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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21] 조선후기 고택이 보존되어 있는 대신면 보통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7/02 [10:50]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대신면 보통1리 전경.     © 세종신문

보통리의 유래

보통리는 본래 여주군 대송면 지역으로 보가 있는 모퉁이라 하여 ‘보퉁이’라 하기도 하고, 보자기혈에 위치한 마을로 가는 길이 보자기 속을 통과하는 것 같다 하여 ‘보통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강촌, 위안동을 병합하여 보통리라 하였으며, 자연마을로는 물개, 보통, 새터, 위안동, 한새울이 있고 보통1~3리의 행정리로 나누어졌다.

강촌은 물개보퉁이라고 하며 강가에 위치한 마을이고 보통은 마을 형상이 보자기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졌다. 새터는 옛날 윤 씨들이 새로 터를 닦고 살았던 곳이고, 위안동은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갈 때 주민들이 어린 단종을 위로하였다고 하여 위안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새울은 물개 북쪽에 있는 마을이고 새마을은 1972년 홍수로 양촌리 주민이 주택을 새로 짓고 이주한 지역이라 붙여진 명칭이며 지금의 보통3리이다. 

▲ 여주 보통리 고택.     © 세종신문

여주 보통리 고택
 
‘여주 보통리 고택’은 경기 동부지역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임진왜란 때 창녕 조 씨인 조경인이 전란을 피해 외가 무송 윤 씨의 터전 보통리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이조판서 조봉진, 독립운동가 조성환 등의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였다. 

독립운동가 조성환의 부친인 조병희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재산을 처분할 때 함께 매각하였고, 일제 강점기 때 춘천 출신 이윤종이 매입한 것을 1970년대에 김영구가 매입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2018년 여주시가 매입하여 보수정비 및 발굴조사를 통해 문화재의 원형을 회복했고 마을 주민과 관람객들을 위한 휴식·체험·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1999년 5월 안채의 수리 공사 중에‘崇禎紀元後三年癸酉二月二十七日巳時上樑壬坐丙向’이라는 상량문이 확인됨에 따라 1753년(영조29) 전후로 고택이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택의 동쪽으로 나즈막한 언덕이 있고, 서쪽으로는 남북으로 난 마을길이 있다. 여주 보통리 고택의 평면은 남동향의 ‘ㄷ’자형 안채와 ‘ㅡ’자형 큰 사랑채, ‘ㅡ’자형 작은 사랑채, ‘ㅡ’자형 헛간채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는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마을길에서 가옥으로의 진입은 서쪽에 기와를 쌓아서 만든 담에 난 작은 문을 이용하거나, 가옥의 남쪽에 2단으로 된 텃밭을 좌측에 끼고 돌아 진입한다. 한편 안마당으로의 출입은 이중 대문이 달린 대문간을 이용하거나 작은 사랑채와 큰 사랑채 사이에 난 작은 대문을 이용한다.

안채의 중심은 안방과 대청이다. 일반적으로 ‘ㅁ’자형 가옥에서 안방은 ‘ㄱ’자로 꺾이는 측면에 자리를 잡는 것에 비해, 여주 보통리 고택은 그 자리에 부엌을 두고 안방과 대청을 중앙부에 두었다. 안채의 뒤편과 동쪽 기단 위에는 안채의 외벽에 면하여 쪽마루가 있으며, 안채의 좌측 부엌 상부에는 통나무 널을 깔아 다락을 꾸며 수장공간으로 사용했다. 작은 사랑채 앞에는 바깥마당이 있으며, 안채 뒤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담 없이 트여 있다. 안채의 북서쪽 담 모서리에는 창고와 광, 헛간으로 구성된 헛간채가 있다. 가구는 삼량구조이고 지붕은 시멘트 기와를 올린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큰사랑채의 남쪽 텃밭은 행랑채와 행랑마당이 있던 곳으로, 행랑마당 중앙에는 정자가 있었으며, 행랑채 우측 곽선영 가옥 사이에는 큰 대문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경기도 민속자료 제2호인 여주보통리해시계.     © 문화재청

특이한 점은 사랑채 돌계단 옆에 해시계가 놓여 있는데 하나의 화강석으로 높이 76㎝, 수평면의 폭은 25㎝이다. 수평면 위에 무슨 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 없다. 세종 16년(1434) 장영실이 태양의 그림자 방향을 따라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한 해시계가 처음 만들어졌는데, 이 해시계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기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 보통리 샘터.     © 세종신문

수백 년을 지켜온 보통리 ‘샘물’
 
보통리 샘물은 마을 아래쪽에 샘이다. 임진왜란 때 윤 씨 부인이 이곳에서 물을 긷는데 왜병이 희롱하자 그의 칼을 빼앗아 자결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샘물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데 풍수상으로 ‘원진수’ 또는 ‘진웅수라’고 하여 귀하게 여기는데 물은 땅의 기운을 머무르게 하고 생육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고 한다. 주변의 낮은 산에 보자기처럼 둘러싸인 보통리의 각 골짜기로 스며든 물이 이 샘터에서 샘솟는데 수백 년 동안 마을 주민들이 이 물을 먹고 살았다고 한다. 

