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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20] 남한강 제일의 섬이 있는 능서면 백석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6/27 [00:24]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능서면 백석1리(구진벼루) 전경.     © 세종신문

백석리의 유래

백석리는 여주군 길천면 지역으로, 흰 돌이 있어서 또는 넒은 들이 있어 한들이라 불리다 한자로 백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개척동과 백석리를 합쳐 능서면에 편입됐다.

백석리는 남한강과 남한강의 지류인 양화천이 마을을 둘러싸고 흘러 농토가 비옥하고 물이 풍부한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구진벼루, 도룡골, 곱다리, 개척동, 섬말 등이 있었다. 구진벼루는 지금의 백석1리 마을로 장수가 아홉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도룡골은 용이 지나간 자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곱다리는 한 갑부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인근 마을에 영향을 미치고, 양화나루를 이용하는 인력 및 물산이 집하되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자, 옛날 읍의 한 곳이라 하여 고읍자리라 불리던 것이 변음 되어 유래된 지명이다. 개척동은 곱다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1952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온 피난민들이 정부의 뒷받침으로 국유지를 개척하여 이룩한 마을이다. 섬말은 곱다리 동쪽 섬에 있는 마을로 본래 육지였는데 강의 흐름이 변하면서 섬이 되었다고 한다. 백석리 동쪽에는 백석리섬과 대신면으로 오고가는 나룻터가 있었다. 

▲ 여주보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석리섬.     © 세종신문

남한강 제일의 섬 백석리섬

백석리 동쪽 남한강에 115만㎡(약 35만 평) 규모의 남한강 제일의 섬이 있는데 1960년대 초반부터 공군 제10 전투비행단 소속 사격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남한강 살리기 운동이 진행되면 여주군 이장협의회, 대한노인회 여주군지회, 여주군 여성단체협의회, 녹색성장실천연합, 여주JCI(청년회의소) 등으로 구성된 '여주 공군사격장 이전촉구 및 확장저지 투쟁위원회'를 구성해 반환운동을 전개했던 섬이다. 백석리섬 사격장은 2,500만 수도권 시민의 상수원인 팔당호 특별대책지역으로 남한강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에서 여주까지 연결된 자전거 도로 위로 군용기가 날아다니고 생태벨트 등 친환경 수변구역 한가운데 훈련탄이 쏟아지는 사격장이 그대로 있어 여주지역의 오랜 과제로 남아있다. 

백석리섬은 1961년부터 50년이 넘게 포탄과 기관포 사격연습을 하여 왔는데 최근에는 주민들의 반발로 기관총 사격은 하지 않고 포탄 투하 훈련만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1981년과 1990년에는 유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 공군 제10전투비행단 사격장으로 되어있는 115만㎡의 백석리 섬을 여주시가 관리운영권을 가져와 지역사회와 여주시민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민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백석리섬이 여주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당낭리섬, 양촌저류지, 양섬, 강천섬과 함께 여주발전과 여강 생태탐방의 새로운 명소가 되기를 주민들은 염원하고 있다. 

▲ 능북초등학교 전경.     © 세종신문

실향민을 위한 학교로 출발한 능북초등학교
 
능북초등학교는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백석리 산 11번지에 위치한 공립초등학교이다. 6.25전쟁을 겪으며 지금의 백석2리에 이북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학교다. 인근의 왕대리, 백석리, 구양리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특수학급을 포함하여 전체 6학년 7학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으로 독서, 종이접기, 영화감상, 창의력 신장 게임 활동 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기적성교육으로 그리기부, 컴퓨터부, 풍물부 등 6개 부서의 활동이 운영되고 있다. 
 
교훈은 열린 마음으로 꿈을 가꾸는 능북 어린이, 교목은 향나무, 교화는 개나리다. 1956년 4월 1일 능서국민학교 장수분실로 설치 되었다가 1963년 6월 13일 5학급으로 능서국민학교 능북분교장 인가를 받았다. 1963년 7월 1일 능서국민학교 능북분교장 개교하고 1964년 3월 2일 7학급으로 능북국민학교 개교식을 진행헀다. 1996년 3월 1일 능북초등학교로 개칭하였다.

