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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50] 강나루와 느티나무의 고장 우만동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4/07 [17:36]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여흥동 우만동 마을 전경.     © 세종신문

우만동의 유래

우만동은 본래 여주군 근동면의 지역으로 앞에 한강 물이 고여 소(沼)가 졌으므로 소만이 또는 우만, 우만이, 우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우만리라 했다. 2013년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우만리에서 우만동으로 개칭되었다. 중종 때의 판서 이장곤이 이곳에 살면서 호를 우만(寓灣)이라 하였다. 예전엔 강가 나루터를 중심으로 마을이 있었으나 1972년 큰 장마로 마을이 물에 잠겨 1978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강에서 약간 떨어진 지금의 마을로 옮겨왔다.
  
우만이나루

우만이나루는 우만이 마을에서 남한강 건너편의 강천면 가야리, 적금리, 굴암리를 연결했던 나루이다. 나루 소재지 마을의 명칭에 따라 ‘우만이나루’라고도 하였으며, 현재 상류 쪽으로는 바로 인접해서 영동고속도로 남한강교가 통과하고 있다. 나루터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여름철이면 주민들과 나루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지금은 마을도 옮겨가고 나루터도 사용하지 않아 나루가 제 기능을 발휘했을 시절에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할 뿐이다.

▲ 우만이나루 옛길.     © 세종신문
1972년 홍수로 나루가 없어지기 전까지 우만이나루에는 20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와 최대 10명까지 승선할 수 있는 거룻배가 각각 1척씩 있었다고 한다. 배는 우만이 마을에서 관리하였으며 강천면 적금리, 굴암리, 가야리 주민들이 여주 장을 출입하거나, 또는 우만리, 멱곡리 주민들이 강천면으로 땔나무를 하러 갈 때 주로 이용하였다. 우만이나루에서는 소를 건네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원주 장에서 소를 구입한 소장수들이 우만이나루를 경유하여 여주 장과 장호원 장으로 이동하였는데, 특히 여주 장으로 가는 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강천면에 거주하는 중학생들이 여주읍 등지로 통학을 할 때도 종종 이용하였다고 한다. 
 
우만동 느티나무

우만동 느티나무는 향토문화재 여주보호수 1호로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 18m, 둘레 280cm, 수관 폭 30m 로 우만동 마을입구에서 강변을 향해 난 길의 끝에 있다. 느티나무가 있는 자리는 옛 우만이나루가 있던 자리로 나루는 1972년에 홍수가 난 이후로 없어졌다. 이 나무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홍수가 나 마을을 옮긴 후에 마을과 떨어져 있게 되었다. 
 
연양천

연양천은 한강수례의 지방하천으로 남한강의 제1지류이다. 상거동에서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 삼교동을 지나면서 북쪽으로 흘러 단현동에서 남한강으로 유입되던 하천을 수로를 연장해서 연양동 습지를 통해 남한강으로 유입시킨 지방하천이다. 연양천을 경계로 우만동과 멱곡동이 나뉘는데 연양천 주변에는 풍부한 수량을 기반을 조성된 넓은 들이 우만동과 멱곡동의 기름진 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연양천이라는 이름은 남한강에 유입되는 하류의 연양리라는 동리 이름에서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연양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촌과 양촌을 합쳐 각 마을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연양리라 한 것이다. 하천연장 8.98km, 유로연장은 11.35km, 유역면적 35.63㎢이다. 하천 주변의 토지는 대부분 임야와 농경지로 이용된다. 발원지 인근으로 50번 영동고속도로가 있으며, 중류부에는 37번 국도가 하천을 가로지르며 지난다. 연양천 물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유유히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 여주시 우만동을 지나며 흐르는 연양천.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황원필(83) 선생

어린 시절 우만동은 어떤 곳이었나?

나는 1939년 4월에 우만동에서 태어났다. 왜정 때 태어나 점봉초등학교를 다니다 6.25전쟁을 겪었다. 7남매 중 맏인데 위로 누이가 하나 있고 밑으로 동생이 다섯이다. 해방되고 어쩌고 하면서 초등학교를 나이가 들어서 들어갔는데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도 안가고 농사일을 시작해서 여태까지 그렇게 살고 있다. 전쟁 때는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왔다. 그 전에는 저 아래 강가에 살았는데 전쟁이 났다고 해서 뒷동산에 숨어 있는데 허연 포대기를 둘러 쓴 군인들이 떼로 지나갔는데 어른들 말이 중공군이라고 했다. 전쟁이 나는 바람에 졸업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초등학교를 마쳤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니 열여섯이었다. 열여섯이면 다 커서 쟁기질 써레질을 직접 하며 농사를 지었다. 집에 소도 키우고 우마차도 있었다. 마을 연자방아가 지금 고속도로 다리 밑에 있었다. 예전에는 강가에 마을이 있었으니까. 그 다음에는 발동기로 하는 방앗간이 생겼다. 전부다 우마차로 실어 나르고 논두렁에서 벼를 지게로 져 나르고 그랬다. 발로 밟아서 타작하다가 발동기를 돌려 했는데 지금은 콤바인이 벼 베고 타작 다 해서 포대에 담아내니 예전에 비하면 농사가 엄청 편해졌다. 
 
