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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46] 길게 뻗은 천과 넓은 들을 낀 흥천면 효지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3/04 [14:05]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흥천면 효지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효지리의 유래

효지리는 본래 여주군 길천면의 지역으로, 효자 김고길의 이야기가 전해져 효자동 또는 효자, 효지(孝池), 소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효자동과 억교동을 합하여 효지리라 했다. 자연마을로는 억다리와 효지가 있다. 

억다리는 억교동이라고도 부르는데 효지리의 으뜸 되는 마을이다. 억다리는 흥천면소재지로 효지1리 앞에 흐르는 복하천에 있는 다리를 ‘억억다리’라 하고 이 다리 주변으로 마을이 생겼는데 다리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억다리’로 불렀다. 

효지는 지금의 효지2리로 조선 현종 때 마을에 노부모를 모시고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20대 젊은 청년이 살았는데 아버지가 수년간 병환으로 누워계셨다. 청년은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를 봉양하였으나 병세에 차도가 없던 차에 하루는 아버지가 물고기를 먹고 싶다 했다. 청년은 엄동설한에 지금의 효지저수지에 와서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으려했으나 잡히지 않아 밤을 새웠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 하늘이 훤하게 밝아오면서 잉어가 하늘에서 떨어져 그 잉어로 아버님의 병환을 낫게 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부락민이 효자비를 세우고 마을 이름도 효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여주시 흥천면 효지리를 지나는 복하천.     © 세종신문

복하천
 
복하천은 경기도 용인시의 양지면에서 발원하여 이천과 흥천면 효지리를 지나 계신리에서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한강의 제1지류이다. 복하천은 국가하천과 지방2급하천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용인시 양지면에서 원두천이 합류하는 이천시 호법면까지는 지방2급하천이고 호법에서부터 한강까지는 국가하천이다. 『성종실록』에 “대가가 출발하여 이천의 복하천 가에서 주정하고, 저녁에는 여주 강가 파오달에서 머물렀다.”고 하는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천도호부 편에 “복하천은 여주 관할 하에 있는 천령현 앞을 경유하여 이포진으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고 『해동지도』, 『여지도』, 『조선지도』에서도 이포나루(이포진)에서 한강에 합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복하천에 억교라는 교량이 표시되어 있는데 『여지도서』에는 억억교로, 『1872년지방지도』에는 복하천교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배들이 이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실으러 남한강을 통하여 드나들었지만, 지금은 수량이 줄고 복하천 바닥이 높아져 운행하지 못한다. 

매봉산 산신재

효지2리에서는 매년 10월 상달에 매봉산 정상에 있는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지내왔다. 효지2리의 산신제는 서낭제와 함께 지낸다. 음력 9월 그믐날 마을의 유지들이 모여 10월 초 5일 안에 제를 올리는 날(제일)을 결정한다. 과거에는 제일이 정해지면 마을에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마을에 들어온 사람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또한 제일이 결정되고 난 후에 동리에 상(喪)이 나거나 출산을 하는 이가 있으면 다시 제일을 잡아서 매년 거르지 않고 지내왔다. 

이렇게 제일을 정한 다음에는 마을의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서 제관을 선출하는데, 판주 1명과 주비 2~3명을 뽑아 제사를 준비하도록 한다. 산신제를 올리는 장소와 서낭당 주변에는 황토를 깔고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고, 산 너머에 있는 우물을 깨끗이 쳐내고 금줄을 쳐 부정이 타지 않도록 한다. 판주는 제일 전까지 목욕재계하고 부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주비들 역시 상가에도 가지 않고 부정한 일을 하지 않는다.

산신제의 제물로는 황소머리를 쓰는데, 이 황소머리에는 흰털이 조금만 섞여 있어도 안 되며, 서낭당 근처에 마련되어 있는 공지에서 정갈하게 만들어 서낭당 옆에 가마솥을 걸고 삶아서 반으로 갈라, 반은 산신제에 사용하고 반은 서낭제에 사용한다.

제일이 되면 판주와 주비가 산에 올라 자정을 기해서 제사를 시작하는데, 먼저 산신제를 올리고 난 다음에 서낭제를 드리고, 서낭제가 끝나면 소지를 올린다. 제물로는 소머리 외에 밤·대추·곶감 등 삼색실과와 백설기 등을 올린다. 산신제가 끝나고 나면 제사에 사용한 음식은 호수대로 똑같이 나누어 집집마다 나누어 먹는다.

▲ 흥천초등학교.     © 세종신문
 
흥천초등학교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효지1리에 위치한 공립초등학교이다. 1930년 8월 29일 흥천공립 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1932년 3월 제1회 졸업식을 하였다. 1950년 2월 흥천국민학교를 거쳐, 1996년 3월 흥천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교훈은 ‘슬기롭고 바르고 굳세게’이며, 교목은 향나무, 교화는 개나리이다. 전체 6학년 6학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색사업으로 글쓰기 교육과 전 아동 시상제를 운영하고 있다. 자율체육활동으로 줄넘기인증제를 실시하며 교내 축제로 은행잎 축제가 열린다.  

[마을人터뷰] 배종한(81) 선생

효지리에서 평생을 살았나?

