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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49] 농촌관광 최초 발상지 금사면 상호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4/02 [10:49]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금사면 상호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상호리의 유래

상호리는 예전에 웃범실 또는 상호곡(上虎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호리라고 하였다. 상호리는 산이 높고 험한 지역으로, 옛날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전해지며 수리 바위굴에서 호랑이가 나왔다고 하여 호곡(虎谷) 또는 범실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이곳은 1672년경에 신씨, 고씨, 민씨의 3성씨가 화전을 일구며 정착하여 현재에 이른다고 전한다. 상호리는 1970년 대 까지 금광이 유명했는데 금광 채굴 당시 만들었던 갱도 길이가 250m 가량 되었다고 한다.
 
상호리 금광

금사면은 사금이 섞인 금모래가 많아 사금업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금사(金沙)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지명유래담이 있다. 여주에 ‘황금광시대’의 흔적이 두 군데 남아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금사면 상호리 일대다. 상호리 금광의 이름은 ‘여수금산광산’이었다. 어떤 사람이 소유리 고개를 넘어 오다가 돌멩이에 오줌을 눴는데 그 돌멩이가 이상해서 보니까 금돌이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상호리에는 수직갱도 입구가 두 곳 있었는데 폐광이후 입구가 막히기 전까지는 갱도를 막아 저온저장고로 사용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상호리와 소유리 일대 금광이 일제강점기 한 때 남북한 통틀어 3위의 금광이었다고 기억한다. 상호리 금광이 활발했던 시기에는 광부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금광으로 인해 상호리는 도처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여주읍내보다 먼저 전기가 들어왔다. 서울의 유행이 곧바로 상호리로 유입되기도 했다. 나일론 옷을 여주에서 제일 먼저 입은 곳도 상호리고, 빨간 립스틱과 양장 차림이 여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곳도 상호리였다. 도지사가 여주에 순시를 오면 여주군수가 상호리로 모시고 와서 접대를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번성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상호리 금광은 1970년대에 폐광했다. 

▲ 상호리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 세종신문

상호리 느티나무
 
웃범실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3년 봄에 마을주민 고시학, 민병두, 신정균, 고규전 4인이 30년생 나무를 마을정자로 식수하였으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마을의 정자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은 상호리 마을회관 앞에 우뚝 서 여름에는 마을 주민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겨울이면 찬바람을 막아주며 수백 년 동안 상호리를 지키고 있다. 
 
전국 최초 팜스테이 마을

농협중앙회가 주관한 농촌체험브랜드 팜스테이(Farmstay)는 농가에서 숙식하면서 농사, 생활, 문화체험과 마을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농촌·문화·관광]이 결합된 농촌체험 관광 상품이다. 팜스테이는 1990년대 중후반 주5일제에 따른 여가수요가 증가하고 시민들의 안전한 먹거리 및 가족단위 체험관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농업인들의 농외소득 창출과 농업·농촌에 대한 도시민들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에 상호리는 팜스테이를 전국 최초로 시작한 마을이다. 팜스테이 1호, 녹색농촌체험마을 1호가 상호리다. 상호리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보존과 푸른 숲 가꾸기 1호로 산자락에 푹 파묻혀 외부와 단절된 듯한 적막감과 원시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공기로 상쾌한 기운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전통방식 그대로 맷돌에 콩을 갈아 가마솥에 불을 때 손두부를 직접 만들고 찹쌀을 시루에 쪄서 인절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농촌체험관광이 많이 소원해졌지만 상호리는 농촌체험에 숲길걷기와 산나물 채취를 할 수 있는 산촌체험을 결합한 새로운 관광 상품을 준비 중에 있다.  

▲ 농촌관광 최초 발상지 기념탑.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권혁진(78) 선생

어린 시절 상호리에서의 삶은 어떠했나?

나는 1943년에 하오리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상호리로 이사 왔다. 초등학교는 처음에 이포초등학교를 다녔다. 산길로 6km가 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시작할 때 6.25 전쟁이 났다. 6.25전쟁이 끝나고 이포초등학교 하호분교가 생겨 다시 학교에 들어갔다. 상호리에 인구가 많아서 하호리에 이포초등학교 분교가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하호리 파평 윤씨 기와집 건너편에 초가집을 지어 그 안에서 공부를 했다. 땅바닥에 멍석을 깔고 앉아 공부를 했다. 1,2,3학년 한 귀퉁이, 4,5,6학년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공부를 했는데 선생님 한 명이 1,2,3학년 가르치다 4,5,6학년 가르치고 그랬다. 내가 하호초등학교 마이너스 1회 졸업생이다. 우리 누나들은 나이가 두 살, 네 살 많은데 학교를 나보다 다 늦게 들어가 이포초등학교 후배들이다. 중학교부터는 서울로 가서 중·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나왔다. 

▲ 상호리 권혁진 선생.     © 세종신문

한국전쟁을 상호리에서 겪었나?
 