결혼은 언제 했나?

우리 할머니가 손자를 보고 죽겠다고 하셔서 내가 장가를 일찍 갔다. 스무 살에 장가를 갔는데 스물한 살에 군대 영장이 나왔다. 처음에 영장이 나왔을 때는 미루고 그 다음에 영장 나왔을 때는 군대를 갔다. 처가는 저 너머 흔암리 신 씨 네다. 그 전에 우리 동네에 보따리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가 중매를 해서 흔암리 사는 처자를 색시로 맞이했다. 우리 할머니와 중신재비 나 이렇게 셋이서 흔암리 처가로 찾아가서 선을 봤다. 8월인가 그랬다. 우리 장인어른이 고지식한 분인데 그래도 처음 나를 보고 마음에 드셨는지 허락을 해서 열아홉 색시를 얻어 결혼을 했다. 처가에도 식구가 많았다. 우리 안사람이 딸로는 셋째였는데 지금도 같이 살고 있다. 점심을 해줘서 마루에 앉아서 먹었다. 그 점심상을 색시가 들고 나왔는데 얼떨결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점심을 먹고 나서 어른들이 자리를 피해줘서 마루에 둘만 있었다. 내가 “나는 마음에 드는데 당신은 어떠냐”고 목에 힘을 주고 물었더니 싫지는 않은지 아무 말도 안했다. 옷을 쓸쓸하게(소박하게) 입은 색시가 수줍어하며 아무 말도 없이 마루에 앉아 있었다. 우리 할머니도 흔암리 색시를 보고 좋아하셨다. 그해 동짓달 열 엿세에 식을 올렸다. 우만동에서 가마를 타고 흔암동까지 가서 식을 올리고 그 가마에 색시를 태우고 왔다. 나는 가마 옆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떡하니 걸어왔다. 첫날밤은 우리 집 안방에서 보냈다. 

▲ 여주시 우만동 황원필 선생.     © 세종신문
 
슬하에 자녀는 몇 명인가?

우만동에서 4남매를 낳아 키웠다. 첫째가 딸인데 공무원 사위를 얻다보니 큰 사위가 처남들을 다 공무원 시험보라고 시켜서 아들 둘이 공무원을 하고 있다. 우리 큰아들은 내가 늘 마음에 걸린다. 서울에서 공고를 나와 사범대학에 합격을 했는데 내가 팔을 다쳐 큰아들이 대신 집안일을 해야 해서 사범대에 보내지 못했다. 그 후 큰아들이 KCC유리 공장에 다니다 저 매형이 공무원 시험 보라고 해서 공무원이 되었다. 우리 사위가 공무원 시험 보는 책도 사다주고 그랬다. 큰 아들을 처음에 사범대학에 못 보낸 것이 여지껏 마음에 걸린다.  
 
72년 대홍수 때는 피해가 컸나?

72년 홍수 때 그냥 물이 들어왔다.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강둑이 생겼지만 그 당시만 해도 강둑이 없고 그냥  마을에서 비스듬하게 내려가면 바로 강에 닿았다. 낮부터 물이 부쩍부쩍 늘드니 저녁 무렵에 물이 마을로 밀고 들어왔다. 집에 물이 들어 배로 짐을 실어 내 언덕위로 끌어 올렸다. 장마에 떠내려가는 집 지붕에 사람이 올라타고 앉아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지르고 그랬다. 부론 쪽 강가 마을이 작살이 났다. 목재를 묶어 만든 떼배들이 엄청나게 떠내려 왔다. (노인회 총무: 닭을 붙잡아 왔는데 전부다 도망가고 없었다. 저녁을 먹고 앉았는데 밑에 연길 네 집에 물이 드니까 연길 네가 돼지를 몰로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 집에는 물이 안들 줄 안고 우리 집에 돼지를 갔다 놨는데 우리 집도 물이 들어 그 돼지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우만이 나루터에 대해 들려 달라

장호원에서 마차로 곡식을 싣고 오면 우만이 나루터에서 배에 실어 서울로 날랐다. 우만리에서 장호원으로 가는 마차 길에 곡식을 실을 우마차가 빼곡하게 줄을 서 있었다. 나루터에는 술집은 물론 정육점도 있었다. 우리 누이 시집갈 때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갔다. 강천 쪽 사람들은 배로 건너 우만리 나루터로 와서 걸어서 여주 장을 갔다. 강 건너가 적금1리다.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강천으로 가서 나무도 해 오고 그랬다. 우만이나루 뱃사공은 원시동이라는 사람이 마지막 사공이었다. 그 양반이 원래는 강천에서 큰 짐배를 가지고 장에 다니던 사람이다. 그 당시는 나루터를 동네에서 관리를 했는데 우만이나루 사공을 하려면 마을에 돈을 얼마 내놓고 몇 년 동안 사공을 하고 그랬다. 그 사람도 입찰을 해서 우리 마을에 들어와 사공을 한 것이다. 뱃삯은 집집마다 여름에 겉보리 한 말, 가을에 나락 한 말 그랬다. 강천에 쪽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있는 집에서는 나룻배를 많이 이용하니까 겉보리와 나락을 좀 더 내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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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4/07 [17:36]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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