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마을 구석구석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여주마을 구석구석 40] 한천을 품고 싸리산에 기댄 대신면 천남리
 
아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11/27 [11:58]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사비나루터가 있던 천남리 유원지.     © 세종신문

천남리의 유래

천남리는 본래 여주군 등신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찬샘골, 면비, 엄남배기를 합하여 거북굴내 남쪽이어서 천남리라 하고 대신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사비, 찬샘골이 있고 행정리는 천남1·2리로 나누어졌다. 천남초등학교가 위치한 찬샘골은 마을 곳곳에서 찬샘이 솟아난다고 하여 찬샘골 또는 한천동(寒泉洞)이라 불리고 있는데 지금은 천남1리다. 찬샘골 아래 남한강 강변으로는 사비마을이 있는데 마을 앞에 모래 언덕이 있어 사부(沙阜)로 불리다가 사비라 부르게 되었다. 천남리는 마을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흐르는 한천을 품고 동쪽으로 싸리산에 의지하고 있다. 
 
사비나루

천남2리 사비마을에서 남한강을 건너 여주 읍내를 연결하던 나루다. 1971년까지 약 30명이 탈 수 있는 목선으로 대신면 천남리, 가산리, 후포리, 당산리 주민들이 등하교와 여주장을 드나들 때 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나룻배를 자주 이용하는 주민들은 뱃삯으로 1년에 보리 1말과 벼 1말을 내었다. 1971년 나루가 없어질 때까지는 모래톱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강폭이 150m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사비나루 앞의 양섬까지 나룻배로 건넌 다음에는 모래톱을 걸어서 여주장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1972년 홍수 때 나루가 모두 물에 잠긴 후에 다시 복원되지 못했다고 한다. 팔당댐이 완공되기 전 사비나루에는 나룻배 사공의 집, 주막, 어부의 집이 각각 1가구씩 있었다고 한다. 사비나루의 마지막 사공은 사비마을에 사는 박태준씨였다고 한다. 사비나루는 뗏목과 짐배가 쉬어가는 곳으로 뗏목 등이 올 때는 떼꾼들이 미리 연락을 하는데, 그러면 주막에서는 돼지를 잡는 등 부산하게 음식을 장만했다고 한다. 사비나루와 여주읍 사이에 있는 ‘제비여울’은 물살이 매우 급하여 뗏목이 파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여울을 지날 때 사공들은 “멍석 말아라”라고 외치면서 서로 주위를 환기시켰다고 하는데, 여울을 잘 건너지 못하면 멍석을 말듯이 떼가 말려든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 1958년 건립된 밀성박씨 재실.     © 세종신문

밀성(밀양) 박 씨 재실
 
천남1리에는 1958년에 건립된 밀성박씨 재실이 있다. 밀산군 판서공 휘 밀양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순대부전법판서와 판전교시사를 역임하였다. 판서공 휘 밀양은 보문각대제학 밀성군 윤문의 맏아들로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과 도의로서 교류하였다. 고려사에는 공의증주는 성진이니 정용장군으로 명나라 황제는 문하평리 승을 증직 하였으며 충렬왕의 명에 따라 군사를 거느려 일본을 정벌하러 갔으나 싸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기 1958년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밀성박씨 종친들이 천남리에 승의재를 건립하였다.
 
지경닫기

지경닫기란 집을 짓기 전에 땅을 단단하게 다짐으로써 집을 튼튼한 지반 위에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일종의 기초공사와 같다. 과거 지경닫기는 터만 다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일종의 무속적인 내용까지 곁들여 있어 터를 건드릴 때 나타난다는 동티를 막기 위해 고사를 드리는 제의식과 함께 이루어지는 특이한 민속이다. 대신면 천남리, 능서면 번도리, 가남읍 오산리 등에서 근래까지 지경닫기를 했다고 한다. 특히 대신면 천남리에는 지경석을 마을에 보관했다고 한다. 여주는 남한강을 끼고 있어 아무 곳이나 파보아도 물이 솟아 식수를 사용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으나, 대신 연약한 지반이 많아 상대적으로 지경닫기가 타 지역에 비해 성행했던 것 같다. 지경닫기는 주로 밤에 하는데 낮에 지경을 다지면 지신이 활동을 하지 않음으로 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효과가 없고, 밤에 지신이 활동할 때 이루어져야 제대로 지경을 다진 것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지경을 다지는 것은 품삯을 주는 것이 아니고 마을의 협동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을 끝낸 밤에 모여서 한다. 

▲ 여주시 대신면 천남리 찬샘마을 전경.     © 세종신문

밤이 되면 터의 주인이 동리의 사람들을 모아 지경 다질 준비를 한다. 이 지경닫기의 의식에 동원되는 사람들은 동리의 잔치로 생각해 일종의 놀이마당에서 행해지듯 자진해서 참여하며, 어느 집이 되든지 간에 지경을 다지면 온 동리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한바탕 흥청거리게 된다. 사람들이 모이면 집주인이 고사 상을 장만하고, 고사상 위에는 간단한 술과 포(안주)를 차려놓고 집을 짓더라도 아무런 해가 없이 복을 내려달라고 축원을 한 다음에 술을 사방에 뿌린다. 고사가 끝나면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주인이 장만한 술과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먹고 난 후에 횃불을 밝힌 다음 동리의 장정들이 지경돌을 가운데 놓고 돌을 짚으로 묶어서 들었다 놓았다 하며 터를 다진다. 이때는 선소리꾼이 북을 메고 선창을 부르면 지경꾼들이 후렴을 부르며 땅을 골고루 다져나가는데, 선창의 전반부에 지경돌을 들어 올리고 후반부에 내려 닫고, 후렴의 전반부에 들어 올리고 후반부에 내려 닫고 하는 방법으로 반복된다. 이렇게 행해지는 지경닫기 노래는 보통 집을 지어서 동티가 나지 않고, 그 집안에서 효자와 열녀가 나고, 정승·판서가 태어나는 좋은 터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공동적인 협동심이 우리 민족의 참다운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여주지역의 지경은 대략 두 종류로 나타나며 크기는 높이 두 자, 굵기는 한두 자다. 이러한 지경석은 가운데 구멍을 뚫고 그곳에 나무를 꿰어 나무에 지경줄을 매어 사용하는 것이 있고, 지경석의 허리를 매어 그곳에 지경끈을 연결해 사용하는 지경석도 있다. 이 같은 지경석은 흔히 어느 지역이나 같은 형태로 나타나며, 지역에 따른 특징은 없다. 

