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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39] 백로 왜가리 마을 북내면 신접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11/22 [15:58]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북내면 신접리 백로 왜가리 번식지.     © 세종신문

신접리의 유래

신접리는 본래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 지역으로 1906년 여주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자연마을인 새말(신촌)과 접줄(접가동)을 병합하여 신접리가 됐다. 새말은 조선 중기에 여흥 민 씨가 처음 정착하여 새로이 마을을 형성하여 ‘새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의 신접1리다. 새말 뒤편에 위치한 접줄마을은 신접2리를 일컫는다. 신접리 앞들은 ‘자망들’과 ‘지식들’이라 부르는데 인근에 완장천과 금당천이 있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신접리 고인돌

신접리 고인돌은 신접2리인 접줄마을의 입구에 있었다. 탁자식인 이 고인돌은 2003년 6월 세종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조사 전에는 덮개돌과 양쪽에 굄돌이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파괴가 많이 된 상태였다. 덮개돌의 재질은 거정화강암 계통이고 크기는 200×184×30~40㎝이며 무게는 2톤쯤 된다. 평면 생김새는 마름모꼴이고, 윗면은 편평하며 가장자리에는 손질을 많이 한 흔적이 관찰된다. 남북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었다. 굄돌은 덮개돌의 동쪽과 서쪽에 놓여 있었으며 가운데 부분이 조금 두툼한 느낌을 준다. 재질은 양쪽 모두 덮개돌과 같은 거정화강암이었다. 동쪽 굄돌의 평면 생김새는 한쪽이 긴 육각형 모양이다. 겉면과 가장자리에 비교적 손질을 많이 하였다. 서쪽 굄돌은 평면 생김새가 모를 죽인 삼각형이고 동쪽 것처럼 가장자리에는 손질이 많이 되었다. 신접리 고인돌은 발굴 조사된 다음 신륵사 관광단지로 이전하여 복원 전시하고 있다.

▲ 신접리 고인돌.     © 세종신문

백로 및 왜가리 번식지
 
신접리 백로 및 왜가리 번식지는 마을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약 2,000평 미만의 번식지 중앙에 약 400년생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여기서 집중적으로 번식해왔다. 이 나무가 고사해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주변의 참나무에도 번식하기 시작하더니 이들 참나무들도 역시 조류의 배설물 피해로 인해 거의 고사하였다. 이후 마을주민들은 죽어가는 참나무를 대신할 아카시아나무와 소나무를 그 옆에 심어서 둥지를 틀게 하였는데 아카시아나무는 비교적 잘 견디고 있다. 한편 1965년부터 1967년에 걸쳐 이곳에서 왜가리 새끼 6마리와 중대백로 새끼 156마리에 가락지 표지를 달아 날려 보냈다. 그 결과 1967년 6월 17일에 날려 보낸 중대백로 1마리가 3년 동안 동남아를 왕래하여 월동하고 1970년 4월 26일 개성에서 회수(가락지)된 일례가 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백로 및 왜가리 번식 집단이 1,000여 마리였으나, 최근에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신접리 번식지에는 극소수가 번식하고 있다. 그러다가 2020년에는 근래에 보기 드물게 백로와 왜가리가 많이 찾아왔다. 우리 선조들은 “백로가 들면 마을이 부유해 진다”고 믿어 마을의 백로를 극진히 보호 왔다. 여주 신접리의 번식지는 우리나라 중부지역에 위치한 백로와 왜가리의 번식지를 대표하기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 명성황후가 목을 축이고 간 신접리 공동우물.     © 세종신문
 
명성황후의 아픔이 서린 새말 ‘공동우물’

신접1리 새말 마을 한가운데 길옆에는 오래된 우물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이 우물은 신접1리 공동우물로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물이 마르지 않고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물이다. 최근에는 집집마다 지하수를 파고 수돗물을 사용하면서 공동우물이 없어지는 추세지만 신접리 주민들은 지금까지 마을 공동우물을 보존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직후 흥선대원군의 위협을 피해 피난길에 오르던 중 북내면 신접리 민 씨 종손을 찾았다. 그러나 완고한 민 씨 종손은 대문을 열어주지 않아 명성황후는 문밖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장호원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마을 주민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시기와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신접리 주민들이 지금까지 공동우물을 관리하고는 있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관심도 떨어지다 보니 청소와 주변 관리가 미흡하여 곧 자취를 감출 것으로 보인다.  

[마을人터뷰]  민덕영(83) 선생

신접리가 여흥 민 씨 집성촌인가?

