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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19] 선사시대 쌀 출토된 점동면 흔암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6/18 [14:34]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흔암리 나루터 옆에 고목으로 서 있는 홰나무(가운데).     © 세종신문

흔암리의 유래

흔암리는 본래 여주군 근동면 지역으로 마을에 흰 바위가 있어 흰바위, 흔바위, 또는 백암, 흔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처동 일부와 점량면의 도리 일부를 병합하여 흔암리라 해서 점동면으로 편입되었다.

흔암리는 흔바위와 동마루,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예전 마을(지금 마을은 72년 대홍수로 이전한 곳) 앞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안산이 있고, 이름 없는 바위산인 마을 뒷산은 급한 경사로 남한강과 접하고 있으며 그곳 강변에 좁은 공간이 있어 ‘우산절’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서 선사주거유적이 발견되었다. 마을 앞 중심부에 있던 흰바위는 인근 멱곡리 김참판네가 상석으로 쓰기 위하여 채석해갔다고 한다. 점동면 처리에서 흔바위로 통하는 길 옆 야산에 집이 몇 채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여기를 동마루라 부른다. 동마루의 위치는 서편에 넓은 가마뜰에서 바라볼 때 동쪽의 야산지대로 그 형세가 가마뜰보다 다소 높은 지역이므로 동쪽의 ‘마루터기’라는 뜻에서 동마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남한강 물굽이를 따라 흔암리 나루터 뒤편에 수백 년 된 홰나무가 자리 잡고 있으며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인근 처리, 삼교리, 멱곡리, 굴암리 등의 부락 주민이 모여서 이 홰나무 아래에서 줄다리기 등을 실시하여 풍년과 태평성세를 기리었다. 

▲ 여주시 점동면 흔암리 선사유적지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움집모형.     © 세종신문
 
선사시대 유적지

흔암리 선사유적은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발굴조사를 통해 20여 기에 이르는 집자리 유적과 다수의 유물과 불탄 곡식 등이 발견되었다.

집자리 유적은 남한강가에 인접한 흔암리 마을의 구릉지에 등고선의 흐름에 따라 남북 향으로 마련되었다. 집자리는 화강암반을 ㄴ자로 파고 지붕을 씌운 형태이며, 내부에서 화덕자리, 저장구덩이, 기둥구멍들이 확인되었다. 토기는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등이 발견되었고, 돌칼, 반달돌칼, 바퀴날도끼, 돌도끼, 돌화살촉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흔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불탄 쌀은 연대가 최소한 BC 7세기까지 올라가는 것들로 확인되어 청동기인들이 당시에 농사를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흔암리 유적은 동북지방의 구멍무늬토기·골아가리토기와 서북지방의 팽이형토기의 두 계통의 토기가 한꺼번에 나타나는 이른바 흔암리형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독자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는 유적이다. 

흔암리 유적에서는 탄화된 쌀과 함께 조, 수수, 보리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흔암리 집터에서는 쌀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곡식이 나와 혼합농경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와 비교되는 유적으로 평양 남경유적을 들 수 있다. 흔암리 유적의 연대는 지금까지 다른 유적과 비교해 볼 때 많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유물을 통한 비교결과 중심연대를 BC 7세기경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값으로 다시 계산하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속하는 몇몇 집터는 BC 16세기경으로 밝혀지고 있어 흔암리 유적은 한강유역권의 민무늬토기유적 가운데 이른 시기에 속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유적은 어느 한 시기에 형성된 유적이 아니라 서로 겹치는 집터·출토유물 그리고 연대측정값으로 보아 긴 기간 쭉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고 있다.

▲ 흔암리 나루터. 강 건너 강천섬과 굴암리가 보인다.     © 세종신문
흔암리 나루터

흔암나루는 ‘흔바우나루’라고도 불렀다. 나루터 건너편은 강천면 굴암리며 나룻배로 왕래하였다. 흔암나루에는 나룻배와 작은 배가 각각 한 척이 있었다. 이 나루에는 수운을 이용해 짐배인 황포돛배가 다녔는데 이 돛단배는 쌀을 100여 가마 실을 정도였다. 쌀은 안성·평택에서 마차에 싣고 이 마을 고살래길로 와서 배에 싣고 서울로 내려가서 팔았다. 그리고 강원도 영월에서 오는 배는 뗏목을 싣고 지나간다. 뗏목은 굵고 가는 칡넝쿨로 엮어서 만들었고, 이는 건축과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강원도에서 내려온 뗏목들은 강천섬 자갈밭에 길게 세워두고 뗏목꾼들은 흔암나루로 와서 휴식을 하거나 술추렴을 하였다. 나루 근처 펀펀한 언덕배기에는 술집이 두 집 있었는데 낮에 내려가는 배에서 술을 달라고 하면 주막집에서 술을 가지고 가서 팔았다. 뗏목이 내려가고 짐을 싣는 날에는 보통 소를 한 마리씩 잡았는데 이는 장사를 하기 위한 것으로 그만큼 흔바우나루가 번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쉬(수렁)에 빠지면 여주 흔암리가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전에 흔바우나루는 유명하였고, 당시 “여주 흔암리를 모르면 건달 축에 못 들어간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유엔군이 잠깐 머물기도 했던 흔암리 나루터는 1950년대 후반에 없어졌다.

▲ 마을회관에 걸려있는 1987년 쌍룡거줄다리기 사진.     © 세종신문
 
홰나무와 쌍룡거줄다리기

흔암리에서 전승되는 쌍룡거줄다리기는 1987년 제2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민속놀이다. 줄다리기는 3년마다 다렸으며 놀이의 목적은 수운(水運)의 안녕을 위한 것으로 일종의 물고사를 지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줄다리기 하는 시기는 정월 보름날 밤, 저녁 식사 후에 시작하였다.

