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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47] 호국영령의 뜻 기리는 가남읍 금당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3/11 [16:01]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가남읍 금당1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금당리의 유래

금당리는 본래 여주군 근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대동, 송당동 등을 병합하여 김대동의 김(金)자와 송당동의 당(塘)자를 따서 금당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 금당1리를 김대, 금당2리를 송당동 또는 소댕이라 한다.

금당1리인 김대마을은 먼 옛날 이곳에 금전팔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금을 몰래 거래한 장소가 근처 연대산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금전팔이의 금(金)자와 연대산의 대(垈)자를 따서 김대라 불리었다고 한다. 옛 이름으로 금대동(金垈洞)이라고도 한다.

금당2리는 소댕이(조촌동)이라 불렀는데 옛날 물무재 너머에 백천 조씨가 터를 잡았다하여 조촌동이라 불러오다가 해방 이후 송당들이란 부락 앞들 이름을 따서 송당동이라 하였다. 송당동이 변음 되어 소댕이라 하였다 한다. 야산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도 된다고 한다. 안강골은 조선 효종 때 금당2리에서 금당1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조촌동이라는 부락 안으로 조씨와 송씨 몇 호가 터를 잡고 편안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곳을 안강골이라 하였다 한다. 떡밭댕이는 금당2리에서 서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으로, 옛날에 대포산, 철갑산, 갱금산 등 고산에서 전쟁을 하다 승리하고 나서, 이곳에서 떡을 해 먹었는데 떡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떡쌀을 씻은 물이 흘러 점동면 청미천까지 탁하게 흘러서 ‘떡바뎅이’라 불렀다고 한다. 6·25 전쟁 때 난리를 피해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잠시 피난민 수용소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한다. 학교모탱이는 금당2리 서쪽 모퉁이에 금당초등학교 전신인 금당간이학교가 있었다하여 학교모퉁이라 하는데 지금은 금당1리에 금당초등학교가 건립돼 있다.
 
금당리 선돌 

조선시대 태종의 부마가 덕실(점동면 덕평리)에 살았는데, 어느 날 강금산에 올라가 이곳에서 내 눈에 보이는 땅을 다 소유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사람을 시켜 그 뜻을 임금에게 고했다. 임금은 “그래 어디까지 보이더냐”고 묻자, “남대문 턱이 보일 듯 말 듯하다”고 아뢰었다고 한다. 이에 임금은 차마 부마를 처벌할 수 없어 심부름 온 사람을 가두고 신하들을 시켜 강금산을 정찰하게 한 후 강금산으로부터 사방 10리 경계표시인 선돌을 세우고 그 안에 있는 토지를 부마에게 주었다고 한다. 

▲ 가남읍 금당리 마을빨래터.     © 세종신문

금당리 빨래터

금당리 빨래터는 빨래도 하고 옛날에 우물이 없을 때는 그 물을 길어다 먹고 그랬다. 빨래터 위쪽 물은 먹고 아래에서는 빨래를 했다. 빨래터 위에 샘이 있어 연중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데 2002년도 경지정리하면서 빨래터를 없애자는 말도 있었지만 샘물을 끌어와 관을 묻고 그 위로 경지정리를 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문화예술 공모를 통해 벽화마을로 선정되어 빨래터를 비롯한 마을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빨래터 물의 근원인 샘 위쪽으로 농장이 두 곳이나 들어와 물이 오염되었다고 주민들은 여기고 있다. 

▲ 호국영령비.     © 세종신문

금당리 호국영령비

6.25때 첨전 해 전사한 마을청년 다섯 명을 기리기 위해 1991년에 금당리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호국영령비를 세워 해마다 현충일에 기념하고 있다. 참전 용사들은 육군하사 조수증 22세 48년 장단늘목 전사, 육군일병 조영섭 23세 50년 개성전투 전사, 육군 이병 조영섭 25세 51년 횡성전투 전사, 육국일병 조문증 28세 51년 횡성전투 전사, 안임술 횡성전투 전사로 비에 기록되어 있다. 

기념비 뒷면에는 [금당리 마을 젊은 영웅들이여 조국이기에 하나뿐인 오직 하나뿐인 조국이기에 그 목숨 초개처림 기꺼이 바쳤으리 조상대대 밭 갈고 논 갈아 사랑으로 정성으로 후손들 갈구어 온 갈구어 갈 터전이기에 귀한 영혼 심지삼아 불살랐으리 예부터 산수 수려하고 인재 많아 우러르는 선비골 금당마을 넘치는 그대들 푸른정기 금수강산 지키셨나니 장하다 아 장하다 그 충정 그 뜻 영세무궁 빛나리니 만세 만만세 금당마을 젊은 영웅들이여 1991. 6. 6. 설곡 김찬식 짓고 즉사 박중식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 금당초등학교.     © 세종신문

금당초등학교
 
금당초등학교는 1936년 4월 금당2리 소댕이에서 금당간이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고, 1941년 8월 금당국민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같은 해 12월 개교하였다. 1981년 3월 10일 병설 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96년 3월 금당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교훈은 바르고 부지런하게, 교목은 향나무, 교화는 개나리다. 교육목표는 기본생활을 익혀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어린이, 스스로 공부하고 생각하며 창의력이 풍부한 어린이, 슬기로운 생각으로 새롭게 탐구하는 어린이, 질서를 존중하고 자율적이며 서로 돕는 어린이, 보건위생교육 강화로 몸과 마음이 튼튼한 어린이를 육성하는 것이다. 특히 교육비전을 ‘세종의 얼을 담아 내 마음의 항복 나침반을 그리는 생생지락 교육’으로 하고 세종의 얼을 새 시대 청소년들이 깨닫고 계승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교육철학은 공동체의 자발성이 발현되는 민주학교, 교육공동체 모두가 동반성장하는 행복학교를 추구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집현전 교육과정, 공감과 여백이 살아있는 학교 문화 혁신학교를 중점교육으로 하고 있다. 