[마을人터뷰] 정락진(85) 선생

천남리가 고향인가?

나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우리 아버지는 천남리가 고향이다. 아버지는 1910년 생으로 여주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다. 부산에서 만주까지 다니는 기차에서 판매를 하셨다. 나는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해방직전 1945년 4월에 왔다. 일본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 창경국민학교에 45년 12월에 편입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신면 천남초등학교로 왔다. 그 때는 천남초등학교가 간이학교였다. 천남초등학교, 대신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여주농고를 나왔다. 

▲ 여주시 대신면 천남리 정락진 선생.     © 세종신문

천남리에서 여주농고까지 어떻게 통학했나?
 
요 아래 사비마을에서 강 건너 왕터 앞 비행기장으로 사용하던 모래밭으로 건너다녔다. 천남2리앞 나루터가 ‘사비나루’다. 강 건너 모래밭은 군용비행장이었다. 6.25터지면서 비행장이 생겼다. 모래가 딱딱한데 그 위로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 그 모래톱을 따라 여주읍내까지 가서 여주농고까지 다녔다. 장날이면 장꾼들도 전부 사비나루에서 쌀과 곡식을 싣고 가서 장에 팔아서 돈을 만들어 썼다. 달걀도 지푸라기로 10개씩 묶어서 내다가 팔았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2년제 초급대학을 나왔다. 
 
평생 교직에 종사하였는데 첫 발령지가 어딘가?

대신초등학교에 첫발령을 받았다. 천남초등학교에서도 평교사 4년 교감 4년 했다. 천남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그 때는 간이학교였다. 천남초등학교는 박광필이라는 분이 자기 땅에 학교를 세워 나라에 시사했다. 그분은 일본서 대학 다니고 교육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반일감정이 대단했다. 왜놈이라고 하면 이를 갈았다. 학교에도 그분 비석이 있다. 천남초등학교는 상구리, 하림리, 천남리, 가산리, 후포리, 당산1리 아이들이 학교를 다녔다. 천남초등학교 주변에 오래된 참나무가 정말 많았다. 서편으로는 큰 미루나무들도 있었다. 학교도 별로 크지 않아 오른쪽 귀퉁이에 6개 학급이 있었다. 지금은 많이 확장되었다. 대신초등학교, 오학초등학교, 도전초등학교, 천남초등학교에서 평교사를 했고 걸은 초등학교에서 교감을 달고 천남초등학교에 와서 교감을 봤다. 그리고 양평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정년퇴직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대신초등학교 첫 발령 때 총각 선생님이었나?

군대 제대하고 복학준비 하면서 결혼을 했다. 집사람은 점동 사곡리가 친정인데 5월에 제대하고 나오니까 신부를 정해 두었다고 해서 사곡리로 찾아가서 장인 장모될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집사람도 얼굴을 보고 왔다. 서울에서 내려오다 들렸다. 복학수속 밟으러 서울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들렸다. 여름이라 모시옷을 입고 찾아갔다. 내가 기별도 없이 갑자기 찾아갔는데 국수를 먹고 왔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고 해서 그냥 처자 얼굴만 보고 왔다. 그리고 11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여름에 집사람 얼굴 한번 보고 결혼식 당일에 두 번째 봤다. 점동 처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일본 닛산 트럭에 혼수를 실고 집안 어른이 경찰서장 지프차 운전을 했는데 그 지프차를 타고 왔다. 점동에서 여주나루로 와서 도선에 지프차, 트럭 두 대를 싣고 학동나루를 건너 천남리로 들어왔다. 그리고 집으로 와서 폐백을 하고 동네사람들과 함께 간단한 잔치를 했다. 아들딸 5남매를 뒀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20/11/27 [11:58]  최종편집: ⓒ 세종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코로나19 한파 속 ‘희망의 종소리’… 구세
광고
가장 많이 읽은 기사
김선교 의원 정치자금법·공직선거법 위반 4차 공판 열려 / 이재춘 기자
북극발 한파로 여주 남한강 꽁꽁 얼어 / 이재춘 기자
농민의 피맺힌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한다 / 박재영
경기도의회, ‘1인당 10만원’ 2차 재난기본소득 지급 전격 제안 / 송현아 기자
52년만의 흉년… 여주시농단협, 쌀 최저수매가 보장 요구 / 송현아 기자
여주~원주 전철 복선화 타당성 재조사 통과 / 송현아 기자
유광국 도의원, 세종국악당 리모델링 예산 확보 / 이재춘 기자
‘수수료 1%’ 경기도 공공 배달앱, 여주시 2분기 도입 예정 / 송현아 기자
민원으로 중단된 ‘여주CGV’, 공사 재개 초읽기 / 송현아 기자
이항진 시장, 점동면 시작으로 온라인 ‘시민과의 대화’ 나서 / 송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