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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26] 강물과 전쟁으로 모습이 바뀐 강천면 이호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8/11 [17:48]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이호대교에 바라본 여주시 강천면 이호리 전경.     © 세종신문

이호리의 유래

이호리는 본래 강원도 원주군 강천면의 지역으로 마을 앞에 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고, 그 밑에 한강이 흐르므로 배미 또는 이암, 이호(梨湖)라 했다. 1906년에 여주군으로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문동, 지문동을 합하여 이호리라 했다. 지금의 이호1리 지역을 배미라 불렀고 배미쪽 마을로 이문이 있었다. 배미 동남쪽 마을로 거무낭골, 거문동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이호2리다. 거무낭골 양지쪽 마을은 양달말, 거무낭골 응달쪽 마을은 응달말이라 부른다. 

▲ 이호나루에서 바라본 이호대교.     © 세종신문
 
이호나루

이호나루는 강천면 이호리 배미마을에서 남한강 건너편의 여주읍 연양리를 연결하던 나루다. 이호나루는 이호대교가 생기기 전 42번 국도를 연결하는 나루로 자동차를 실어 나르는 배도 있었을 정도로 큰 나루였다. 이호나루가 있는 배미는 일제강점기 때 여러 채의 여관이 있었을 정도로 번창하여, 주민들은 ‘동대문 밖에선 제일 살기 좋은 동네’라고 자랑을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호나루 주변으로 술집이 있었고 양쪽으로 식료품, 석유, 소금, 생활필수품, 성냥, 초, 담배 등을 파는 가게가 4~5군데 있었으며, 자전거포와 이발소도 있었으며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있어 120~130호의 대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나루는 물살이 빨라 강변을 타고 약간 상류로 올라갔다가 건너편 나루를 향해 비스듬히 내려가는 식으로 운행했다고 한다. 이렇듯 번성했던 이호나루도 6·25전쟁이 끝나면서 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여주시 강천면 이호리 소재 목아박물관.     © 세종신문
목아박물관

목아박물관은 무형문화재 제108호인 목아 박찬수 관장이 수집한 6,000여 점의 불교관계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불교 전문박물관이다. 198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90년 4월 본관전시실을 완공하여 이호리에서 전통공예관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부속건물들을 건립하여 1992년 12월 문화부 등록 전문사립박물관 제28호로 지정을 받아 1993년 6월 12일 개관식을 가졌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된 전시관에는 불화, 불상 등의 유물과 함께 동자상을 비롯한 불교관계 목공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야외조각공원에는 미륵삼존대불, 비로자나불, 삼층석탑, 백의관음, 자모관음상 등이 서 있다. 박물관 소장의 「예념미타도량참법」, 「묘법연화경, 「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은 각각 보물 제1144호, 1145호, 114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그밖에도 불교사찰에서 전해 오던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어 매년 기획전과 특별전을 통해 유물들을 공개하여 불교문화와 미술을 일반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人터뷰] 원종익(86) 선생

이호리의 옛 모습은 어떠했나?

72년 대장마 후로 이 밑에 있던 집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내가 젊었을 때 어른들은 병자년 장마를 제일 큰 장마라고 했는데 그것보다 더 큰 72년 장마에 마을의 위치와 모습이 바뀌었다. 그전에 왜정 때 부락모습이 6.25사변 후 전부 바뀌었다. 사변 전만해도 이호나루에 도선이 지나다녔다. 그 당시만 해도 42번 국도에 다리가 없어서 차들이 배로 건넜다. 자동차가 도선으로 강을 건너다보니 이호나루 부근이 아주 번성했었다. 그 전에는 식당을 여관이라 했는데 여관들이 주욱 늘어서있고 정육점도 있었다. 수송선은 돛단배로, 목재는 떼배로 실어 날랐는데 이호나루는 배들이 정착해서 자고 먹고 하는 곳이었다. 강천면, 북내면 지내리 일대까지 장날이면 전부 이호나루를 통해 건너갔다. 그 많은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느라고 여기서 머물다 보니 장사진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 때는 아주 번창했었다.

▲ 여주시 강천면 이호리 원종익 선생.     © 세종신문

일제강점기 때도 생각나는 것이 있나?
 
강천국민학교를 왜정 때인 42년도에 들어갔다. 그때는 초등학교도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해야 들어갔다. 시험 보는 날 통지서가 와서 아버지와 함께 시험 보러 갔다.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선생이 공깃돌 세어 보라고 하고 테이블에 물건을 올려놓고 일본말로 뭐라고 하느냐 물어보고 그랬다. 그런 거는 다 대답을 했는데 수판(주산)을 놓고 이게 뭐냐고 물어보는데 처음 보는 거라 답을 못했다. 

