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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 108 - 세자 이향
 
김태균   기사입력  2021/04/07 [17:45]
▲ 세종신문 김태균 대표     
원자(元子) 이향(李珦)이 조복을 차리고 책봉(冊封) 받는 의식을 대궐 뜰에서 연습하는 데, 때마침 큰 바람이 불어서 먼지가 날릴 지경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많이 거둥에 실수가 있었으나, 원자는 행동이 엄중하고 조용하여, 자연히 예에 맞아서 조금도 차질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기뻐하고 경사스럽게 여겨서 눈물을 흘린 자도 있었다.(3년 10월 26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불리기도 한다. 
왕조실록이 왕조의 입장에서 기록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이런 기록들 중에 왕과 세자에 대한 기록은 특히 그럴 수 있다. 장차 문종이 되는 세자 이향에 대한 기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견하다.

세종의 판박이라고 불리던 문종은 세종의 그늘에 가려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 후반부에 문종의 보필은 노쇠해 가는 세종의 치적에 큰 힘이 된 것이 사실이다. 훈민정음의 탄생도 그의 손을 거쳐서 완성됐다는 이야기도 어느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으니 말이다.

세자 책봉의식을 연습하는 날의 기록도 그러하거니와 다음날의 세자 책봉식에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임금이 면복을 하고 인정전에 나와 원자 향을 세자로 책봉하며 왕세자로 세웠다.
 
저부(儲副)를 세워서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것은 국가의 공통되는 규례이고, 명분(名分)을 바르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계속(繫屬)하게 하는 것은 실로 공공의 의(義)에 인한 것이다. 옛날 일을 상고하여 이에 떳떳한 장전(章典)을 거행한다. 너 향(珦)은 의표(儀表)가 준수하고 숙성하며, 문학을 익혀서 날로 성취하면, 슬기롭고 명랑한 자질은 국가의 신기(神器)가 돌아가는 바이며, 세대로 적자(嫡子)의 높은 자리는 여러 국민의 심정이 귀속되는 바이다. 드디어 날을 골라 종묘를 알현하여 주창(主鬯)하고 승조(承祧)하게 하며, 너를 왕세자로 세우노라. 아아, 오직 하늘은 친한 데가 없고 오직 덕(德)이 있는 자를 도와주는 것이다. 어질고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곧 만백성을 보살펴서 편케 할 대권을 받았고, 검소하고 너그럽게 하여 이 나라의 경사를 길이 벋어 나게 하라.(3년 10월 27일)
 
그리고 이어지는 사관의 평이 있다. ‘세자가 책을 받을 때에 주선하고 진퇴 하는 동작이 다 예에 맞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탄복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란 말이다. 세자 향, 이후의 문종은 어린시절부터 기대가 컸다. 우리 임금의 대를 이어 나라를 안정되게 이끌어 가겠구나 하는 기대가 이때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아쉬운 것은 건강문제로 일찍 떠난 것이다. 
 
세종의 맏아들 향이 세자책봉이 된 때가 7살이다. 
이후 8년 뒤, 그러니까 15살에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세자 향은 도통 여자에 관심이 없었나 보다. 이후의 실록기록을 보면 여린 심성에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는 밤이 많았던 사람이다. 
첫번째 빈인 김씨는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주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이혼(폐위) 당했다. 두번째 부인인 봉씨는 폭력적인 성품에다 나인으로 일하는 소쌍과 동침하는 동성애 행각이 발각되어 역시 폐위되었다. 왕세자로서 후사를 얻어야 하는 입장에서 후궁이었던 권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했으나 41년도에 단종을 낳은 지 하루만에 산후병으로 죽고 말았다. 참 부인복이 없는 사람이다. 2번의 이혼과 1번의 사별로 혼인생활이 매듭지어진 것이다. 
 
향은 세종의 판박이로 알려져 있다. 
학문하기를 좋아하고 현명하고 덕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평한다. 측우기의 발명은 문종의 작품이라는 게 정설이다. 세자시절에 비가오면 땅을 파서 그 젖은 정도를 재서 기록하기도 했고 더 정확한 자료를 얻기 위해 구리그릇에 빗물을 받아 그 양을 자로 쟀다는 기록도 있다. 그 외에 문종은 천문학과 산술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세종후반 약 8년간의 섭정으로 보건데 그의 정치력도 인정받는 대목이다. 즉위 후 2년만에 병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고 그랬다면 단종과 수양대군으로 이어지는 난도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문종의 어진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다. 
사망으로부터 180여 년이 흐른 뒤인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대신들이 선원전에서 어떤 왕의 초상화를 발견했는데 초상화 속의 그 왕은 길고 짙은 턱수염이 묘사되어 있는, 풍채가 크고 당당해 보이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조정 대신들은 초상화 속의 인물이 조선 제 12대 임금인 인종이라고 주장하는 대신들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대신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 한 대신이 그 초상화의 뒷면에 있는 배접을 뜯어보니 '문종대왕어진(文宗大王御眞)‘이라 적혀 있었다 한다.
 
다음은 7살짜리 세자 향이 세자로 책봉 받으면서 사은의 글을 올린 전문이다. 공들여 작성했을 문장을 보면서 형식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 여겨진다.
 
“명이 하늘에서 내려와 저로 하여금 부이(副貳)의 자리를 이으라 하시니, 저는 몸 둘 곳이 없어서 두렵고 황송하기가 더욱 간절합니다. 
돌이켜 살펴보니, 따라가려 해도 감당하기가 어려우며,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이르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나이도 유치하고 성품이 또한 용렬하고 어리석어, 깊이 덮어서 길러 주신 성은을 받았고, 외람히 고명하신 훈계를 얻어서, 마음은 사랑과 공경에 돈독히 하여, 삼가 존안을 받들었으며, 뜻은 항상 덕에 나가고, 학업을 닦는 데에 있어서, 오직 배우기에 지향할 줄만 알았나이다. 
어찌 뜻하였으리이까. 아직 머리를 내려 땋은 어린 나이에 문득 종사의 주장이 되는 대권을 받을 줄이야. 이 자리가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아니하니, 영광스러움을 오히려 두려워하나이다. 이에 대개 지극하신 어지심은 뒤를 열어 주시고, 큰 지혜는 미세한 데까지 비친다 하더이다. 그래서 남은 복을 주시고, 좋은 법을 끼쳐 주시려면, 마땅히 장자를 세워서 근본을 단정히 하려 하심인가 합니다. 
그러므로 잔열한 자질이나 그로 하여금 특수한 은덕을 입게 함이시니, 삼가 양궁(兩宮)에 공경으로 섬겨서, 항상 유순한 즐거움을 바치려 하며, 세 가지 착한 것 을 완전히 하여 더욱 보필하는 정성을 실어 바치려고 합니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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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4/07 [17:45]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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