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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 109 - 사사로운 원망으로 큰 공을 버릴 수 없다
 
김태균   기사입력  2021/08/05 [11:05]
▲ 세종신문 김태균 대표     
세종이 있게 된 가장 큰 배경으로 태종을 꼽는다.
맏이를 세자로 세워야 하는 도리를 알면서도 태종의 용단에 의해 셋째인 충녕대군(세종)을 보위에 올려 조선전기의 국가 기틀을 잡게 했고 이로 인해 우리역사는 세종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얻게 되었다. 
태종은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드라마 등에서 표현되는 태종도 늘 그랬다. 고려 구신들 간의 권력투쟁에서도 과감한 결단으로 앞질러 나갔고 형제의 난을 주도하면서도 권력을 안정시켰다. 당시 태조에게 있었던 많은 왕자들이 눈을 부라리며 기회를 탐할 때에도 먼저 치고 나가는 과감함으로 국면을 만들어 나갔다.
하지만 태종에게 때로는 합리적이고 유화적인 정치지도자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눈물을 자주 흘렸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진위를 알면서 묻어두기도 한다.
 
세종3년 11월 어느 날 태종이 여러 명의 신하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열며 태조의 배향공신명부를 만들 때에 남은(南誾)을 천거한다. 남은은 정도전과 함께 태종이 왕자시절(이방원) 그를 반대하며 다른 왕자를 편들다가 죽은 사람이다.
배향공신이란 임금이 죽으면 종묘를 봉안하는데 이때 선왕들과 합사하는 공신들이다. 이들은 임금의 생전에 충성을 보이고 공이 있는 사람들로 특별히 엄선한다. 이들은 임금 제사를 지낼 때마다 함께 제사를 받는 영예를 얻게 된다. 그 후손들에게는 문음(공신의 자녀에게 주는 벼슬)과 같은 여러 특전들이 주어졌다. 그러다 보니 배향공신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태종을 반하여 왕자의 난에서 죽임을 당한 남은을 태종이 스스로 천거한 것이다.
 
태상왕이 유정현·이원·변계량·허조·조말생·이지강·이명덕·김익정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의 배향 공신(配享功臣)을 의논하니, 유정현 등의 의논은 태상왕의 뜻과 같았다. 이에 김익정을 보내어 박은의 집에 가서 물으니, 박은이 말하기를,
“남은(南誾)은 비록 공이 있으나, 또한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으므로, 지금의 신자(臣子)로서는 함께 세상에 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태상왕 전하께서는 아주 공변되고 지극히 발라서 공을 생각하여 죄를 용서하며, ‘태조의 하늘에 계신 영(靈)도 또한 〈남은을〉 배향(配享)시키고자 할 것이라. ’고 하니, 홀로 남은만의 영광이 아니라, 전하의 아름다운 명예도 또한 뒷세상에 전해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익정이 돌아와서 아뢰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그렇다.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이 큰 때문이다.”
라고 하며, 이에 당나라 태종이 위징(魏徵) 을 썼던 일로서 개유(開諭)하였다. 이명덕은 아뢰기를,
“남은은 비록 공이 있지마는, 태조만 섬길 줄 알고 오늘날이 있을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령 그 계획이 이루어졌더라면 어찌 오늘날이 있겠습니까. 신은 마땅히 배향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상왕은 말하기를,
“사사 원망으로써 큰 공을 버릴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남은과 이제(李濟)에게 시호(諡號)를 주도록 명하였다.(3년 11월 8일)
 
남은(南誾)은 조선의 개국공신 중 한명이다. 문신이었지만 고려말 우왕 때에 왜구를 격파하여 벼슬에 올랐고 우왕 말년에 이성계가 요동으로 쳐들어 갈때 함께 갔다가 위화도 회군을 주장한 공으로 벼슬이 올랐다. 공양왕 때에 대간들이 모의하여 정도전을 죽일 것을 결의하여 감옥에 넣었는데 남은은 정도전을 구하려다 실패하자 벼슬을 등졌다. 
후에 남은과 정도전 등 52인이 밀조하여 이성계를 새 나라 조선의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태조7년 정도전과 같이 왕자 방석편을 들어 여러 왕자들을 없애려고 모의하였다가 탄로되어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실록에 박은이 말하는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함께 세상에 살수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함축하는 바다.
하지만 태종은 이러한 논의에서 아버지에게 충성해서 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한 개국공신으로서의 공은 공이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시도는 사사로운 것이라며 배향공신에 추증할 것을 명한다. 
각종 정치적 숙청작업을 보노라면 태종은 냉혈한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정치적 감각 면에서 태종에게는 포용과 합리의 면모도 많다. 사사로운 원망으로 큰 공을 버리지 않게 하는 배려가 조선전기 정치의 안정과 세종의 치세를 가능하게 한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의 정치가 깊이 참고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어지는 기록에는 세종의 호학(학문하기를 좋아함)에 대한 내용도 함께 나온다. ‘호학군주’ 세종이라 불리지만 그의 학문을 좋아함은 남다른 데가 있다. 왕자시절의 책읽기에 대한 일화에서부터 나이 들어 눈이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의 책읽기는 세종만의 고유한 이야기들이다. 
 
정사를 보았다.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경연을 열고자 하는데, 경연 당상관(經筵堂上官)과 간관(諫官)·사관(史官)은 제외하고 강관(講官) 2, 3명으로 하여금 시강(侍講)하게 하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내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보고자 하니, 변계량이 성리(性理)의 학문에 관한 글을 보기를 청하므로, 오늘 비로소 《사서(四書)》를 강(講)하게 하니, 경들은 이를 알 것이다.”
하였다. 지신사 김익정이 대언(代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입시(入侍)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날에 비로소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은 본디부터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매양 맑은 새벽에 정사를 보고, 인하여 경연에 나아가서 강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나, 궁중에 있을 적에는 글을 읽어 밤중이 되어도 그만두지 않으니, 태상왕이 그의 정신이 피로할까 염려하여, 금지시키며 이르기를,
“과거(科擧)를 보는 선비는 이와 같이 해야 되겠지마는, 〈임금은〉 어찌 신고(辛苦)함이 이같이 하느냐.”
하였다.(3년 11월 7일)
 
억지로 경연에 참석했다고 하는 후대의 왕들에 비해 세종은 스스로 경연을 더 강화하고 참석자들을 독려했다. 세종이 보고자 했던 자치통감강목은 중국역사를 기술한 방대한 책으로 사마광이 짓고 송나라의 주희가 주석(강목)을 붙인 책이다. 세종은 역사를 경험의 교본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성리의 학문을 더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는 이유로 사서 중 하나인 대학을 보게 되었지만 차후 세종은 자치통감강목을 애독한다.
단지 책을 좋아하는 문약함이 아니라 ‘이것이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묻는 호학의 군주와 ‘사사로운 원망 때문에 큰 공을 저버릴 수 없다’는 아버지 태종의 협력이 새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가장 위대한 왕으로서의 업적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김태균 세종신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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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8/05 [11:05]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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