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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 98 - 물난리 이후의 대책
 
김태균   기사입력  2020/12/17 [11:04]
▲ 세종신문 김태균 대표     
세종3년 6-7월은 긴 가뭄 끝에 찾아온 장마가 큰 수재로 이어졌다. 
집이 잠기고, 개천이 넘치고, 농토가 쓸려가는 등 피해가 이어졌다. 어느정도 비가 그치자 제일 먼저 상소문을 들고 나타난 이가 판한성부사 정진이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소를 올리는 첫마디다. 
 
음진(陰診)의 재앙은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므로,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능히 면할 수 없는 것이나, 그 재앙을 구제하고 환난(患難)에 대비하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써 할 수 있는 바이니(3년 7월 3일)
 
이 문구는 세종도 자주 쓰던 말이다. 하늘의 운수가 비록 이와 같더라도 사람이 할 수 있는 바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큰 물난리를 겪고 나자 수도서울을 책임지고 있는 한성부사가 올린 상소는 똑같은 일을 두 번 당하지 말자는 의지가 읽혀진다. 
 
‘지금 비가 한 달이 넘어도 그치지 않아서, 지난달 12일에 밤에 큰 비가 와서, 물이 넘쳐 하류가 막혔으니, 도성(都城) 안이 다시 침몰될 근심이 있습니다. 말이 여기에 미치매, 전하께서 백성의 부모 되신 마음과 자애심(慈愛心)이 많은 덕으로써, 근심하고 조심하심은 말로써 비유하기 어렵습니다.
신 등은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백성을 괴롭혀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비록 성인(聖人)이 할 수 없는 일이오나, 재해(災害)를 구하고, 환난(患難)을 방비하는 일은 실로 왕정(王政)의 먼저 할 바이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특히 유사에게 명하여, 매양 농한기(農閑期)를 당하여 백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사역하게 하고, 그 힘을 다 쓰지 않게 하였으니, 신 등은 직분이 도읍(都邑)을 관장(管掌)하였으니, 감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으므로, 삼가 한 두 가지의 좁은 소견을 다음에 조목 별로 열거합니다.’
 
백성들이 노역해야 함이 온당치 않아 보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일은 해 놓아야 다음번 재난에 이와 같은 피해를 입지 않으리라는 이야기다. 일종의 용기가 필요하다. ‘도읍을 관장하는 책임에 있으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며 상소를 올렸다. 

사람은 위기를 벗어나면 다시 안일해지고 무용담만이 흐르기 쉽다. 하지만 참된 리더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위해 항상 데이터의 누적을 중시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당시의 한성시장 정진도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 몇 가지를 들여다보자.
 
1. 두 곳의 수문(水門)은 좌우의 옹성(壅城)이 좁아서, 도성(都城) 안의 여러 곳의 물이 합쳐 흘러서 막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동부(東部)의 창성방(彰善坊)이 재해를 입은 것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원컨대 유사로 하여금 적당한 곳을 가려서 별도로 수문 하나를 더 만들어 수도(水道)를 통하게 하면, 물이 넘치는 것이 감해질 것입니다.
 
1. 종루(鍾樓) 이하로는 지세(地勢)가 모두 낮아서, 도성의 물이 한 곳으로 몰려드는 것이, 높은 집마루에서 항아리 물을 내려 붓는 것 같아서, 많은 집들이 물에 뜨고 침몰되는 일이 반드시 이르게 될 이세(理勢)입니다. 원컨대 유사에 명하여 예전 도랑[渠] 자리에 그대로 냇길[川路]를 뚫어 파서, 깊고 또 넓게 하여 수재에 대비할 것입니다. 또 좌우 행랑(行郞)의 뒤에도 큰 도랑 하나를 만들면 크게 편리할 것입니다.
 
1. 진장방(鎭長坊)에는 산골짜기에서 여러 곳의 물이 세차게 흘러 내려, 격류로 쏟아져 내리는 까닭으로, 경복궁 동면(東面)의 내성(內城)이 몇 자[尺] 가량이나 무너졌으니, 만약 수년(數年) 동안 이대로 지나면, 거의 성내(城內)를 다 삼켜서 그 형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유사에 명하여 내를 넓히고 돌을 포개어 쌓아 올려 수도(水道)를 방비할 것입니다. 경복궁 서성(西城) 밖에도 또한 마땅히 내를 넓혀 흐름을 터놓아야 될 것이며, 그 외의 도랑들도 뚫고 파야 할 곳을 일일이 다 들 수 없사오니, 원컨대, 유사로 하여금 임시로 적당히 시행하게 할 것입니다.
 
1. 정선방(貞善坊) 다리 1개와 연화방(蓮花坊) 다리 2개, 창선방(彰善坊) 다리 3개, 덕성방(德成坊) 다리 1개 등, 위의 도합 7개의 다리는 거가(車駕)가 상시 지나시는 곳이니, 견고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는 모두 나무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큰 비를 한 번 지내고 나면, 모두 떠내려가게 되니, 재목의 허비와 백성을 괴롭히는 역사가 해마다 없을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여름 장마 때를 당하면, 반드시 썩어 무너지게되니, 그것이 견고하지 않음이 명백합니다. 청컨대, 유사에게 명하여 돌다리를 만들게 하여 이런 근심을 면하게 하소서.”
 
구조상 물이 갇히기 쉬운 곳에 수문을 하나 더 만들어 물이 잘 빠지게 만들자는 내용부터 시작해서 곳곳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알고 있는 현장형 행정가 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디테일을 강조한 대목이다. 결국 세종은 공조에 명하여 농한기를 지나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보름쯤 지난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 하나 있다. 대표적인 탁상행정 이야기다. 호조판서면 나라살림을 관장하는 곳인데 남는 곡식 옮겨 두는 문제를 논의하는 장면이다. 
 
호조 판서 신호(申浩)가 계하기를,
“창고의 미두(米豆)가 남는 것을 수장할 곳이 없으니, 숭례문(崇禮門) 안의 행랑(行郞)에 간수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행랑을 빼앗아서 곡식을 간수한다면, 거기에 사는 백성들은 장차 어디고 가겠는가.”
라고 하니, 신호가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3년 7월 27일)
 
호조판서 신호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어디로 가겠는가란 임금의 간단한 이치와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제안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일 텐데 일을 쉽게 처리하려는 탁상행정의 성급함 일 것이다. 세종은 모든 일처리의 끝지점에 백성이 있었다. 그것이 세종이 되게 한 힘이었으리라.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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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2/17 [11:04]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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