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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48] 남한강을 낀 여흥 민씨 집성촌 점동면 도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3/18 [13:23]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점동면 도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도리의 유래

도리는 본래 여주군 점량면 지역으로 조선시대 여주읍 신진역에서 우만리를 지나 흔바위(흔암리)에서 한강을 끼고 올라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돌아서 안평을 거쳐 충청도 앙성면으로 가는 큰길이 있으므로 도래, 되래 또는 도리, 도호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사장고을과 병합하여 도리라해서 점동면에 편입시켰다. 점동면 장안리의 지금 승안리 마을 서편에 도호동 마을이 있었는데 남한강에 수운이 발달하면서 강변 쪽의 생활이 편리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도호동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며 큰 마을(큰말)을 이루게 되어다는 뜻에서 도래(桃來)가 되고 이것이 되래로 발음된 것이며 이후 행정리로 도리가 된 것이다. 또한 옛날부터 여러 차례의 난리가 있을 때마다 마을이 안전하여 환란을 모면하였다는 뜻에서 되래라 불렀다 하며,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되래에 침략했다가 소무산 아홉사리 둘째 고개에서 말이 떨어져 공격을 못했다고 해서 도리라 하였다 한다.

자연마을로는 되래, 큰말, 새말, 사장골이 있다. 되래는 범선이 정박하던 곳으로 곡물이 이곳을 통하여 서울로 가고 소금, 생선 등이 이곳을 통하여 중부 내륙지방으로 유통되어 흔바위와 함께 상당히 번창했던 마을이다. 강변을 통하여 흔바위로 연결되는 아홉사리라 불리는 오솔길이 있어서 서울과 충주지방으로 이동하는데 요긴한 통로의 역할을 하였으며 되래의 동쪽으로 중군이봉 산자락이 강변에 절벽을 이루며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낸다. 큰말은 되래 남쪽에 있는 큰 마을로 남한강 수운으로 번창하였으므로 큰말이라고 불렀다. 새말(새마을)은 큰말에서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져 있는데, 1972년의 홍수로 피해를 입은 강변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켜서 형성된 마을이다. 사장골은 남한강으로부터 티끌과 같은 많은 모래가 쌓여진 곳에 부락이 형성되어 사장곡이라 하였으나 구전되는 과정에서 사장고을이 사장골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 남한강을 내려다 보고 있는 도리 민씨 선산.     © 세종신문
  
도리의 터줏대감 여흥 민씨

여흥 민씨는 여주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이다. 고려 인종조에 동중서시랑평장사를 역임한 민영모의 증조부 민칭도를 시조로 한다. 민칭도가 공자의 10제자 가운데 하나이자 노나라의 학자인 민자건의 후손이며,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하였다는 설과 영월루 마암굴(민굴)에서 나온 것이 여흥 민씨의 시초라는 설도 있다. 민영모의 장남 민식은 고려 명종 때 과거 급제 후 형부상서를 지냈으며, 차남 민공규는 판병부사와 태자소보를 지냈다. 그 둘의 후손들이 다수의 고위 관료를 지속적으로 배출함으로써 여흥 민씨가 고려 후기에 본격적으로 명문세족으로 성장하였다. 대체로 문반직을 역임하며 문반 사대부 가문으로서 위상을 갖추었으며, 왕실과 혼인이 가능한 재상지종 가문 중 하나로 꼽혔다. 민식의 증손 민지가 고려 원종 7년(1266년)에 문과에 올라 추성수정성보리공신이 되고 여흥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여흥으로 삼았다. 그 이전에는 황려 민씨라고 불리었는데, 황려는 여흥의 옛 이름이다. 

▲ 도리에 있는 민씨 종가.     © 세종신문

조선시대​에 민영모의 차남 민공규 증손 민종유의 장자 민적의 3자 민변-민제(문도공파)로 이어지는 가계는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조선 전기에서 여흥 민씨 가문 가운데 가장 명문으로 여겨진다. 민제는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었고 그의 딸이 원경왕후 민씨다. 태종의 즉위로 인해 왕실의 외척가문으로서 가문의 위상이 급부상하였다. 도리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원경왕후의 5촌 당숙인 지돈령공파 후손들이다. 이들은 600여 년 전 가남읍 안금리에서 도리로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60~70년대 마을에 6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는데 그 중 60호 여흥 민씨였고 나머지 대여섯 가구도 여흥 민씨와 관계가 있는 타성들이었다. 

아홉사리 과것길과 신선바위
 
아홉사리 과것길은 도리와 흔암리를 연결하는 강변의 오솔길로 길이 좁고 험하며 아홉 구비를 굽이굽이 돌아다닌다 하여 아홉사리라 하였다. 경상도, 충청도에서 서울을 왕래할 때 이용하던 길이며 예전에는 빈번한 통로였지만 지금은 일상적인 왕래는 거의 없고 여강길 코스로 탐방객들이 다니고 있다. 신선바위는 도리 남동쪽에 위치한 중군이봉에서 남한강변으로 흘러내린 곳 강변에 있는 바위인데 이곳은 남한강과 청미천이 합수(合水)되는 지점이다. 신선바위는 도리섬을 끼고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데 남한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히고 있다.
 