줄 제작은 정월 대보름 사흘 전, 즉 음력 1월 12일부터 시작하여 보름날까지 한다. 줄의 재료인 짚은 각 집에서 추렴하며, 줄은 흔암리 아랫말, 웃말에서 각각 하나씩 만드는데 웃말은 암줄, 아랫말은 숫줄을 만든다. 줄을 만들 때는 두레패들이 크게 놀았는데 정월 초이튿날부터 마을을 다니며 놀았다. 이때 남자들은 줄을 제작하고 여자들은 음식 준비를 하였으며 줄다리기를 할 때는 돼지를 잡는다. 줄 만드는 방법은, 나무를 삼각형 형태로 매달아 세우고 가로목을 질러 놓고 새끼로 묶어 양쪽에 세워 놓는다. 밑에서는 사람이 꼬는 대로 잡아당긴다. 한 사람이 짚을 주면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꼬고 한쪽에서는 잡아당긴다. 완성된 줄의 크기는 양쪽을 모두 합하면 100~150m에 이르고, 줄 메는 사람이 360명 정도 소요되는 큰 줄이다.

줄을 다 꼰 뒤에는 정월 대보름날 아랫마을 홰나무 밭에 모인다. 대보름날 아침에 줄고사를 지내는데 가장 먼저 고산래고개에 있는 서낭당에서 서낭고사를 드린다. 그런 다음 산등을 타고 내려와 동네 우물(당시60 호 이상 사람들이 모두 이 물을 먹었음. 지금은 마을이 옮겨가면서 메워졌다)에서 우물고사를 지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고사를 지낸다. 제물은 북어와 막걸리이며 소임(1년 동안 동네일을 하는 사람)이 준비한다. 줄다리기는 강가의 언덕의 홰나무가 있는 널찍한 밭에서 다렸다. 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양쪽에서 줄을 메고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어르는데 중간에 쉬어가면서 계속한다. 이때 농악이 함께 어울려 논다. 암줄의 용머리가 도망가면 숫줄이 쫓아가고 하면서 서로 어르고 놀다가 암줄 용머리 속에 숫줄을 넣고 가운데 막대기를 꽂는다. 그런 뒤 소임이 ‘하나, 둘, 셋!” 히는 구령에 따라 줄을 당긴다. 줄다리기의 편제는 암줄과 수줄로 나뉘며 처리, 삼교리, 멱곡리, 굴암리, 강천리 등 4~5개 부락이 참여하였다. 암줄은 여자들과 20세 이하의 젊은이들이, 숫줄은 20세 이상의 청장년들과 노인들이 당겼다. 승부는 3번 줄을 당겨 정하였는데 항상 암줄이 이겼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여자들은 만세를 부르고 즐거워하였다. 줄을 당길 때도 농악을 치고 논다.

흔암리 쌍룡거줄다리기의 전승이 흔암리 마을의 여건상 지속하기가 어려워 현재는 줄의 규모를 줄여서 흔암리에서 전승하고 있으나 줄을 멜 젊은이들이 별로 없어 어려운 실정이다.  

[마을人터뷰] 흔암리 김광식(65) 이장

▲ 여주시 점동면 흔암리 김광식 이장.     © 세종신문

흔암리에서 태어났나?
저 건너 처리가 고향이다. 흔암리에서 살기 시작한 지 30년 되었다. 30년이면 흔암리가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30년 전에 흔암리에서 살기 시작 할 때 땅을 천 평 정도 사서 집 짓고, 우사도 짓고, 고구마 창고 짓고 해서 살고 있다. 잘은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을 다해 소신껏 하고 있다. 
98년부터 고구마 농사를 하다 2007년도부터는 고구마가 돈이 안 되어서 한우로 돌려 지금까지 번식우 열일곱 마리 키우고 있다. 논농사2천 평, 밭농사 8천 평 농사도 같이 짓고 있다. 밭농사로 잡곡을 짓는데 여주에서 잡곡을 전문적으로 짓는 사람은 흥천면에 한 사람과 나 이렇게 두 사람이 있다. 
 
흔암리에 터전을 잡게 된 계기는?
결혼하고는 많이 어려웠다. 집 한 칸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다. 당시 흔암리에서 농장 관리를 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흔암리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살았다. 땅을 보러 다니는데 지금의 집터가 내 마음에 꼭 들었다.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그 땅을 봤다. 겨울에 땅을 보러 왔는데 지목이 밭인데 논농사를 짓고 있었다. 간밤에 서리가 내려서 그 서리가 햇볕에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게 내가 꿈에서 본 그 땅이었다. 그래서 일시불로 지급하고 바로 샀다. 집 30평, 창고 70평, 축사 100평, 전략이라는 것이 몸에 베이도록 열심히 살았다. 
 
마을이장으로서 흔암리의 숙제는 무엇인가?
마을 앞 도로 확장공사를 3년 동안 하고 있다. 확장공사가 마을 안 도로를 따라 강가까지 내려갔어야 하는데 내려가지 못했다. 시에서 설계를 할 때 마을 사람들이 전혀 모르게 진행해서 실정에 맞지 않게 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이 건의도 하고 설명회도 듣고 하면서 겨우 1m를 더 넓히는 것으로 협의를 했다. 인도도 선사유적지로 올라가는 인도인데 길을 건너야 한다. 마을의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다. 선서유적지 관리도 너무 소홀하다. 흔암리 선사유적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유적인데 움집 모형만 하나 만들어 놓고 유적지 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시급하게 대책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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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18 [14:34]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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