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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 107 - 설마 그렇게까지야
 
김태균   기사입력  2021/03/11 [12:07]
▲ 세종신문 김태균 대표     
어느 시대에나 부패한 관리는 있게 마련이다.
최고 책임자의 신임을 받는 사람은 이 유혹에 빠지기가 쉽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권력을 이용하려고 다가오며 다양한 이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세종시대에도 여러 명이 부패문제로 곤욕을 치르거나 직이 해제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변계량이나 조말생 같은 경우다. 그런데 아직 태종이 살아있고 세종의 집권이 3년차인 초기에 김점이 심각한 부패문제로 고발당하게 된다. 
김점은 형조와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딸이 태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으로 들어간 숙공궁주이다. 때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벌어진 일을 고발한 것인데 사관은 꼼꼼하게 적어 두었다. 
세종3년 10월의 일이다.
 
처음에 김점(金漸)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장사하는 사람 최오을마대(崔吾乙麽大)를 따르는 사람으로 삼아서, 자기의 침실 안에 드나들게 하여 널리 뇌물을 받아들였는데, 주(州)·군(郡)에서 거둬들여 벼슬도 팔고 옥사(獄事)도 잘 봐준다고 팔았으며, 평양(平壤) 토관(土官)을 내는 데나 보충하는 것은, 모두 바치는 재물의 많고 적은 것으로 먼저 시키고 뒤에 시키게 되었고, 허다한 죄수들에게 뇌물 바치기를 요구하였고, 북경에 갔다 돌아오는 사신의 행차에 장사하는 자가 따라갔다 오는 때이면, 여러 가지로 위협 공갈하여 흠뻑 뇌물을 받은 뒤에 보내게 되었다. 
윤자당(尹子當)이 돌아올 때에, 점이 가산관(嘉山館)에서 만나게 되어 서로 작별하고 나서, 점(漸)이 싣고 온 물건이 너무 지나치게 많다고 트집하여, 그의 수행한 사람 권법이(權法伊) 등을 구금하니, 법이 등이 채단(綵緞) 두어 필과 노감석(奴甘石) 몇 근을 주고서 겨우 풀려서 오게 되었고, 정탁(鄭擢)이 돌아올 때에도, 점이 길에서 만나서 그를 따라온 강실(姜實)을 위협하면서 말하기를,
“너의 짐바리가 너무 무거우니, 역리(驛吏)를 시켜 그 경중을 저울질한 뒤에 보낸다.”
하므로, 실이 두려워하여 밤에 피물과 채단을 가져다주니, 그제야 점이 놓아주었다. 
또 관아사람에게 진상(進上)한다고 채단 좋은 것을 구해 오라 하여, 좋은 물건을 얻어서 바쳤으나, 점이 좋지 못하였다고 핑계하여 받지 아니하고, 자기 관아에 있는 채단을 다른 사람의 물건으로 가장하여, 그 값으로 면주(緜紬) 30여 필을 내게 하여 관아로 받아들였고, 평양(平壤)에 사는 통역사로서 요동(遼東)에 내왕하는 자에게 강제로 굵은 베를 주고 귀중한 물화를 강취하며, 감영의 창고를 자기 거처하는 관아의 안쪽에 옮겨 놓고, 자기 사람을 시켜 출납을 맡게 하고, 피장(皮張)이나 경화(經貨)는 가만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니, 이와 같은 농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갈려서 돌아올 때에, 짐바리가 1백 50여 바리나 되어, 나누어 세 차례로 운반하는데 한길에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이어져, 보는 이가 놀랄 정도이었다. 
마침, 사직(司直) 김유간(金由諫)이 평양에 근친갔다가 이웃 사람 이희간(李希幹)·이수지(李秀之)와 만나서 말하다가, 점(漸)의 탐욕의 비행을 자세히 듣고서, 유간이 서울에 돌아와 이원(李原)을 보고 대강 그의 일을 한두 가지만 말하였더니, 이날에 이르러서, 원이 조용히 계하면서 유간(由諫)으로 증인을 삼았다. 
또 전라도 관찰사 장윤화(張允和)가 청렴치 못하다는 이름이 있다고 계하니, 태상왕이 병조(兵曹)와 대언사(代言司)에 이르기를,
“관찰사로서 공렴치 못하였다는 이름이 있어도, 너희들은 어찌하여 주계(奏啓)하지 아니하였는가.”
하니, 조말생이 대답하기를,
“조금이라도 들은 것이 있다면, 어찌 감히 계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유간을 불러 병조와 대언사를 시켜 묻게 하니, 유간이 실지대로 계달하지 않으므로,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라 명하였으나, 태상왕은 자못 점의 한 일이 그렇게까지는 아니하였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3년 10월10일)
 
김점은 말이 많은 사람이다. 연구자들이 종종 '김나불‘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핀잔하던 인물이다.
그가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저지른 일이 가히 만만치 않은 토색질이었기에 태종은 ‘그렇게 까지는 아니 하였으리라’고 여긴 것이다. 역시 몇일 뒤에 이 사건을 가지고 옥석을 가려보자는 취지로 태종과 신하들 간에 대화를 나눈다.
 
태상왕이 이명덕·김익정에 명하여 이원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지난번에 의정(議政) 등이 김점의 탐장질한 죄를 말해 준 것은,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바이다. 점이 만일 이와 같다면, 반드시 징습(懲習)하여 선비의 풍습을 면려케 할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또한 변명하라 하여, 오욕된 이름을 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이 말하기를,
“점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김유간만이 아니라, 신의 집에 와서 말하는 자가 하나 둘이 아니외다.”
하였다. 태상왕이 명덕을 시켜,
“그 말한 자가 누구냐.”
고 물으니, 원이 말하기를,
“신이 잊어서 바로 계(啓)할 수 없으니, 청컨대, 생각해서 계(啓)하겠나이다.”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계(啓)하기를,
“점이 청렴하지 못함을 말한 자는 바로 신의 질녀서(姪女壻) 이종선(李種善)이외다. 신이 이리저리 생각하여 이제야 기억되었나이다.” 하였다.(3년 10월 15일)
 
태종은 총애하던 후궁 김점의 딸 숙공궁주를 내보낸다. 깊은 혐의를 갖고 있으니 '공정한 의와 사정의 은(恩)‘ 두가지가 서로 충돌하여 공정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또한 호군으로 근무하던 김점의 아들을 불러 궁주와 함께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상황이 어찌될지 몰라 주변정리를 한 것이다. 태종은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사람이다.
결국 의금부 도사가 김점을 붙잡아서 국문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김점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세종은 김점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고 더이상의 죄는 묻지 않았다. 그의 집안이 4대째 조정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는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세종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이면을 배우는 반면교사역을 보게 된다.
 
정사를 보았다. 여러 신하가 물러간 뒤에, 임금이 대언(代言)들과 김점의 청렴하지 못하다는 사건을 의논하면서 이르기를,
“점이 평시에 남의 과실 말하기를 좋아하여, 바르다는 이름을 들었으므로, 나는 그릇 누명을 썼나보다 하였더니, 이제야 그의 실지를 숨기지 못할 줄을 알았다.”
하였다.(3년 10월 20일)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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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11 [12:07]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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