그때는 초등학교 시험도 군인들 징병검사 받는 것 같았다. 키, 체중, 손가락 발가락, 팔다리 움직이는 거를 다 봤다. 그때는 강천국민학교가 4년제 보통학교였다. 그랬다가 6년제가 되면서 간매리로 간 것이다. 학교가 옮겨가면서 여기에 있던 학교자리에 면사무소가 들어왔다. 왜정 때는 초등학교 선생들이 그냥 군대식이었다. 선생이 그냥 막 뺨을 때리고 그랬다. 학년이 높아지면 검도도 가르치고 그랬어. 해방이 되고 한글을 써야 하는데 한글을 배우지 못해 한글을 몰라서 애를 먹었다. 내 이름이 ‘원종익’인데 ‘모도무라 쇼이끼’, 그러니까 성이 모도무라였다. 이름은 ‘종익’ ‘쇼이끼’라고 한문은 맞다. 성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 버렸다.

왜정 말기에는 대동아전쟁 일어날 그 시기니까 별걸 다 해오라고 했다. 초등학교 애들에게 관솔을 따오라고 그랬다. 그걸 모아가지고 송탄기름을 내서 군수품으로 사용했다. 여기도 박물관 옆으로 왜정 때 송탄기름 짜는 가마가 두 개가 있었다. 지금 숯가마처럼 되어 있는데 밑에 골을 만들어서 그 위에 관솔을 착착착 쌓아서 거기에 불을 놓고 가마를 틀어막는다. 그러면 그 골을 따라 송탄기름이 줄줄 나오는데 그거를 받아서 커다란 독에다 부어 모으는 것이다. 고사리도 꺾어 보내고 미루나무 열매에 솜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따와서 군대 이불 만들어 보내고 그랬다. 간매리로 올라가는 다리 난간이 왜정 때 쇠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왜놈들이 다 잘라갔다.

6.25 전쟁 때 이호리에 다리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있었다. 군인들이 후퇴하려고 놓은 다리였다. 6.25때 9.28수복을 하고 북진을 했었는데 1.4후퇴를 할 당시 강을 건너기 위해 101공병대가 가마니에 자갈을 넣어서 다릿발을 만들고 미루나무 켠 것을 가로질러 놓고 그 위에 모래가마니를 놓고 차가 지나다니게 했다. 그 당시 미군들은 나무다리 위쪽에 고무배다리를 놓았다. 고무배를 하나하나 연결하면 다리가 되는데 그 다리는 탱크도 건너다닐 수 있다. 미군들이 그거를 놓기 시작했는데 반쯤 놓았을 때 후퇴를 하게 되어 다 못 놓고 떠났다. 우리가 여기서 피난을 제일 늦게 나갔는데 군인들이 후퇴를 하면서 한국군은 다리를 끊지 않고 그냥 갔는데 미군들은 고무다리 놓던 거를 폭파시켜버렸다. 그 폭발이 얼마나 컸던지 한 번 폭발할 때 마다 우리 집 방문이 팍! 하고 열렸다. 깜깜한 밤인데 그 폭발음이 다리를 끊는 건지 인민군이 포를 쏘는 건지 알지 못해 방안에서 ‘다 죽었다’ 그러고 덜덜 떨고 있었다. 
 
6.25 전쟁 때 기억은 또 어떤 것이 있나?

전쟁이 나던 50년에 풍년이 들었다. 우리 집에도 방마다 볏섬을 쌓아두었다. 우리 할머니는 볏섬 지킨다고 피난을 안가셨다. 우리는 청주까지 피난을 갔다가 보은 쪽에서 미군 탱크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다시 돌아왔다. 그 추운 겨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한데에서 자고 그러니까 병이 났다. 청주에서 나와 밥도 못 먹고 눈만 퍼먹으면서 돌아오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여기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강이 설얼어 얼음이 바작바작해서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다른 마을을 찾아 다 떠나갔다. 그런데 아버지하고 나하고는 강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기 브라우 바로 위였다. 브라우 나루터에서 강 건너 이호리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가 까짓것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번 건너보자 이래가지고 둘이서 나섰다. 죽기 살기로 나섰다. 다행히 무사히 강을 건넜다. 요 아래 잔등에 올라서면 우리 집이 보는데 아! 거기 올라서니까 우리 집이 보이는 거야. 반가운 마음에 바삐 걸어 집에 와보니까 대문 앞에 비행기 폭탄이 떨어져 땅이 푹 파여 있었다. 마을을 폭격을 하니까 미군들이 노인들과 애들을 트럭에 실고는 강원도 저쪽 끝에 충청도 쪽 어딘가에 집이 한 채 있으니까 집에다 불을 놓더니 여기서 불을 쪼이며 있으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노인네들이 밤에 한데 있을 수 없으니까 인근 동네를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눈길을 헤치며 이호리로 찾아왔다. 

