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마을 구석구석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여주마을 구석구석 33] 홀로 서도 당당한 대신면 천서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9/24 [16:15]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천서리의 유래

천서리는 여주군 대송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래천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대신면에 편입되면서 천서리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나란, 느네, 멧말, 사거리, 소송골, 왕대울, 파성, 화양정 등이 있다. 나란은 파사국이 나라를 세운 자리라하여 나라라고 하다가 변하여 나란이 되었다고 한다. 느네는 왕의 능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능네라 하다가 느네로 바뀌었다고 한다. 멧말은 산촌마을이라 ‘멧말’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마을 한복판에 사거리 길이 있다 하여 ‘지평나들이’리 불렀고 파사성 축조 때 성벽 돌을 가공한 장소라 하여 ‘파성골’이라고 불렀다. 선비들이 쉬거나 놀던 곳으로 화양정이란 곳이 있는데 이름이 변하여 행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서리 막국수
 
천서리 하면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막국수다. 막국수는 강원도와 경기도 동부의 향토 음식인데 삶은 메밀 면에 양념장, 잘게 썬 김치, 채 썬 오이, 삶은 달걀 등을 얹고 동치미 국물 혹은 육수를 자작자작하게 넣어 비벼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막국수라는 이름의 유래는 '막 만들어서 막 먹는 국수‘로 통용되다. 막국수라는 명칭이 강원도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강원도와 경기도 일부 사람들만 아는 음식이었다. 막국수는 국수틀로 국수를 솥단지에 눌러 뽑고, 동치미 같은 것을 대충 말아 먹는 음식으로 나온다. 국수 면발도 메밀국수 면발보다 굵었다. 원래는 다소 기름진 닭고기 육수를 부어 먹다가 전국으로 유명세가 확장되면서 보편적인 동치미 육수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천서리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막국수를 많이 해 먹었다고 한다. 천서리는 이포나루의 강북 마을인데 강원도 사람들이나 목재를 실은 트럭이 경기도나 서울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포나루를 이용해기 위해 천서리로 몰려 들었다. 천서리 막국수는 처음에는 칼국수 형식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천서리 막국수는 동치미 육수를 부어 내는 물 막국수, 양념장을 듬뿍 끼얹고 육수는 취향에 따라 부어먹을 수 있도록 하는 비빔 막국수로 구별해서 내놓고 있다. 천서리 막국수는 수육과 함께 백김치에 싸서 먹기도 하는데 그 맛이 단백하고 깔끔해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 메밀꽃이 활짝 핀 당남리섬.     © 세종신문

남한강 꽃동산 당남리 섬
 
‘달빛이 물든 밤 하이얀 메밀꽃 밭을 거니는 세 남자, 전국의 장터를 돌며 물건을 파는 장돌뱅이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 동이와 장꾼들이 다음 장을 찾아 이동하는 장면이다. 은은한 달빛을 받은 메일꽃밭에 대한 서정적 묘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메밀꽃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대신면 천서리에 있는 당남리섬은 매년 8월말 9월이면 메밀꽃과 코스모스가 광활한 대지에 활짝 피는 곳이다. 새하얀 메밀꽃이 천서리와 이포를 가로질러 흐르는 남한강 풍경과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여주시 농업기술센터에서 꽃씨를 뿌리고 관리하고 있는 당남리 섬은 봄철의 노란 유채꽃을 시작으로 5~6월의 황화코스모스 9월의 메밀꽃과 코스모스 군락이 동화에 나오는 비밀의 화원과 같이 대 장관을 이룬다. 약 9만 여 평에 이르는 당남리 섬은 인근 이포보, 오토캠핑장, 파사성, 막국수촌 등과 함께 천서리를 대표하는 최고 명소로 꼽히고 있다. 드넓은 벌판의 코스모스와 메밀꽃은 푸른 가을하늘과 천서리의 자연풍광과 어우러져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동화의 나라로 이끌어 주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방문이 제한되고 있지만 당남리 섬의 아름다움은 단연코 남한강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 남한강 절경이 내려다 보이는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파사성.     © 세종신문

수천 년의 세월을 지켜온 파사성
 
대신면 천서리 산9번지의 야트막한 야산에는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우뚝 서 있는 파사성이 있다.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파사성은 성벽 등 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둘레는 약 943m이며 성벽 중 최고 높은 곳은 6.25m나 되나 낮은 곳은 1.4m되는 곳도 있다. 파사성은 신라 제5대 파사왕이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최근 발굴 조사에서 삼국시대의 건축구조와 양식의 자취가 발견되어 축성 시기가 삼국시대로 밝혀졌다. 이후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승군 총섭 의암이 승군을 동원하여 3년에 걸쳐 옹성과 장대, 군기소까지 갖춘 성으로 수축하였다고 전한다. 파사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강 상류와 하류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우리나라 성곽 역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고려말의 이색 선생과 조선중기의 유성룡 선생이 파사성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시로 남길 정도로, 전망이 아름답다. 성 내부에는 동문 터와 남문터, 수구지(址), 우물터, 각종 건물터 가 남아있다. 특히, 남문 터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팔각 주춧돌이 있고, 남문터 안쪽에는 넓은 평지가 있으며 지름이 5m나 되는 저수지 모양의 우물터에는 지금도 물이 고여 있다. 파사성 정상 서북쪽 옆 산 정상 바로 밑에 암벽을 깎아 만든 큰 수직면에 선각되어 있는 마애 여래 입상이다. 규모가 대단히 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균형이 알맞으며, 이중의 두광(頭光)을 갖추고 어깨가 각이 져 신체다 당당해 보인다. 이중 두광을 갖춘 넓적한 얼굴, 각이 진 팔꿈치, 옷주름, 선각 표현 등에서 고려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영월암 마애 여래 입상과도 유사한 점이 많아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파성마을에 있는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한경열(77) 선생

천서리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나? 