보통리에서 나고 자란 신영희 씨의 말에 따르면 이 샘터가 마을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쌀이 귀해서 보리밥을 해 먹었는데 새벽이면 마을 여인들이 샘에 빙 둘러 앉아서 보리쌀을 씻었다고 한다. 보리쌀을 오지그릇에 담아서 뽀얗게 될 때까지 억이며 씻었다는 것이다. 보리쌀을 억이며 씻어 삶고 쌀을 조금 넣어 다시 가마솥에 안쳐서 밥을 짓는데 보리에 쌀이 엉겨 붙어 밥을 푸면 고슬고슬해지며 구수한 맛이 났다고 한다. 
보통리 샘물은 생활이 곤란한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고 동네사람들의 소통의 공간이었으며 목마른 사람에게 샘물 한 바가지의 정을 전하는 인심이 흐르는 곳이었다. 

▲ 보통1리에서 2리로 넘어가는 서낭당고개.     © 세종신문

왕자바위와 서낭당고개
 
보통리는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중 가장 높은 왕만산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전설의 왕자바위가 있다. 옛날 한 나라의 공주가 괴한에 납치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다. 공주를 사랑하던 이웃나라 왕자는 공주를 구하려고 온 산천을 헤매 다녔다. 어느 날 산을 오르던 왕자가 이 바위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그때 독사 한 마리가 지나다가 왕자를 물었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은 왕자를 기리는 뜻에서 이 바위를 왕자바위라고 불렀다는 전설이다. 

왕만산 능선에는 보통1리에서 2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있는데 이 길을 마을 사람들은 서낭당고개라고 한다. 예전에 고갯길 마루에 당나무가 있었고 마을 주민들은 그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며 매년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人터뷰]  신영희(74) 여사

보통리가 고향인가?

1947년에 보통리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는데 지금은 친정 부모님들도 다 돌아가시고 해서 친정집이 헐렸다. 신랑은 나보다 다섯 살 위의 한동네 사람이었다. 대신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간에 그만뒀다. 일곱 살 때 담에서 내려 뛰었는데 땅을 짚어서 팔이 여러 군데 부러졌다. 우리 아버지 친구가 대신에서 의원을 하고 있었는데 산부인과 전문의였다. 아버지 친한 친구였던 의사가 나를 고쳐주겠다고 장담을 해서 맡겼는데 애는 잘 받아도 뼈 부러진 거 고치는 데는 송방(실력이 없음)이었다. 그때 내가 일곱 살이었지만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시멘트로 기브스를 했는데 여름이라 팔이 상했다. 그래서 지금도 한쪽 팔을 잘 쓰지 못한다. 미군들이 운영하는 부산 수녀병원까지 갔는데 살이 썩었다고 자르라고 했지만 겨우 치료를 했다. 장애가 생겼고 그 팔 때문에 창피해서 중학교를 다니다 그만 뒀다. 치마 옆을 뚫어서 그 속에 팔을 넣고 다녔는데 한 번은 가게에서 계속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으니까 물건을 훔쳤다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 

▲ 여주시 대신면 보통리 신영희(74) 여사.     © 세종신문

결혼은 언제 했나?
 
스물여섯에 결혼했다. 보통리에서 태어나 보통리 사람과 결혼해서 보통리에서 평생을 살았다. 우리 큰 언니가 서울 수유리에 살았는데 중학교를 중퇴하고 언니네 집에 몇 년 있었다. 서울에 있으면서 고향집에 왔다갔다 했는데 서로 아는 사이니까 스물 둘에 사귀기 시작했다. 5년 연애하고 결혼했다. 72년도 물이 크게 나던 해 가을에 결혼을 했다. 결혼식은 친정집에서 족두리 쓰고 했다. 그 때는 농사가 다 망가져서 도토리 따러 가고 그랬다. 원래 농사가 안 되는 해는 그래도 먹고 살라고 도토리가 많이 달린다. 나 결혼할 때는 곡식이 없어서 국수 대신 도토리묵을 쒀서 잔치를 했다. 삼형제를 낳았는데 아들 3형제가 다 대신농고 나왔다. 농사는 우리 땅에 남의 땅을 더 얻어 몇 만평 지었다. 일군들 밥 해 먹이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노는 성질이 아니다.
 
보통리에서 살아온 삶을 돌아보니 어떤가?

4대강 사업 하기 전에는 툭하면 물이 마을에 들어왔다. 저 아래 우물까지 강물이 들어왔다. 옛날에는 그 우물을 동네사람들이 다 먹고도 남았다. 스물여섯에 시집가니 시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만 살아계셨다. 우리 동네에 주인(남편) 형제 세집이 살고 있다. 큰 시아주버니, 넷째 시아주버니 우리 이렇게 세 집이 보통리에 살았다. 우리 큰 시아주버니가 올해 90이다. 우리 집은 일자 3칸 집이었다. 처음에는 방하나 부엌, 마루 이렇게 있었는데 우리가 가서 살면서 마루에 유리도 끼우고 부엌도 입식으로 하고 목욕탕도 새로 만들고 그랬다. 큰 아들, 둘째 아들이 육군하사관을 같이 가면서 직업군인이 되었다. 막내 아들은 원주에 살고 있다. 남편은 17년 전에 떠났다. 당뇨가 있었는데 어느 날 놀러 갔다 와서 자다가 아침 먹으라고 깨우니까 일어나지 않았다. 당뇨 있는 사람은 그렇게 자다가 심장마비로 간다는 거야. 아픈지도 모르고 자다가 그냥 가버린 것이다. 매달 아들이 집으로 찾아온다. 보퉁이 안에 모여 사는 보통리 사람들은 가족이나 한가지다. 지금은 마을회관에 함께 모이는 이웃들과 한솥밥을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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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7/02 [10:50]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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