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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75] 모두가 화목한 한마을 대가정 대신면 하림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10/01 [10:37]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대신면 하림1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하림리의 유래
하림리는 본래 여주군 등신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구동 일부와 가림동을 병합하여 하림리라 해서 대신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가섭, 대미개, 신대동, 아랫미륵이가 있고 행정리는 하림1·2·3리로 나뉘어져 있다. 가섭은 눈썹같이 아름다운 수풀이 마을 주위에 있다 하여 가섭마을이라 한다. 대미개는 뒷산이 도미 형상이라 도미마을이라 하다가 대미개로 불렀다고도 하며, 상구리 가는 쪽에 아름다운 경치와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 선 길이 있어 도미(道美)로 부르다가 대미개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신대동은 성주 이씨들이 새로 터를 잡아 신대동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새터라고도 한다. 아랫미륵이는 우두산에서 내려오면 상구리에 미륵불이 있어 상구리를 웃미륵이라 부르고 그 아래를 아랫미륵이라고 불렀다. 방죽골은 커다란 방죽이 있던 곳이라 하며, 허목사의 비석이 묻혀 있다고 한다. 시주뫼는 시름을 안고 넘어가는 곳이라 하여 시주뫼라고 한다. 절터는 되미골 안쪽에 절터가 있는데 신라시대 창건되었고, 지금은 와당과 탑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활터골은 예전에 활을 쏘던 터가 있었기 때문에 활터골이라 한다.

▲ 하림리 은진 송씨 제각.     © 세종신문


하림리 은진 송씨
하림리는 은진 송씨가 처음 입향한 곳이다. 여주의 은진 송씨는 12세 송월재, 송희득의 후손으로 송월재공파라고 한다. 입향조는 시조 송대원의 13세이며 송월재의 첫째아들인 부사공 국준(國準, 1588~1651)이다. 그의 호는 풍계로 1624년(인조 2)에 생원이 되고, 1627년(인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있다가 예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 윤집, 이영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그 뒤 병조정랑, 종친부전첨을 거쳐 부평부사, 단천군수 등을 지냈다. 이어 성균관에 들어가 직강·전적·사예 등을 역임하고 통례원상례를 지냈다. 상의원정과 선전관을 거쳐 양양부사를 역임하였다. 은진 송씨가 대신면 하림리로 입향한 시기는 17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하림리에는 은진 송씨는 13세 송국준의 묘가 이곳에 있어 그의 아들 14세 규징이 17세기 후반 경에 입향하면서 세거가 시작되었다. 

▲ 하림리 느티나무.     © 세종신문

하림리 느티나무
대신면 하림리 471-1에는 여주시 지정 여주-49호 수령 200년이 넘고 수고 20m, 둘레 180㎝, 수관폭 13m의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하림리 느티나무는 수세가 안정되어 있으며 1m 정도 올라온 부분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있다. 가지는 무성한 편이나 도로 쪽으로 뻗은 가지의 생육이 고르지 못하다. 수피는 비교적 어둡고 거친 편이며, 가지치기 흔적이 많다. 
 
한천
한천은 대신면 상구리에서 발원하여 하림리를 가로질러 남서쪽으로 흐르다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지방하천이다. 한강수계의 지방하천으로 남한강의 제1수계이다. 하천연장 7.62km, 유로연장은 8.53km, 유역면적 18.79㎢이다. 하천 인근의 토지는 대부분 임야와 농경지로 이용된다. 하천으로 흐르는 물이 차다고 해서 한천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마을人터뷰] 원석범(82) 선생

하림리가 고향인가?
아버지가 하림리에 처음 자리를 잡았고 내가 2대째 살고 있다. 아버지는 북내면 신접리에서 분가해서 하림리로 나왔다. 나는 1940년에 태어나서 천남국민학교 4회, 대신중학교 2회, 대신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기억나는 추억이 있나?
초등학교 다닐 때 책보를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 다니는데 나는 외아들이라 다른 애들이 집세기 신을 때 검정고무신 신고, 검정고무신 신을 때 운동화 신고 하면서 대접을 좀 받았다. 6.25전쟁이 나고 학교가 중단되었을 때는 북내면 당우리 모냉이에 이일영 이라는 한문선생이 살고 있어서 그분에게 한문을 배우러 다녔다. 글 삯이 1년에 쌀 한 가마였다. 하림리에서 4명이 다녔고 장암리에서도 10명이 다녀 오전반 오후반 이렇게 나눠서 한문을 배웠다. 천자문, 명심보감, 대학, 논어 125쪽까지 배우고 쌀 한 가마 주고 졸업을 했다. 

