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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45] 서희장군과 함께 천년의 시간을 엮어가는 산북면 후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2/25 [11:42]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산북면 후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후리의 유래

후리의 옛 이름은 뒷골이었다고 한다. 옛날 품실(상품리) 사람들이 이 마을을 가리킬 때에 마을 뒤에 있다고 하여 뒷골로 부르다가, 뒷골의 뒤 후(後)자를 써서 후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리에는 서희 장군의 묘가 있다. 뒷골 앞 길가에는 바위가 고양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고양이 바위’가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바위는 마을 앞산에 있는 서희 장군의 묘가 코끼리산의 형상인데, 그 아래에 쥐바위가 있어 불길한 것을 제압하기 위한 바위로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바위는 둘로 갈라져 있는데, 옛날 남이장군이 상품리에 있는 남이고개에서 무예를 닦을 때, 이 바위를 과녁으로 삼고 활을 쏘아서 깨졌다고 전해진다. 고양이바위 앞에 있는 바위로 마치 쥐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쥐바위’가 있는데 코끼리 형상을 한 서희장군 묘를 위협하는 바위로 알려져 있다. 뒷골에서 주록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노루들이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노루목’ 있고, 뒷골 동쪽에 있는 산으로 낟가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노적봉(露積峰)이 있다. 뒷골에서 상호리 범실로 넘어가는 고개는 범실고개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범실고개에 오솔길만 있었는데 지금은 도로가 나있다.

▲ 서희장군의 묘.     © 세종신문

담판으로 80만 대군을 물리친 서희장군
 
서희장군은 고려 성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이천, 자는 염윤이고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이다. 서희의 할아버지인 서신일이 화살에 맞은 사슴을 구해주었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나 “사슴은 내 자식인데 그대의 힘을 입어 죽지 아니하였으니 마땅히 그대의 자손을 대대로 재상이 되게 하리라.”며 사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서신일이 80이 되어 나은 아들이 필(弼)이고, 필이 희(熙)를 낳고 희가 눌(訥)을 낳았는데 모두 태사내사령이 되었고 묘정에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서희는 960년(광종11) 3월 과거에 갑과로 급제하여 광평원외랑·내의시랑이 되었고 983년(성종 2)에 내사시랑평장사를 거쳐 태보·내사령이 되었다. 고려 초기 소원했던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장본인이 서희장군이고 993년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하여 80만 대군을 물리쳤다. 소손녕이 고구려의 옛 땅이 자기네 땅인데 고려가 그 땅을 침식하고 있다고 우기자 서희가 고려는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은 나라라는 것을 조리 있고 당당하게 설득하여 어쩔 수 없이 거란의 80만 대군이 철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강동6주를 확보하면서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게 되었다. 서희장군 묘는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봉분은 부인 묘와 쌍분을 이루며, 장대석으로 2단의 호석을 두른 장방형이다. 쌍분의 중앙 정면에 묘비 1기가 있고 쌍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각각 1기씩 놓여 있으며, 좌우로는 문석인이 1쌍씩 배치되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계체석을 이용한 3단정이며, 고려시대 묘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묘비석에는 ‘송검교병부상서 고려태보태사 내사령익장위 서공희지묘’라고 쓰여 있는데 송검교병부상서는 서희가 송나라에 가서 단절된 국교를 트고 송나라 임금으로부터 받은 고위직에 해당하는 벼슬이며, 태사보태보는 정일품으로 임금의 자문관, 내사령은 내사성의 최고위 지위고 장위 시호는 고려 초기의 문관 벼슬이름이다. 

▲ 여주시 산북면 후리 표고버섯 재배장.     © 세종신문

후리의 특산물 표고버섯
 
표고버섯은 느타리과에 속하는 버섯으로 밤나무와 떡갈나무 등 죽은 나무에 기생하여 자란다. 향과 맛이 좋아 각종 음식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며, 생으로 이용하거나 말려서 사용하기도 한다. 원래 봄부터 파종하여 이듬해 가을부터 수확하지만 시설재배의 경우에는 연중 생산이 가능하다. 표고재배는 원목과 톱밥재배 두 종류가 있다. 표고는 여러 가지 영양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최근 그 성분 중에 항암물질과 혈압 상승 억제 물질 등 각종 약리작용물질들이 발견되어 건강 증진 식품으로도 각광받게 되었다. 산북면 후리에는 1960년도 중후반부터 표고버섯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는 표고버섯 팜스테이 마을로 지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표고버섯 재배를 선도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중국산 표고버섯이 대량으로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후리의 표고버섯 재배는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한두 집에서 표고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능골

후리에서 금사면 상호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범실고개라고 하는데 상호리 방향 범실고개 좌편 능선아래 약 2만평 정도의 골이 있는데 이곳을 능골이라고 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세종대왕 영릉을 천장하기 위해 지관들이 후보지를 찾아 다녔는데 이 능골이 대상지 중에 하나였다고 해서 ‘능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능골은 후리 마을을 내려다보고 좌우측에 낮은 산이 후리를 감싸고 있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며 그 아래로 용담천이 흐른다. 용담천 건너로는 양자산 정상과 앵자봉이 우뚝 솟아 있어 천하의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마을人터뷰] 서현택(69) 선생

후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나?