1944년에 느네에서 태어났다. 송촌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강 건너 이포중학교를 나왔다. 중학교는 이포나루에서 배타고 다녔다. 예전에는 강 건너 이포가 잘 살았는데 지금은 천서리가 더 번성하고 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이포중학교가 지금의 기천서원자리에 있었다. 중학을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돈 벌러 갔다. 모심기 전에 천서리를 떠났다. 객지 나가서 살다가 51년 만에 귀향했다. 귀향한 지 한 10년 된다. 

▲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한경열(77) 선생.     © 세종신문

50~60년대 천서리는 어떤 모습이었나?

천서사거리에서 약국 뒤로 이포나루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옛날에는 샛강이 있었다. 배로 건너는 샛강이었다. 원목을 실은 지에무시(지엠사 트럭)는 샛강을 그냥 건너갈 수 있지만 사람은 나룻배로 건너다녔다. 강원도에서 목재를 실은 트럭들이 천서리로 와서 차량 정비도 하고 막국수도 먹고 쉬었다가 이포나루에서 도선으로 강을 건너 이천, 곤지암을 거쳐 서울로 들어갔다. 트럭이 운행되기 전에는 강원도에서 나무로 떼를 엮어 남한강을 통해 서울로 날랐다. 우리 동네에도 그 떼배를 운전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홍원막국수와 봉춘 막국수는 그때도 있었다. 어느 집 할아버지가 샛강 배를 운영하시면서 메밀국수를 하셨다. 옛날에는 메밀로 하는 손칼국수였다. 봉진은 강원도에서 온 사람이다. 그때 메밀국수는 비빔국수, 물국수, 뜨거운 국수 이렇게 있었다. 
 
남한강에 대한 추억이 있나?

지금의 이포보 자리가 그 전에는 여울이었다. 바지가랑을 걷고 건너면 허벅지밖에 안 왔다. 6.15 전쟁으로 피난 갈 때 우리 아버지 지게에 걸터앉아 이포 여울을 건너갔다. 충청도 청주 어느 담배창고에서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이 태어났다. 우리 어머니 만삭의 몸으로 이포여울을 건너 청주까지 걸어갔다가 애를 낳아 업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포여울에서 투망질도 많이 했다. 초장하고 투망만 들고 가면 바로 그 자리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불거지(모래무지), 꺾지, 쏘가리 이런 거가 많이 잡혔다. 한 번은 큰 황쏘가리를 한 마리 잡았는데 얼마나 큰지 네 토막을 내서 가져가 며칠을 먹었다. 
 
고향 땅을 다시 찾아온 계기가 있나?

고향이니까 왔지 별다른 이유가 있나? 고향에 어머니 아버지가 계셨다. 객지에서 지내면서도 수시로 고향에 내려왔다. 피혁개통에서 50년 넘게 일했다. 서울에서 사업하면서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고향에 있는 땅은 팔지 않았다. 서울에 취직해서 첫 월급도 다 시골집으로 보냈고 월남 파병 갔을 때도 번 돈을 다 집으로 보냈다. 그 돈으로 땅을 조금씩 샀는데 그 땅을 다 내 앞으로 해 두셨다. 공장이 좀 어려워서 팔려고 했는데 동네 후배에게 맡겼는데 그 동생이 “형! 형 땅은 내가 안 팔아. 형 그 땅 팔면 형이 시골에 안 올 거 아냐”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땅을 못 팔았는데 그 땅이 있어서 지금은 그 곳에 집도 짓고 잘 살고 있다. 고향에 내가 의지할 터가 있어야 한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20/09/24 [16:15]  최종편집: ⓒ 세종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현장] 사진으로 살펴보는 강천섬 관리 실태
가장 많이 읽은 기사
[2보] 라파엘의집 확진자 30명으로 늘어… 원주에서 확진자 가족 n차 감염 발생 / 송현아 기자
이천화장장 관련 여주-이천 시민사회 면담 진행… ‘입장 차’ 확인 / 송현아 기자
신철희 정치칼럼 21 - 주민 혐오 시설 논란과 우리의 자세 / 신철희
교육에서 일자리 창출까지… 자영농고, ‘미래형 직업학교’로 도약한다 / 송현아 기자
금사면 주록리 마을공동체 3곳 공동으로 성과공유회 열어 / 김영경 기자
“사람들이 찾아오는 ‘한글의 도시’ 여주를 꿈꾼다” / 송현아 기자
[여주마을 구석구석 36] 골목골목에 추억과 사연이 담긴 중앙동 창동 / 이재춘 기자
임규석 선수, 전국장애인사이클선수권대회 메달 2개 수상 / 김영경 기자
한국전쟁 전후 여주지역 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 열려 / 송현아 기자
여주농협, 드론으로 ‘라파엘의집’ 방역 실시 / 김영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