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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22] 하늘 아래 첫 여주 마을 금사면 주록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7/08 [17:18]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해월 최시형 선생 묘.     © 세종신문

주록리의 유래

주록리는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여주의 마을 중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 마을 앞에는 주록천이 흘러 시민들의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노루목, 도실, 아랫말, 안가지골이 있다. 노루목은 주록거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인가가 별로 없었고 노루들이 사냥꾼들에 의해 쫓기면 항상 이곳에서 만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도실은 안산의 웃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승려들이 도를 닦았던 곳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아랫말은 안산 아래쪽에 있고, 안가지골은 안산 도실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주록리는 아주 옛날에는 주록거리라고 불렸는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지명이 주록리로 바뀌었다.   
 
해월 최시형 선생 묘

주록리 산96-19에는 향토유적 제8호인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의 묘가 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경주 출신으로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19세에 결혼을 하고 28세에 경주 마복동으로 옮겨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이곳에서 집강으로 뽑혔다. 1861년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도통을 승계 받았다. 최제우 순교 이후 동학의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여 신도의 교화 및 조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동학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였고 조정(고종)에 탄압을 중단하고 교조 인정을 요구하는 합법적인 투쟁인 신원운동을 전개했다. 1894년 1월 전봉준이 전라도 고부 관아를 습격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신도들의 뜻에 따라 4월 충청도 청산에 신도들을 집결시켰고, 9월 전봉준이 다시 봉기하자 적극 호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되자 피신 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진력을 하다가 1897년에 강천면 도전2리 피신처에서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이듬해인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교수형을 당하였다. 사형집행 후 송파에 가매장된 시신을 이종훈 등이 몰래 수습하여 이곳에 매장하였다고 전한다. 주록리 마을 주민들 속에 전해오는 얘기로는 해월 선생이 사형 전에 자신이 처형되면 천덕봉 아래 소시랑 고개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 독립운동가 엄항섭 생가터.     © 세종신문

독립운동가, 엄항섭 생가터
 
엄항섭 선생은 1898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90번지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영월, 호는 일파(一波)이다. 1919년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다녔는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국무원 법무부 참사로 임명되고 임시의정원의 지역대표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경기도 여주군 담당 국내 조사원이 되었다. 1922년 항저우 지강대학에서 수학하고, 김구 선생의 의정활동을 보좌하였다. 1931년에는 상해 한국교민단의 의경대장이 되었고, 자활자위를 목적으로 하는 공평사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맡았다. 1941년 다시 의정원 의원이 되어 외무위원장직을 맡았으며, 1944년 5월 임시정부 국무원 선전부장과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23일 임정 요인으로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으로서 김구 선생을 보좌하였다. 1948년 4월 20일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가 ‘남북연석회의’와 ‘남북요인 15인 회담’에 참석하고, 대회결정서인 ‘4월 30일 공동성명’ 초안작성위원(7인)에 선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가 독자적인 통일방안을 표명 하는 등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 노무현대통령 기념 조림지 표지석.     © 세종신문
 
노무현 대통령 기념식수 비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에 체험마을 현장실사 차원에서 주록리에 왔다갔다. 2005년 당시 주록리 이연목 씨는 농촌체험마을 전국회장을 하였다. 서울종합운동장에서 전국의 10만 명이 모여 행사를 했는데 그 때 노무현 대통령이 이연목 씨에게 “주록리는 특색이 뭐가 있냐?”고 물어 이연목 씨는 “저희 마을은 체험마을을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애기울음소리가 납니다”고 했다. 그랬더니 노무현 대통령이 애기울음소리가 난다는 말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회가 되면 주록리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며 약속했다. 당시 특별한 행사 없이 산골마을에 나올 수 없었던 대통령은 2006년 4월 5일 식목행사를 명분으로 주록리에 찾아와 나무도 심고 체험마을을 돌아보면서 마을의 실상을 살피고 갔다. 대통령이 식목행사를 위해 마을을 찾은 것은 주록리가 처음이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체험마을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 당시 문재인 비서실장도 같이 왔는데 지금은 대통령을 하고 있으니 ‘주록리에 대통령이 두 분이 왔다 갔다’고 주민들은 자랑스러워한다.   