▲ 원석범(82) 선생.     © 세종신문

중·고등학교 다닐 때 기억나는 추억은?
고등학교 교장선생님 댁이 한약방을 했다.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단체로 용문산으로 데려가서 약초를 채취하게 했다. 도라지, 더덕, 삽주 등 약초를 많이 캤다. 그 때 내가 용문산에서 산삼을 10뿌리를 캤다. 산삼은 그림으로만 봤는데 용문산에서 약초를 캐다보니까 그림으로 본 산삼 잎과 똑 같이 생긴 게 있어서 한 뿌리를 캤는데 산삼이 맞았다. 그런데 그 옆에 듬성듬성 산삼이 계속 있어서 10뿌리를 캤다. 그 산삼을 가지고 내려와 교장선생님께 보여드리니까 “이거 산삼이다. 네가 캤어도 내가 가져가야 한다” 그러시고 채집통에 담아갔다. 양평 20사단이 주둔하고 있을 때인데 사단장에게 산삼 두 뿌리를 바치고 우리 학교 좀 지어달라고 해서 가건물을 떼어내고 새 건물을 지었다. 그 산삼이 대신고등학교에 효자노릇을 했다. 나도 산삼 캤다고 교장선생님이 수업료를 면제시켜줬다. 대학 갈 때도 교장선생님이 모범학생이라고 추천서를 써주고 대우를 잘 받았다. 교장선생님이 뇌두를 보고는 20년 30년 된 산삼이라고 했다. 대신중학교, 고등학교가 남녀공학이었는데 우리 동네에도 송희순이라는 여학생이 고등학교에 같이 다녔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남자가 54명이고 여자가 6명이었다. 대신고등학교 1회 졸업생 남자 54명 중 지금은 7명 남고 다 세상을 떴다. 여자들은 6명이 다 아직 살아 있다. 그동안 계속 동창회를 해서 친구들 근황을 알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했나?
중앙대학교 합격을 하고 입학을 준비하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소를 팔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대학을 포기하고 바로 직장에 취직했다. 아버지는 대학을 가라고 했지만 소를 파는 것이 아까워 대학을 포기했다. 일소를 팔아버리면 송아지를 사다가 2년이라는 세월동안 길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아버지가 고생하실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정원제지에 입사했다. 제지회사에 한 5년 다니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직장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군대는 외아들이라 면제를 받았다. 그 당시 농사가 1만8천 평 정도 되었다. 집안에 일꾼이 한 명 있었는데 쇠경이 1년에 쌀 10가마였다. 최고일꾼이 12가마 받았다. 최고일꾼은 쟁기질 쓰레질 가릴 것 없이 다하고 모든 일이 막힘이 없는 사람이다. 

▲ 하림리에서 가장 오래된 원석범 선생 집 장독대.     © 세종신문
 
결혼은 언제 했나?
결혼은 열아홉에 했다. 고등학교 3학년 음력9월에 결혼을 했다. 처가가 흥천면 상백리인데 아버님과 장인이 서로 친구다. 집사람은 상백리 정씨다. 대례 올리는 날 집사람 얼굴을 처음 봤다. 아버지가 엄하게 강조를 해서 반대도 못하고 그냥 철모르고 결혼을 했다. 결혼식 날 고등학교 친구들이 많이 왔다. 그해가 1958년이었다. 여기서 가마를 타고 대신면 보통리로 가서 백사장에서 배를 타고 찬우물 나루로 해서 상백리로 넘어갔다. 처가에서 대례를 올리고 가마와 가마꾼들은 하림리로 돌아가고 나는 처가에서 하룻밤 잤다. 그 다음날 상백리 가마에 우리 집사람을 태우고 하림리로 왔다. 대례를 올릴 때 신부가 어떻게 생겼나 눈이 계속 거기로 갔다. 대례 올리는 날 처음 얼굴을 보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내가 어린 마음에 선도 보지 않고 데이트도 한번 없이 아버님 말씀만 듣고 와서 보니까 몸도 건강한 것 같고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신부가 자기도 마음이 든다고 했다. 우리 집 살림살이가 크고 일이 많은데 우리 집에 와서 일을 많이 하게 될 것 같다고 했더니 일은 많이 해봐서 자신 있다고 했다. 마음씨가 곱고 착해서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잘 했다. 아들 5형제 낳고 서른일곱에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재혼은 언제 했나?
집사람 떠나고 나서 3년 지나 재혼을 했다. 재처도 애들이 셋 있었고 재혼하고 아들을 하나 낳아서 우리 집 애들이 전부 아홉이다. 다 건강하게 자라 출가해서 잘 살고 있다. 처가 데려온 애들도 나를 친아버지처럼 여기고 나도 그 애들을 친자식처럼 키웠다. 지금 처도 마음씨가 참 착하다. 양동사람인데 여주 신륵사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 교재를 했다. 신륵사 강변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보니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서 둘이 사나흘에 한번 여주에서 만나 데이트를 했다. 여주 읍내 다방에도 가고 식당에서 점심도 먹고 신륵사 구경도하고 그랬다. 그 당시에는 여주에서 양동을 오고가는 버스가 있었다. 처도 상처하고 홀로되어 애들 셋이 있다고 해서 내가 애들 셋 책임 질 테니 같이 살자 했다. 그렇게 재혼을 해서 지금까지 오붓하게 잘 살고 있다. 아들이 여덟이고 딸이 하나다. 친구들이 나보고 처복도 있고 자식복도 있다고 부러워한다. 자식이 아홉인데 말썽피우는 애도 없고 다 성실하게 잘 살고 있다. 내 생일날과 추석, 설날에는 9남매가 다 내려왔다 간다. 식구들이 다 모이면 시골집이 꽉 찬다. 
 
80평생을 살아온 하림리는 어떤 곳인가?
하림리는 6.25사변 때도 단 한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다. 다른 동네는 빨갱이도 아닌데  군인과 경찰이 들어왔을 때는 빨갱이라고 해서 죽이고 인민군이 내려 왔을 때는 경찰가족이라고 일러서 죽이고 그랬다. 우리 하림리에는 그런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하림리는 친 가족 이상으로 화목하고 우애가 좋은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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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0/01 [10:37]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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