1941년 흥천면 효지리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해방이 되었다. 흥천초등학교 20회 졸업생이다. 열 살 때 6.25전쟁이 나고 열한 살에 1.4후퇴로 피난을 갔다. 우리는 아버지는 제일국민병 가시고 어머니는 동생을 임신해서 가남읍 연대리 선비골까지 피난을 갔다가 더 이상 걸음을 걸을 수 가 없어서 다시 돌아왔다. 복하천 개울이 얼어 썰매를 타고 그랬는데 하얀 보자기를 뒤집어쓴 인민군들이 다리를 건너며 우리를 보고 “야! 얘들아 비행기라도 뜨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어서 집에 들어가라”그랬다. 비행기 뜨면 큰일 난다고 그런 말을 한 것이다. 학교는 (인민군들이) 다 올라가고 난 다음에 다시 열렸다. 열두 살 때 학교가 열렸는데 책상의자는 다 난리 통에 군인들이 춥다고 불 놓고 그러니까 싹 다 없어졌다. 바닥에 앉아서 공부하고 그랬다. 

▲ 여주시 흥천면 효지리 배종한 선생.     © 세종신문
 
젊은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흥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주중학교를 다녔다. 처음에는 30리 길을 걸어 다녔다. 30리면 12km인데 걷다가 뛰다가 하면 빨리 갈 때는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걸어 다닐 때는 구양리 영릉 옆 소로 길을 따라 질러간다. 그 이듬해에는 우리 아버지가 쌀 다섯 가마니를 주고 중고 자전거를 사줬다. 그때는 자전거가 그렇게 비쌌다. 자전거는 신근리로 나가 42번 국도를 타고 신작로를 달려 등하교를 했다. 여주중학교 2학년 다니다 등록금이 없어 중퇴했다. 학교를 그만 두고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군대 가기 전에 서울 영등포 공장에서 1년 남짓 있다가 군대를 갔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첫 월급이 몇 천원 했던 것 같다. 62년도에 영장이 나와서 의정부 101보충대에서 수도 사단에 배치되었다. 훈련소에 갈 때 수여선을 타고 논산으로 갔다. 조그마한 화통차가 여주에서 수원까지 가는데 연라리 쪽 고개를 올라갈 때는 열차가 힘이 없어서 천천히 갔는데 내려서 뛰어가다 다시 타고 그랬다. 
 
결혼은 언제 했나?

스물두 살에 군대 갔다가 스물다섯에 제대를 하고 스물일곱에 결혼을 했다. 우리 집사람은 흥천면 내사리가 고향이다. 결혼하기 전에 어떻게 한 번 만났다. 결혼 준비하면서 이천에 나가서 결혼사진도 찍고 그러느라 처가에서 하룻밤 보내고 왔다. 8남매 중에 일곱째 딸인데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손 위 처남댁이 왔다 갔다 하며 말을 전해주고 그랬다. 봄에 만나 음력 9월16일에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에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들과 같이 내사리로 가서 결혼식을 하고 왔다. 조그마한 화물차로 내사리로 가서 마을 입구에서 친구들이 가마를 메고 신랑이 타고 간다. 그 전에는 어느 동네든지 혼례복과 가마가 다 있었다. 처가 마당에서 전통혼례를 치르고 거기서 간단히 음식을 나눠먹고 그날 신부를 데리고 효지리 집으로 왔다. 우리 집에 와서 폐백을 올리고 첫날밤은 우리 집에서 보냈다. 그 당시 개울 건너 마을 친구들이 두 명도 나랑 같은 날 결혼을 했는데 그 친구들은 다 세상을 떠나고 없다. 마을에 두 내외가 같이 있는 것이 쉽지 않다. 집 사람이 한 살 어린데 우리 두 내외 이렇게 살고 있다.
 
농사는 주로 어떤 것을 경작하나?

논농사는 주로 벼농사를 지었다. 젊어서는 부발에 있는 콘크리트회사에 한 20년 다녔다. 일주일 주간, 일주일 야간 그렇게 근무를 하니까 한 열 마지기 되는 농사 짓고 직장 다니며 그렇게 살았다. 콘크리트 회사 퇴직하고 나서는 이천에서 아파트 경비를 한 10년 했다. 흥천은 주로 논농사고 최근 들어서는 하우스 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는 벼농사 이외에는 별 특산물이 없다. 
 
복하천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나?

그 옛날에는 복하천에 홍수 나고 그러면 물을 막아서 잉어를 잡았다. 잉어뿐만 아니라 자라도 많이 잡았다. 자라는 모래 속에 들어 가 있는데 아는 사람은 자라 발자국을 보고 모래를 파고 잡았다. 모래 속에 박혀 있는데 제법 큰놈은 세숫대야 만 하다. 잘 잡는 사람은 이천 장이 2일 7일에 장이 서는데 등에 자라 가방을 메고 여기서 복하천을 따라 올라 가면서 자라를 하나씩 잡아 이천 장에서 팔고, 또 내려오면서 잡고 그랬다. 여름에 목욕하는 곳도 부녀자들 하는 곳, 남정네들 하는 곳, 조무래기들 하는 곳이 다 따로 있었다. 
효지리는 산이 별로 없고 다 벌판이다. 마을에 공동 우물이 두 개 있었는데 가물면 우물이 딸려서 개울물을 길어다 먹었다. 집집마다 물지게가 없는 집이 없었다. 겨울에 나무하러 갈 때는 여기서 3~40리길인 금사면 주록리 노루목까지 백고개로 해서 나무를 하러 갔다.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서 나무하러 가서 집에 들어오면 저녁이 되고 그랬다. 참~! 그전에는 다 그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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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04 [14:05]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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