 요 한 장 깔고 그 큰 목재를 어깨에 가볍게 메고 다니고 그랬다. 첫 월급이 만 오천 원인가 그랬다. 아들 둘을 키우는데 홍역을 심하게 앓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대번에 좋아졌다. 그래서 그냥 다시 고향 문장리로 내려왔다. 목재소에서 싣고 내려온 나무와 흙벽돌을 쌓아 집을 새로 지었다.
 
결혼은 언제 했나?
결혼은 군대 갔다 와서 했다. 우리 집사람은 강원 평창사람이다. 집사람 사촌 언니가 저 아래 문장사거리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이가 소개해 줘서 결혼을 했다. 나는 서른이 좀 넘었고 우리 집사람은 이십대 후반이라 노총각 노처녀가 만나 결혼했다. 집사람 사촌 언니가 나를 잘 봐서 소개해 준다고 평창에 있는 사촌 동생을 데리고 왔다. 봄에 그 집에 오라고 해서 혼자 가서 만나보고 잔칫날을 받았다. 그날이 이천 백사 곰바우 장날이라 둘이서 장 구경 하러 갔다 왔다. 장 구경 갈 때는 서먹서먹했는데 그래도 장구경하고 돌아 올 때는 구면이라고 덜 서먹서먹했다. 곰바우 장에서 내가 바늘하고 실을 사줬던 것 같다. 그 처녀도 자기 엄마가 서른 살에 일찍 돌아가셔서 홀아버지를 모시고 사느라 그동안 결혼을 못했다고 했다. 그해 가을에 내가 평창으로 갔었다. 평창 처가를 찾아가니 집사람이랑 장인어른 단 둘이 사는데 내가 나무를 이틀이나 해줬다. 장인이 몸이 편찮으셨다. 
 
혼례를 언제 올렸나?
그 이듬해 봄에 식을 올렸다. 문장사거리 사촌언니 집에서 대례를 올렸다. 대례 치르는 날 마을에서 가마를 타고 내려갔다. 지금은 도랑을 다 복해서 길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앞에 도랑이 흘렀다. 그 도랑가를 따라 가마를 타고 문장사거리까지 내려갔다. 올 때는 그 가마에 신부를 태우고 왔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사는데 장인이 몸이 많이 안 좋다고 기별이 와서 집사람이랑 둘이서 평창으로 갔다. 장인을 업고 평창읍내 병원으로 가서 입원을 시키려고 하는데 장인이 없어져 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처가로 돌아와 보니 장인이 집으로 돌아와 계셨다. 장인 말씀이 “돈도 없고 사우(사위)도 돈이 없을 건데 병원비를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냥 왔다” 그러셨다. 그래도 다시 집사람과 같이 장인을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주사 한 대 맞춰가지고 그 이튿날 처가로 돌아왔다. 나무를 잔뜩 해놓고 문장리로 돌아왔는데 며칠 후 또 아프다고 기별이 와서 처가로 갔다. 장인을 도저히 평창에 혼자 둘 수가 없어서 문장리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문장리로 와서 한 1년 살다가 이듬해 정월에 돌아가셨다. 저 건너 산에다 묘를 썼다가 평창에 있는 장모님 옆으로 모셨다. 우리 집사람이 평창에 홀로계신 친정아버지를 생각하는 게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교도 못나왔지만 우리 집사람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여기 문장리에서 아들 둘 딸 하나 낳고 살았다. 그렇게 평생을 같이 살아온 집사람도 3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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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0/08 [10:36]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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