나는 여흥 민 씨 31대손으로 19대 할아버지 때부터 이 마을에서 살아왔다. 19대조는 당시 좌의정이셨는데 원주 관찰사 상이 있다고 해서 다녀오다가 완장천에서 쉬게 되었다. 완장천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19대조는 이 마을에 살고 싶어 사람을 시켜 원주관찰사에게 요청하여 퇴임 후 정착하게 되었다. 6.25직후만 해도 이 마을에 민 씨가 20호 넘게 살았는데 지금은 12가구가 살고 있다. 19대 선조께서 자리 잡을 때 신접리 일대 약 30만평의 땅을 조성해서 살았다. 
 
평생을 신접리에서 살았나?

신접리에서 태어나 여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여주군수를 역임한 임창선, 박용국이가 내 고등학교 동기들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10년동안 장교로 군복무를 하였고 제대 후 롯데그룹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직하고 2006년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어머니와 서울에서 같이 살다가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다시 고향으로 모시고 왔는데 1년 정도 계시다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따라 나도 40여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 여주기 북내면 신접리 민덕영 선생.     © 세종신문

중·고등학교는 어떻게 다녔나?
 
중학교는 대신중학교를 다녔다. 접줄에 사는 한 살 많은 선배가 같이 가자고 해서 대신중학교를 갔다. 내가 대신중학교 1회 졸업생이다. 당우리 보건지소 뒤로 샛길을 통해 오금리, 천남리를 거쳐 대신중학교까지 갔다. 30리길인데 왔다갔다 60리를 걸어 다녔다. 여주농고는 강 건너 잠업연구소 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고3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갔다. 신남리를 지나 버시고개를 넘어 학동나루에서 배를 타고 여주군청 뒤로 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오금리 사는 친구 아버지께서 학동나루 뱃사공이셨다.
 
백로, 왜가리가 언제부터 마을에 서식했나?

백로와 왜가리가 언제부터 우리 마을에 살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 19대조도 백로와 왜가리를 보고 이 마을에 자리를 잡으셨을 것이다. 19대조께서 이 마을에 오시자마자 은행나무를 심으셨는데 내가 어렸을 때도 그 은행나무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은행나무에 황새가 서식했다. 황새는 백로보다 몸집이 크고 날개 끝이 검은색이다. 그 황새가 지금은 없어지고 왜가리와 백로만 서식 하고 있다. 2015년도에 여주시에서 환경자연보호협회에 의뢰해서 왜가리 백로 번식지 모니터링 및 보존방안을 연구했었는데 약360억 정도 들어간다고 했다. 조림을 하고 습지를 만들고 순례길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아직까지 뚜렷한 실천은 없다. 왜가리와 백로는 9월말 경에 전부 간다. 그리고 이듬해 음력 1월 14일이면 반드시 돌아온다.
 
백로와 왜가리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은?

50년도 사변이 났을 때 군인들이 백로와 왜가리를 잡는다, 소총연습을 한다 하면서 왜가리와 백로에게 총을 많이 쐈는데 그래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서식하고 있다. 배고픈 시절에 이웃마을 사람들이 몰래 백로와 왜가리 알을 꺼내먹고 그런 적도 있다. 이웃마을에 사는 동기들이 가끔 그런 얘기를 했다. 신접리에 알 꺼내러 갔다가 혼난 적이 있다고...왜가리 알이 달걀보다 조금 작고 푸른빛이 나는데 먹은 본 사람들 말로는 알이 좀 독한 맛이 난다고 그랬던 것 같다. 왜가리와 백로가 많이 오면 부자가 되고 자식을 많이 낳고 번창한다는 말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소중히 여겼다. 한동안 몇 마리 없다가 금년에 왜가리와 백로가 제일 많이 왔다.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보호가 되어 있어 다행이다. 
 
[민덕영 선생 부인 인터뷰]

나는 여주읍 하리에 살았다. 결혼식을 11월 중순에 올렸는데 식을 마치고 신접리 시댁으로 오는데 백로와 왜가리가 하얗게 마을 주변을 뒤덮고 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당시에 경황이 없어 새들을 볼 여유가 없었는데 같이 온 우리 당숙모가 ‘이 마을 너무 좋다. 학이 저렇게 하얗게 있다’고 해서 택시 밖을 내다 봤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왜가리와 백로가 마을에 있어 좋지만 살다보면 불편한 점도 있다. 저녁때 새들이 마을에 모여 들면 엄청 시끄럽고 냄새도 많이 난다. 여름철에도 장독을 열어 놓을 수 없다. 애들이 뱀도 물고 가다가 길어 떨궈놓고 그런다. 천적이라도 하나 오면 얼마나 시끄럽게 꽥꽥거리는지 모른다. 그래도 백로와 왜가리는 우리 마을의 제일 큰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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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22 [15:58]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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