마을의 원주민들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는데 마을에 아이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아 능북초등학교 학생수도 나날이 줄어 들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롭게 이사해 들어오는 젊은 가정이 늘어나고 학교에 대한평가가 좋아 일부러 능북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이사를 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마르지 않는 구진벼루 샘물
 
백석1리 마을회관과 북서쪽 마을 사이에 들판에 수백 년이 넘게 내려온 마을 공동 우물이 있었다. 구진벼루 공동샘물이다. 들판 한가운데 맑은 샘물이 솟아났는데 가뭄이 아무리 심하게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한겨울에도 얼지 않았다고 한다. 구진벼루 마을 사람들은 수백년이 넘게 그 샘물을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른 새벽이면 마을 여인들이 샘가에 모여 앉아 보리쌀을 씻었는데 지금은 그런 풍경을 찾아 볼 수 없다. 집집마다 관정을 파고 상수도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구진벼루 샘물을 이용하지 않아 지금은 메워 논이 되었다고 한다. 

▲ 여주시 능서면 백석리 황운구 선생.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황운구(73) 선생
 
백석리가 고향인가?

나는 48년에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6.25 전쟁 치르고 여기 백석리로 나왔다. 우리는 원래 함경 원산 사람인데 8.15 해방 직전에 강원도 영월로 내려왔다. 우리 큰형, 둘째형은 함경도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안은 8.15해방 전에 내려왔다. 원산에서 살던 문중 50여 가구가 싹 다 내려왔다. 이북은 공산당이 되니까 자유민주주의를 찾아 내려왔다. 어릴 때 들은 어른들 말로는 영월로 내려와서 옥수수밥, 감자밥 이런 거를 먹다 보니 도저히 못살겠다며 우리 큰형 처가는 다시 원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우리 둘째 할아버지는 6.25전에 여주 구양리에 와서 살았다. 그곳에서 서당을 차리고 한문을 가르쳤다. 그 할아버지가 여주가 살만하다고 해서 영월에 있던 우리 집안 전체 50여 가구가 다 여주로 이사를 왔다. 전쟁 끝나고 바로 왔다.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8.15 해방 전부터 이북은 공산당이 점조직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공산당에 가입하는 도장을 엄지손가락으로 찍고 그 서류를 비밀리에 철함에 담아서 땅에 묻고 그랬다는 말을 들었다. 그 시절에는 서울 다음으로 부산, 원산이었다. 원산 근처에 살다가 강원도 영월을 거쳐 백석리로 왔다.

백석리에 피난민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나?

백석2리에 피난 온 황해도민들이 개척단을 만들어 모여 살았다. 그 중 돈 있는 사람들은 황해도 고향근처인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황해도민이 빠져나간 자리에 이남의 어려운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 강원도 화전민을 박정희가 내 보낼 때 밭을 논으로 만들고 불하를 받고 그랬다. 백석2리 쪽에는 우리 작은아버지, 5촌 당숙, 큰형, 작은형이 살았다. 백석2리 일대에 피난민들이 350세대가 모여 드니까 그 집 아이들이 다 학교를 갈 수 없어서 군용천막을 치고 능서초등학교 분교인 능북초등학교가 생겼다. 
 
백석리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았나?

나는 능서초, 여주중학교 졸업하고 군에 다녀온 후 능북초등학교 기사를 78년부터 시작했다. 여주중학교를 거쳐 능서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 퇴직했다. 초등학교도 2년 늦게 들어가서 동창들이 다 나보다 두 세살 어리다. 중학교 졸업하고 막노동도 하고 기타를 좋아해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흥천, 북내 신접리 등에 다니면서 추석 때 마을 콩쿠르에 반주도 해주고 그랬다. 그 때 친구들이 코리아나 호텔에서 연주하다 1군사령부 군악대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제대 하니까 그 친구들이 나보고 밴드를 만들어 요정 같은데 가서 일하자고 했지만 나는 거절하고 능북초등학교 기사로 들어갔다. 나는 학교에 들어가서 성공했다. 특히 조경 분야에서는 나를 따를 사람이 없다. 정년퇴직하고 분재 국화를 했다. 
 
삶의 신조가 뚜렷한 것 같은데?

우리 집안은 자체의 정신세계가 있다. 우리 집안은 율곡선생을 따른다.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실 때 까지 상투를 틀고 계셨다. 일제 시대에도 상투를 자르거나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셨다. 황고집이라고 우리 집안만의 정신세계가 있다. 그게 우리의 긍지고 자존심이다. 우리는 기본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일년 열두달 단 하루도 빼 놓지 않고 마당에 태극기를 게양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절대로 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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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27 [00:24]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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