이포초등학교 다니다가 6.25가 났다. 학교까지 산길로 한 15리 이상 된다. 그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방학책을 나눠주면서 전쟁이 났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라고 그랬다.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은 전쟁이 났는지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전쟁이 났다고 하니 가족들이 다 마을 앞산 숲속에 숨어서 이틀 밤을 보냈다. 남동생이 하도 울어서 도저히 있을 수 없어서 ‘에이 모르겠다. 죽으면 죽었지’하며 내려왔다. 인민군이 마을까지 왔었다. 이듬해 1.4후퇴 때는 장흥리 외가 집으로 피난을 갔다. 중공군이 장흥리 까지 왔는데 중공군이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도 고향에 나 같은 어린 자식이 있다고 하며 만두를 하나 줬다. 인민군이 오면 인민군하고 놀고, 중공군이 오면 중공군 하고 놀고, 미군이 오면 미군하고 놀고 그랬다. 미군하고 있을 때는 그 사람들 보급이 어마어마하게 좋았다. 장흥리가 미군 포병 본부였는데 전투식량 봉투를 많이 얻어먹었다. 

광산에 대한 기억은 어떤 것이 있나?
 
여기 광산이 조선시대 말에 남북 모두 합해서 4대 금광에 들어갔던 곳이다. 70년 때 까지만 해도 광산이 굉장했다. 60년대에는 상호리 가구 수가 300호에 인구가 천명이 넘었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막 모여 들었다. 평안도, 함경도, 전라도, 경상도 사람들이 다 모였다. 그 당시 마을 군데군데에 집이 있었다. 지금 밭으로 사용하는 곳이 다 그 당시 집터라고 보면 된다. 상호리에 함흥냉면집, 평양냉면집도 이었다. 그 당시 광부들은 안전조치가 잘 안되어서 죽는 일이 많았다. 노동법 뭐 이런 것도 없으니까 일하다 죽으면 그냥 자기가 운이 없어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 막 썼다. 회사도 수익이 많으니까 마카오 제 양복도 그냥 해주고 그랬다. 우리 집 앞마당이 당시 금광 자체 발전소 자리였다. 이포 장도 여기 때문에 잘 되었다. 장날이면 상호리에 거주하는 천 여 명의 사람들이 이포 장으로 쏟아져 나갔다.

▲ 탄광 탄약고를 개조해 사용하고 있는 권혁진 선생 집.     © 세종신문
 
언제 다시 상호리로 들어왔나?

우리 어머니는 기성복 보따리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나일론, 골덴, 우단, 양단 이런 거로 만든 기성복을 서울에서 떼어와 이고 다니며 팔았다. 옷값을 외상으로 가져가면 가을에 추수를 해서 쌀로 받고 그랬다. 우리 어머니가 상호리에 있는 땅 3천 평을 2만원에 팔아서 서울 금호동 산꼭대기에 무허가 집을 지었다. 얼마 후 앞집이 집을 높게 지어 우리 집을 가려 답답해서 그 집을 팔아버리고 다시 한양대학교 앞 응봉동에 무허가 집을 지어 거기서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잠실에서 타일사업을 했다. 80년대 건설 붐을 타고 타일사업이 대박이 났다. 그렇게 돈을 벌었다가 93년에 여기에 내려왔다. 예전부터 있던 광산 화약고 건물을 활용해서 2층에 둥그렇게 집을 지어 주말마다 내려와 쉬었다 가고 그랬다. 여기 왔다 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93년에 아주 내려왔다. 공기도 좋고 마음도 편하고 상호리는 나랑 딱 맞았다. 
 
팜스테이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내가 여기서 팜스테이를 농협중앙회와 맨 처음 시작했다. 98년 10월경에 팜스테이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그 당시 국회에서도 외래어를 쓴다고 말이 많았다. 내가 이미 박용국 군수 때부터 팜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상호주록민박마을’을 시작했다. 그게 신문에 났다. 농협중앙회에서 그 신문을 보고 좋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해서 나를 찾아왔다. 농협중앙회와 협의를 해서 99년도에 ‘팜스테이전국협의회’를 정식으로 발족을 했다. 그 때 내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 당시만 해도 도시 사람들이 농촌에서 체험하고 숙박하고 농산물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관광 상품이 획기적이었다. 가족 단위, 회사단위, 학교단위로 찾아 왔다. 농협중앙회에서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홍보를 해주고 도시 사람들이 신청을 하고 예약을 한 후 찾아왔다. 일산, 안산, 인천 등지의 신도시 사람들이 많이 왔다. 그 후 농림부에서 ‘녹색농촌체험마을’ 시범마을을 여기서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 때다. 전국에 농촌관광이 많이 생겨서 ‘사단법인 한국농촌관광경영인엽합회’를 만들었다. 그 다음에 2006년도에 농촌진흥청에서 ‘전국마을리더협의회’를 만들었는데 그것도 내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한 10년 정도 농촌체험이 흥행하다 점점 쇠락하고 지금은 코로나로 매우 어려운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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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4/02 [10:49]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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