1952년 금사면 후리에서 태어났다. 1986년에 산북면으로 분리되면서 산북면 후리가 되었다. 상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명품리 쪽에 있었던 중학원에 한 2년 다니다 그만뒀다. 사설 학원으로 교사가 2명 있었다. 먹고 살기가 괜찮은 집 아이들은 수원이나 서울로 나가서 공부를 했지만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은 대부분이 사설 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중학원을 그만 두고는 집안일을 도우며 청소년기를 보내다 결혼하고 후리에서 살았다. 

▲ 여주시 산북면 후리 서현택(69) 선생.     © 세종신문

서희장군의 후손인가?
 
서희 장군은 우리 34대 할아버지다. 우리도 서희 장군 후손으로 이천 서 씨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우리가 서희장군 제사를 준비했다. 지금은 전문 업체를 사서 제사를 모신다. 우리 아버지 살아계실 때 제사를 모시면 사람이 한 500명 모였다. 서희장군 묘 근처가 묏자리가 좋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몰래 묘를 쓰면 종친회에서 파내고 그랬다. 
 
결혼은 언제 했나?

스물두 살에 결혼했다. 집사람은 산 너머 상호리 사람이다. 지금이야 길이 있어서 산을 너머 가면 바로 상호리지만 내가 결혼 할 때만 해도 길이 없어서 이천으로 돌아서 곤지암으로 해서 상호리를 오고갔다. 우리 마을에 사는 사람이 상호리에 연고가 있다 보니까 소개를 해줬다. 73년 10월 중순에 만나 그 해 겨울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종6촌 매형이 혼례 좌장이 되어 재향을 서고 친구들과 함께 쓰리쿼터를 타고 이천으로 돌아서 상호리로 갔다. 상호리 마을 입구에서 사모관대로 갈아입고 친구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처가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 날 집사람과 같이 후리로 돌아와 폐백을 하고 첫날밤은 후리 우리 집에서 보냈다. 우리 집사람이 결혼하고 한 10년 정도는 물을 져다 먹었다. 전기도 내 기억으로는 80년대 초반에 들어왔던 것 같다. 
 
산골 생활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 전에는 이천 장을 가려면 저 위 백고개를 넘어서 다 걸어서 다녔다. 짐을 이고지고 소를 끌고 이천 백사면까지 다 걸어서 다녔다. 돼지 새끼를 이천 장에서 사가지고 지게에 지고 백고개를 넘어서 산북으로 오는 거였다. 60년대에는 하루에 두 번 버스가 다녔다. 곤지암에서 들어오는 버스였다. 교통이 아주 불편했다. 그 시절에는 후리에서 여주시청을 가려면 곤지암이나 양평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갈 수 있었다. 곤지암에서 이천으로 나가서 이천에서 다시 여주읍으로 들어갔다가 올 때는 그 길로 돌아왔다. 
 
사냥을 한다고 들었는데 언제부터 사냥을 시작했나?

유해조수 방재단을 하면서 주로 멧돼지를 사냥하러 다닌다. 오늘도 산에 갔다 왔다. 아프리카 돼지열병 때문에 멧돼지 사냥허가가 나서 양자산 일대에 사냥을 다진다. 멧돼지 한 마리 잡으면 48만원 받는다. 사냥은 여주에서 가장 오래한 축에 들 것이다. 한 50년 했다. 스무 살 정도 때부터 취미로 사냥을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께서 꿩고기, 토끼고기 이런 것을 좋아하셔서 공기총으로 사냥을 시작했다. 스물한 살 때 기회가 되어 엽총을 가질 수 있었는데 여주경찰서 허가 5호다. 예전에는 공기총은 그냥 집에 두고 사용했는데 지금은 공기총도 파출소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 엽총도 경찰서에서 찾아오면 한 3~4개월 차에 싣고 다니면서 사냥을 했는데 지금은 파출소에 보관하면서 낮에는 찾고 밤에는 파출소에 맡겨야 한다. 예전에는 공기총으로 토끼와 꿩을 많이 잡았다. 눈 오는 날 아침에 사냥을 나가면 두 시간에 일곱 여덟 마리 잡았는데 지금은 산에 토끼가 흔적도 없다. 예전에는 산에 노루도 많고 고라니도 많았는데 지금은 고라니는 많은데 노루를 볼 수가 없다. 노루는 궁뎅이가 하얀 것이 크기도 고라니보다 훨씬 크다. 멧돼지는 양지바른 산등성이 7~800고지에서 잠을 자다가 밤에 움직인다. 멧돼지는 야행성이다. 멧돼지는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 피해간다. 총을 맞았든지 다친 놈이 아니면 다 사람을 피해간다. 그래도 혹시 덤비는 놈이 있으면 근처의 나무로 피하는 것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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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2/25 [11:42]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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