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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 99 - 죄 없는 자가 매 맞을까 염려했더니
 
김태균   기사입력  2020/12/24 [15:22]
▲ 세종신문 김태균 대표     
‘나도 진실로 그가 남을 속여넘기려고 했을까 의심하였다. 죄 없는 자가 매를 맞을까 염려하였더니, 이제 한 사람도 매를 치지 아니하고 실정을 얻게 되었으니, 즐거운 일이다’(3년 8월 1일)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강원도 감사가 올린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이틀전에 올린 내용이다.
 
‘춘천(春川)의 맹인 김계현(金繼玄)이 그 고을 사람 박성간(朴成幹)·박인간(朴仁幹) 등이 일찍이 말하기를, ‘시위별패(侍衛別牌)를 거느리고 이방간(李芳幹)에게 한편이 되고자 하였다.’ 하였습니다.’(7월 29일)
 
그러자 형조에서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라 명하였다. 
이방간은 태종 이방원의 형으로 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에게 밀려 귀양살이하는 중이었다. 세종에게는 삼촌이 되는 셈이지만 권력에서는 아주 멀어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춘천의 시위별패를 거느리는 부대장쯤 되는 두사람이 갑자기 방간의 편에 서서 나라를 도모하자는 말을 하니 놀라운 일이자 동시에 어이없는 일이기도 한 셈이다. 더구나 맹인의 말이다.
의금부에서 취조를 위해 국문하니 맹인 김계현의 두 아들이 엎드려 빌며 말한다.
 
‘저의 아비가 심병(心病)이 있으므로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고 하고 맹인 계현도 거짓 자복했다고 하니 의금부에서 그대로 임금께 보고했다. 그러자 임금이 한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등을 석방하고 맹인 계현의 무고한 죄도 모두 사면해 주었다.
어느 무식한 자가 어찌하다 나온 이야기가 하도 엄청나서 믿지 못하겠는데 말하는 품이 영 믿음이 가지 않는데, 역적모의라니 저것들이 곧 죽을만큼 맞겠구나 싶은데 다행히 별 것 아닌 해프닝으로 끝나는듯 하니 안도하며 즐거워한 젊은 임금이었다. 이 마음이 애민군주 세종을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세종은 주도면밀한 사람이다. 
핵심을 꿰뚫는 질문을 종종한다. 8월 2일 어전회의에서 총제 원민생이 보고하고 임금이 질문하는 장면이다.
 
평안도는 지경이 중국과 접하고, 함길도는 야인(野人)의 땅과 가까운데, 이제 관원을 보내어 군사를 조련하면, 무식한 무리들이 대체를 알지 못하고 저 사람들에게 말을 누설하여, 변방 사람들과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될 것이요, 또 중국에서도 법령이 해이해져 있고, 요즈음에 화재까지 있고 하니, 만일 우리가 군사 교련한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의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두 도(道)의 군사를 번(番)들러 올라올 때에 조련하게 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법령이 해이하여진 줄을 아는가” 하였다.(8월 2일)
 
원민생의 보고에는 상황을 설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전형적인 어조이다. 
상황설명에서도 여러가지 정황들을 담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가지를 콕 집어 세종이 묻는다. 어찌하여 중국의 법령이 헤이해졌다고 하는지를… 이에 대한 답변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즉 대충 주워 섬기는 정도의 보고였다면 무척 곤란한 상황을 당했을 것이다. 
민생이 답하기를 ‘옛적에는 종이돈이 비록 찢어졌어도 인(印)을 친 형적만 있으면 쓰게 되었는데, 지금은 찢어졌으면 쓰지 못하게 되고, 그 전에는 예부(禮部)의 관원은 물건을 무역한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직접 회동관(會同館)에 나와서 외국 물건을 무역합니다.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이 근자에 사은사(謝恩使)로 북경(北京)에 들어갔을 때, 예부의 관원이 친히 비단을 싸 가지고 와서 마포를 바꾸어 간 일이 있었다 하니, 이런 것으로 보아 법령이 해이하였다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대답에 세종은 장차 부왕과 상의할 것이라며 회의를 마치고 민생이 물러가자 비서들에게 말했다.
 
“민생의 일 생각하는 것이 참 주밀하구나.”
 
이렇게 평가되는 원민생이란 인물은 태종, 세종대에 명나라와 오고 가던 대표적인 통역관이자 사신이었다. 원민생은 고려말 중추원 부사를 지낸 원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마도 서자로 추측된다. 이후 민부(閔富)라는 사람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사역원부사란 벼슬에 오른 뒤에 원씨 성을 되찾고 민생이란 이름으로 다시 불리게 되었다. 
통역관으로서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태종2년 7월의 일이다. 가뭄이 심하게 들어 백성의 고통을 걱정하던 차에 명나라에 통역관으로 다녀온 원민생에게 지나는 길의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상황을 묻는 대목에서다. 이후 거의 매년 통역관으로 명을 다녀오던 민생은 태종 17년에 극비보고를 올린다. '명황제가 미녀를 요구한다‘는 내용이다. 
이일로 민생의 인생이 바뀐다. 언제나 통사로서 다녀오던 신분이 처녀주문사(處女奏聞使)가 되었다. 내용으로는 좀 불미스럽지만 신분상으로는 사신이 된 것이다. 심부름군에서 업무의 주역으로 자리가 바뀐 셈이다. 이때 사신은 2품이상의 고위직이어야 했는데 민생은 좌군첨총제라는 무관 고위직을 하사 받고 임무를 수행했다.
 
명나라와 오고 가는 일을 잘 처리했는지 이듬해에 차관급에 해당하는 참판직인 공안부윤에 임명됐다. 실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원민생은 사람됨이 정교하고 지혜롭고 언변이 좋고 중국어를 잘해 임금이 중국 조정의 사신들과 이야기할 적에는 반드시 원민생으로 하여금 통역을 하도록 했다. 황제도 그를 사랑하여 명나라 서울에 가게 되면 비밀리에 불러 이야기를 하고 비단옷 등을 선물했다’
 
양녕을 폐하고 세종을 세자로 책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즉위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태종의 속앓이를 해결해 준 사람이 원민생이다. 명나라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과정에서 민생의 일처리가 현명하고 빨라 외교문제를 잘 처리했기 때문이다. 이후 민생은 세종과 함께 명과의 외교에 깊이 관여하며 업무에 있어 주도면밀함과 능력을 발휘한다. '통사로 14차례, 사신으로 7차례 명나라를 찾았다‘고 할 만큼 당대 최고의 통사이자 외교관이었다. 
 
세종 17년에 맞은 그의 죽음에 세종이 직접 제문을 써 주었다. 당시 국왕의 제문은 최소 판서이상은 되어야 내리는 것이 일반인데 역관으로 일어선 민생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가문의 영광이 되는 일이다.
 
“경은 타고난 천성이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행실은 공정하고 청렴하였도다. 일찍이 사신이 될 만한 재주를 가졌으며 어려서부터 중국말의 음훈을 잘 알아 소고(昭考·태종)의 인정을 받았고 거듭 칭찬을 받았도다. 나를 보좌하게 됨에 더욱 은총을 입었고 험난한 만리길을 직접 오가며 상세히 황제의 궁궐에다 우리의 바람을 아뢰었도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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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2/24 [15:22]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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