▲ 시니어 공동 주거공간 ‘노루목 향기’     © 세종신문

시니어 공동주거 공간 ‘노루목 향기’
 
이해옥(67), 심재식(67) 씨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대학 교수의 초대로 주록리 노루목에 있는 조각 작업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 교수의 작업실 일대 땅 400평이 놀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마침 그 당시 심재식 씨가 충북 청주에 땅을 사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청주는 서울에서 너무 멀어 노루목 땅을 사게 되었다. 2009년 심재식 씨가 지금의 ‘노루목 향기’ 터에 집을 지었고 마침 그 당시 이혜옥 씨도 함께 살던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 몸이 되어 같이 노루목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집을 짓고 3년 동안 주변을 꾸미고 정리하며 주록리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2012년에 주록리 주민들이 여주군 행사에 풍물공연을 나가는데 함께하자고 해 같이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마을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혜옥 씨는 2015년 민간자격증인 난타자격증의 취득하고 마을주민들과 함께 난타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산북성당 성탄제에서 공연을 하고 옹천박물관 수사들에게 1년 동안 난타를 가르치기도 하며 마을 난타동아리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갔다. 

경기도에서 추진하는 ‘베이비부머창업학교’에 여주에서 세 팀이 되었는데 그때 ‘시니어 공유 공간서비스 노루목향기’라는 이름을 생겨났다. 2017년에 아랫마을에 살던 한 사람이 갑자기 집이 팔렸다. 동네사람이니 다시 집을 살 때까지 같이 살다가 나가기로 했다. 같이 살다 보니 세 명이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그냥 계속 같이 살자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노인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2020년에는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작은 노인 생활공동체’의 표본을 만들고 확산해 나갈 것을 꿈꾸고 있다.   

[마을人터뷰] 이중철(83), 이연목(80), 강태희(78), 이대성(67) 선생

▲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이중철(83), 이연목(80), 강태희(78), 이대성(67) 선생.     © 세종신문

주록리는 어떤 마을인가?
 
여주에서는 하늘 아래 첫 마을이 주록리다. 체험마을로 지정받아 초창기 한창 때는 1년에 4만 명 정도 방문 했었다. 체험 오는 애들이 주록리라는 지명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그냥 ‘사슴마을’이라고 예명을 지었는데 지금은 사슴마을로 더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후반에 청주 한 씨들의 씨족사회로 주록리가 시작된 것 같다. 마을의 느티나무가 200년이 넘었으니 조선시대 말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20년 전에 전임 노인회장, 현 노인회장이 주록리로 귀촌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고 체험마을, 정보화마을을 만들어 새롭게 변화 되었다.
 
산골마을 주록리는 어떻게 살았나?
 
50~70년대 까지는 이천 장에 다녔다. 행정구역은 여주지만 생활권은 이천이다. 백고개를 너머 백사면으로 해서 이천을 다녔다. 이천 장까지 40리, 16km 왕복 32km다. 소 팔러 우시장에 가려면 새벽 2시에 쇠죽 쒀 먹여서 이천 장에 가서 소를 바꿔 집에 들어오면 밤 9시다. 어른들은 쌀 서너 말을 이고 장에 다니고 그랬다. 전기도 1976년도에 들어왔다. 금사면 지서장과 같이 전기 들여오자고 집집마다 설득을 하러 갔는데 세상 들어먹지 않았다. 저 너머 산북면 송현리에서 전기를 따왔다. 전봇대를 마을 주민들이 인력으로 세웠다. 동지섣달에 땅이 얼어서 팔 수 없으면 전봇대 세울 자리에 왕겨를 쌓아서 밤새도록 태워 땅을 녹이고 다음날 전봇대 세울 구덩이를 파고 그랬다. 
 
이중철 선생의 결혼이야기를 들려 달라

스물네 살에 도곡리에 사는 여자와 선을 봐서 결혼했다. 마을 형님의 중매로 신부 집에서 선을 봤다. 선 보는 날 혼자 그 집을 찾아갔다. 그때만 해도 결혼이라는 것이 어른들이 정하면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 없이 결혼을 하던 시대다. 선보는 날 처가에서 점심을 먹고 왔다. 신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어쩐지 기억도 없다. 가을에 선을 보고 그 해 겨울에 결혼을 했다. 그때는 결혼을 농한기에 했다. 우리 집에서 함 지고 가마 타고 처가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그날로 타고 간 가마에 신부를 태우고 집으로 왔다. 가마는 결혼을 한 어른들만 맬 수 있었다. 총각은 가마를 못 맨다. 사흘 후에 다시 처가로 인사를 가는데 ‘3일 도배기’라고 한다. 음식을 간단하게 준비해서 가는데 그날 저녁에 처가 동네 사람들에게 혼이 났다. 발바닥을 북어로 때리고 동네 총각들이 종이에 재를 싸서 던지면 재를 온통 둘러쓰고 그랬다. 장난이 심한 사람은 재에 고춧가루를 섞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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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7/08 [17:18]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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