도리 나루터

도리 나루터는 범선이 정박하던 곳으로 곡물이 이곳을 통하여 서울로 가고 소금, 생선 등이 이곳을 통하여 중부 내륙지방으로 유통되었다. 도리주민들은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여주까지 갔다. 물길을 따라 여주로 간 배가 돌아 올 때는 사공들이 끌고 오는데 배에 돛이 있어서 바람이 부는 날은 좀 수월했다. 배를 여주에서 강변을 따라 끌고 올 때는 한 사람이 앞에서 끌고 나머지 한 사람은 삿대를 강둑 쪽으로 고여 배가 강둑으로 쏠리지 않고 바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강천섬 중간쯤에 여울이 있었는데 밤에 여울에서 나는 소리가 우왕~우왕하며 소리가 정말 컸다. 여울이 생기는 이유는 그 바닥 밑이 큰 바위라서 패이지 않는 것이다.

▲ 옛 도리나루터 자리.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민영권(68) 선생

도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나? 

1954년에 도리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에 막내다. 우리 아버지는 농부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신설동 로터리에서 한의사를 하셨다. 60년에 초등학교 입학하고 66년도에 졸업했다. 초등학교는 안평국민학교를 나왔다. 여기서 3km정도 된다. 18회 졸업생이다. 2005년에 폐교되었다. 66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도리에 안평초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108명이었다. 안평초등학교 전교생이 300명이었다. 중학교는 점동중학교를 다녔다. 여기서 7km정도 되는데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학교 앞에 호떡이 5원이고 국화빵이 1원인데 그걸 사먹고 그랬다.  
 
도리는 어떤 마을인가?

도리는 여흥 민 씨 집성촌이다. 이 일대의 산이고 들이고 다 민 씨 땅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60년대에 큰말, 새말, 사장골까지 오밀조밀하게 살았다. 새우젓 장사, 독장사 이런 사람들이 지게를 지고 마을에 찾아왔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아홉사리 고개 앞에 주막이 있었다. 충주에서 내려온 뗏목이 도리 나루터에서 쉬어가고 그랬다. 전기는 76년에 들어왔다. 법정리, 행정리를 따지면 근방에서는 도리가 제일 크다. 60년대 말부터 누에고치를 많이 했다. 여주군에서 뽕나무 모종을 보급하는 사람이 일곱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이 여기 도리였다. 마을에 홰나무가 아 큰 것이 있었는데 우리 집안 장손이 그 나무를 베어 버렸는데 그 후로 어려워졌다는 말이 있다. 흔암리에도 홰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거보다 더 크고 오래된 나무였다. 어려서 라디오가 하나 있는데 소리가 잘 안 나오면 홰나무 끝에 안테나를 달아 라디오를 듣고 그랬다. 

▲ 점동면 도리 민영권 선생.     © 세종신문

도리에서 계속 살았나?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냥 친구들이랑 어울려 돌아다니다 76년에 군대를 갔다. 젊어서는 그냥 한량처럼 살았다. (노인회장 : 지금은 양반이 되었다. 민 씨네가 원래 양반인데 이 사람은 나이 들어 양반이 된 거다. 허허허)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다 스물여덟에 서울에서 결혼을 했다. 결혼하고 나서 1986년에 도리에 다시 들어왔다. 우리 집사람은 서울 금호동이 집이었다. 도리로 다시 오게 된 것은 내가 남 밑에서 일할 사람이 못되니까 고향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내려왔다. 우리 집사람도 그 당시 속마음은 모르지만 기꺼이 왔다. 포철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는데 남 밑에서 일하는 게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았다. 내가 내려왔을 때만 해도 아버님 어머님이 도리에 계셨다. 서른넷에 내려와 서른일곱에 마을 이장을 봤다. 여기 도리에서 딸 아들 둘 낳아서 다 키워 출가시켰다. 
 
도리나루터에 대한 추억이 있나? 

여기 나루터를 ‘연자방아 터’라고 불렀다. 그 옆에 색시집도 있었다. 여주 장에 갈 때는 나룻배를 타고 여주나루까지 갔다가 돌아 올 때는 흔암리로 해서 아홉사리 고개를 넘어 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곤충채집하려고 알코올을 사러간다고 여주까지 갔다가 장터에서 자장면 한 그릇 먹고 왔는데 그 맛이 얼마나 기가 막혔던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강변의 모래사장이 명사십리와 같은데 여름에는 정말 뜨거웠다. 강 건너 강천리에 강천나루가 있었는데 도리에서 그쪽으로 건너다니기도 했다. 67년도까지 뱃사공이 있었다. 도리나루터의 마지막 사공들이 차신용, 이재호 씨다. 나룻배는 항상 둘이서 운영을 해야 한다. 사람이 스물 댓 명 타고 곡물을 다 싣고 여주 장을 다녔다. 그 당시 우리는 강천섬을 ‘문득섬’이라고 불렀다. 도리와 문득섬 사이가 물이 벙벙했는데 여름이면 늘 그 곳에서 멱 감고 그랬다. 우리는 수영하면 물개처럼 놀았다. 깊이가 어른 한질 반 정도 되었다. 강에서는 만낙을 놔서 고기를 잡았다. 주낙이라고도 한다. 미끼는 지렁이인데 뱀장어가 제일 많이 잡혔고 솥뚜껑만한 자라도 잡혔다. 뱀장어나 자라를 사람들이 못 먹었다. 기름기가 많아 먹으면 설사를 해서 다 버렸다. 잉어를 최고로 쳤다. 잉어는 설사도 안하고 맛이 좋았다. 도리는 남한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도리 사람들은 남한강과 함께 수백 년, 수천 년을 마을을 가꾸고 일구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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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18 [13:23]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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