다릿골이라고 강천2리인데 얼어서 배도 못 다니는데 언 데는 얼고 물발이 센 데는 안 얼고 그랬다. 다행히 거기는 여울이 있어서 깊지는 않으니까 그 얼음물을 헤치고 건넜다. 옷이 다 젖고 그러니까 사공들이 자는 뱃막에서 옷을 말리고 하룻밤을 자고 집으로 오는데 미군들을 만나면 또 붙잡아 멀리 갔다 버릴까봐 저 위 걸은리 쪽으로 산길로 돌아서 마을에 왔다고 하였다. 눈이 이렇게 쌓여 있는데 말이야…. 우리는 피난 갔다가 돌아왔는데 할머니가 안계셨다. 부락 노인네에 가서 얻어먹고 이틀 밤인가 자고 나니까 우리 할머니가 오셨다. 그때 우리 할머니 연세가 일흔 셋이었다. 
 
인민군이 이호리에 들어왔을 때 어땠나?

6월 25일에 전쟁이 나고 여기 여주에 6월 29일이나 30일 쯤에 걔(인민군)들이 들어왔으니까 9.28수복까지 딱 3개월 걔들 정치를 받았다. 의용군(인민군이 남측 민간인으로 구성한 군대)을 17세부터 끌어갔는데 나는 16세였기 때문에 의용군에 해당되지 않았지만 우리 형님은 의용군 해당자였기 때문에 피해 다녔다. 사실은 지방 빨갱이들이 못되게 굴었다. 옛날 머슴들 이런 사람들이 나서서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 전에 우리 아버지도 왜정 때부터 단체생활을 했다. 해방 전에는 경방단이라 했고 해방 되고는 민보단에서 활동을 하셨는데 그 단체장을 우리 아버지가 많이 하셨다. 해방 후 민보단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남로당 출신 지방 빨갱이들을 잡으러 다닐 때 우리 아버지도 같이 다니고 그랬다. 그런데 인공이 시작되고 지방 빨갱이들은 우리 아버지가 못마땅했던 거다. 그래도 아버지가 특별히 잘못한 게 없어서 잡아가둘 구실이 없었는데 수복되기 얼마 전에 뭐를 조작한 거야. 6.25전에 우리 할머니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충청도 사람인데 순경으로 발령이 나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게 화근이 되었다. 음력 7월 8월 이때인데 별안간 쌀을 두 가마 내놓으라고 했다. 그 순경이 우리 집에 있을 때 강천지서 쌀을 두 가마를 우리가 먹었다고 하며 그거를 내놓으라고 한 거다. 죽인대도 쌀이 없으니 어떡해? 우리 아버지를 유치장에 가두었다. 강천지서가 요 아래 이호리 길가에 있었는데 그 지서 자리를 인민군이 내무서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 집이 가까 우니까 내가 밥을 날라다 드렸다. 다행히 내무서원 중 한명이 저 윗동네 사람인데 나보다 나이가 한 참 많지만 같이 학교를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내가 아버지 밥을 가져가면 반가워하며 ‘어! 아버지 때문에 왔어?’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 보고 얼른 나오시라고 해서 밥을 잡숫고 들어가시게 하고 그랬다. 그렇게 유치장에 일주일을 있었는데 용하게 우리 아버지 한 사람만 풀려나고 나머지는 다 여주로 넘겨졌다. 그때 여주로 넘겨진 사람들은 다 죽었다. 지방 빨갱이들이라고 해도 다 동네사람이거나 이웃동네 사람들이라서 아버지 하고도 잘 알고 우리 할머니도 누구네 집 아들이다 그러면 다 알고 그랬다. 우리 아버지가 외아들이란 말이야. 우리 할머니가 그냥 맨날 가서 사정을 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 살려달라고. 그 빨갱이 집에 가서 빌고 또 빌고 그랬어. 강천면 인민위원회 위원장도 걸은리 사림이고 그 동생은 노동당 위원장이고 그랬다. 그 집 어머니가 또 우리 원 씨였다.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와 그 집 어머니도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다. 그러고 별안간 어느 날 밤에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시는 거야. 깜짝 놀랐지! “야야, 아무 소리 하지 말아라.” 이러시고 하룻밤 주무시고 그 이튿날 다른 곳으로 떠나신 거야. 아이고, 참….
 
1.4후퇴 때 이호리까지 중공군이 들어왔나?

1.4후퇴로 피난 갔다 오기 전에 중공군이 여기까지 들어왔다. 강 건너에는 미군들이 전투를 하려고 대비를 하고 있었던가봐. 우리 집에서도 마을 노인네들이 같이 있다가 미군비행기 기관포에 맞아 작은댁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노인네들이 방에서 벌벌 떨고 있다가 작은댁 할아버지가 갑자기 다락에 껑충 뛰어올라가더니 별안간 다락문짝하고 방으로 굴러 떨어지더라는 거야. 그래서 보니까 기관포에 맞은 거야. 그 비행기 기관포는 총알이 크고 용서가 없거든. 그냥 거기서 돌아가시니까 노인들이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다 밖으로 나가신 거야. 전쟁이라는게 그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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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8/11 [17:48]  최종편집: ⓒ 세종신문
 
푸른산 20/08/30 [08:13] 수정 삭제  
  여주 고을의 깊은 이야기가 실타래 풀리듯합니다. 유익한 기사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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