[마을人터뷰] 윤영주(78) 선생

금당리에 터를 잡고 산 지 얼마나 되었나?

나는 1944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6.25때 까지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전쟁 통에 어머니 고향으로 피난 왔다가 여기서 살게 되었다. 일곱 살 때 내려왔다. 피난 다닐 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아버지는 휴전선 안에 있는 연천 옆 장단이 고향이셨다. 아버지는 거기 계시다가 3.8선이 막히기 전에 조부께서 가족들을 다 데리고 서울로 내려왔다. 외가도 금당리에서 사시다가 우리 어머니 열 몇 살 때 서울로 이사를 갔다가 서울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만나서 결혼을 하셨다. 전쟁 당시 아버지는 서울까지 인민군이 내려오니까 먼저 부산 쪽으로 피난을 가셨고 1.4 후퇴 때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피난을 내려왔다. 

▲ 가남읍 금당리 윤영주 선생.     © 세종신문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들이 많을 것 같다

전쟁 때 우리 집이 용산 대로변 옆에 있었다. 가게가 있고 그 뒤에 살림집에서 살았다. 인민군이 막 쳐내려 왔을 때는 우리는 피난 갈 시간이 없어 피난을 못 갔다. 먹고 살 것이 없어서 가게에서 부침개 부치고 하면서 살았다. 하룻저녁은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했다. 폭격이 계속되니까 할 수 없이 1.4후퇴 때 피난을 내려왔다. 충주까지 피난을 갔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고 한두 달 후에 전쟁이 났다. 여덟 살 위에 누나가 한 명 있었고 내 밑에 5살 남동생이 있고 그 밑에 돌 지난 막내 남동생이 있었다. 피난 갈 때 누나가 이불보따리를 매고 가다가 내 밑에 동생이 힘들다고 하면 이불보따리 위로 업고 가고 그랬다. 어머니는 막내 동생 없고 살림 이고 그렇게 갔다. 그렇게 걸어서 충주까지 갔다. 충주에서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동생이 독감에 걸렸는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꽁꽁 언 산 언덕에 동생을 묻었다. 땅이 얼어 깊이 팔수가 없어서 여우나 산짐승들이 무덤을 못 파게 나무를 휘어서 무덤을 둘렀던 기억이 난다. 우리 어머니 더 이상 피난을 갈 수 없다고 생각하시 죽든 살든 고향으로 가자 그래가지고 여기 금당리로 왔다. 
 
금당리에 외가 식구들이 있었나?

금당리에 외가 식구들은 없고 어머니 4촌들이 많이 있었다. 금당리에 와서 전쟁이 끝나고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전쟁이 끝나고 다시 아홉 살에 금당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다. 금당초등학교 13회 졸업생이다. 금당초등학교 졸업하고 외삼촌이 서울 마포에 살고 계셔서 외삼촌댁에서 살면서 중학교를 다니고 자동차 관련 일을 하는 외삼촌 집에서 일하고 그랬다. 중학교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외삼촌 차동차 용품 가게에서 일을 했다. 군대 갔다 와서 결혼하고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누가 돌볼 사람도 없고 해서 내려왔다. 고향에 내려올 때 내가 외삼촌 가게 일을 많이 봐 준 대가로 여기 금당리에 땅을 사줘서 농사 지으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나도 금당리에서 2남 1녀를 다 키웠다. 큰애는 서울에서 임신한 상태에서 금당리로 내려와 여기서 낳았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 정도 되었다. 
 
주로 어떤 작물을 재배 했나?

논2천 평, 밭2천 평으로 농사를 지었다. 80년대부터는 밭 500평 정도에 하우스 농사를 지었다. 오이, 가지, 수박, 고추 이런 거를 재배했다. 하우스와 노지를 같이 활용해 밭농사를 많이 지었다. 그 당시는 농산물 가격이 괜찮았다. 마을에서 뜻 맞는 사람 몇이서 하우스 농사를 시작했다. 마을 이장도 몇 번 봤다. 
 
금당리는 살기가 어떤가?

살기 좋은 금당리 마을을 보존하려면 개발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마을에도 상수원 위로 농장이 들어와서 냄새도 많이 나고 하천 물도 오염되고 그렇다. 지난 1월에는 수종 개량 한다고 하면서 마을 뒷산 나무를 싹 다 베어냈다. 그런 거를 하면 행정기관에서 마을에 통보라도 해 주던지 그래야 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다 베어버렸다. 이장도 몰랐다고 하더라. 어느 날 갑자기 수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들을 다 베어 버렸다. 어떻게 되어서 이렇게 했고 수종은 뭐를 심으려고 하는 지 주민들에게 다 알려야 하는데 그런 게 아무것도 없다. 자연은 가급적 있는 그대로 잘 보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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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11 [16:01]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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