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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18] 화합 잘 되고 인심 넘치는 가남읍 오산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6/10 [15:18]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가남읍 오산리 전경.     © 세종신문

오산리의 유래

가남읍 오산리의 ‘오산’은 대포산, 신통산, 강금산으로 이어지는 오갑산 줄기에 있다. 
오산은 원래 소개면의 지역으로 약 500여 년 전 서산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논 한가운데 있는 둥그런 외딴 바위산을 보고 이 산이 마치 자라 모양 같다 한데서 큰 자라 오(鰲)자를 써서 오산(鰲山)이라 하여 마을 이름도 오산동(鰲山洞)이라 하였다.

그 후 1770년경 이 산 바위에 까마귀가 많이 앉는다 하여 까마귀 오(烏)자를 써서 오산(烏山)이라 하고 따라서 마을이름도 오산동(烏山洞)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쓰기 쉬운 다섯 오(五)자를 써서 아무 의미 없는 오산리(五山里)로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 오산동 아랫마을은 아래모퉁이, 윗마을은 웃모퉁이라 하였다. 지금의 오산초등학교 뒤 마을은 예전에는 없다가 새로 생겼다고 하여 새말이라 하였다. 그 외 아래모퉁이 골목길을 고사테, 오산초등학교 앞 길 건너를 공개, 서쪽마무 있는 곳을 해너머거리 라고 하고 마을 앞들에는 경지정리 하기 전에 유산샘물, 새움물, 긴배미, 물방아거리가 있었다. 

오산리는 현재는 70가구 240명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에 초등학교, 보건진료소, 시설어린이집이 있다 보니 인구가 인근 마을에 비해 많은 편이다. 농사는 예전부터 벼농사를 많이 지었다. 

▲ 마을 앞 논 한가운데 있는 바퀴산(오산).     © 세종신문
 
바퀴산의 전설

오산마을 앞 논 가운데 있는 바위산을 자라 같다 하여 오산(鰲山)이라 하였는데 바퀴산이라고도 하였다. 

바퀴산은 마을 앞 들 가운데에 있는 작은 산(약 300평정도)으로 못자리를 해 놓고 모를 심기까지 잠시 짬이 나는 때나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농악놀이의 장소로, 여름철에는 천렵의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다.
 
아주 옛날 큰 장마가 져서 이 산이 떠내려 왔는데 산 모양을 만들고자 한 노파가 치마에 돌을 싸서 나르다가 마지막 돌은 치마가 찢어져 못 날랐다고 한다. 그 바위는 바퀴산에서 동남쪽으로 150여보 떨어진 논 가운데 있었는데 1980년에 경지정리 할 때 그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 바위가 있었을 때는 여름밤에 앞개울에서 목욕을 하고 이 바위에 앉아 있으면 햇볕에 바위가 달구어져 따뜻했다고 한다. 바퀴산의 가랑잎이나 식장구로 천렵을 하면 괜찮은데 나무를 꺾는다든가 땔감을 해 가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바퀴산의 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봄이면 식목도 하고 얼마 전 부터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를 올리고 있다. 바퀴산을 위하면 동네가 재수가 좋고 나쁜 일이 없다고 해서 해마다 음력 정월대보름 새벽 5시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바퀴산 중앙의 조그마한 공간에서 발을 구르면 속이 비어 있는 듯 ‘둥둥’ 울리는 소리가 난다. 그래서 예전에는 일명 ‘둥둥산’이라고도 하였다. 한편 산 가장자리나 논에는 뱀이 있으나 산 안에는 뱀이 없어 여름철 농사일 때 나무그늘이나 바위틈에서 쉬며 낮잠도 자고 아이들이 마음껏 놀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오산마을 어느 곳에서도 크고 작은 돌을 볼 수가 없는데 논 가운데 바위산이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가남초등학교에서 학년별로 바퀴산으로 소풍을 올 정도였다고 한다.

▲ 마을을 지키고 서 있는 향나무.     © 세종신문
 
마을의 시간을 품은 향나무

새로 지은 마을회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팔각정 옆에 서 있는 향나무는 언제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 마을 주민들도 모른다. 마을의 중앙으로 옛날 우물터인데 향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우물이 있었다. 마을 노인들 말이 “옛날 노인들 말로도 당신들이 어렸을 때도 향나무가 지금 모양 그대로 있었다”고 하니 향나무의 나이가 얼마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수령이 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산리 동네가 형성되면서부터 있었던 나무인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91년도에 마을 앞 도로를 확장 포장 하면서 한 그루는 죽어서 베어내고 나머지 한 그루도 베어버리려고 하는 것을 주민들이 살려둔 것이다. 마을에서 13대 째 살고 있는 박수남 노인회장은 300년 이상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향나무는 대표적인 장수나무로 마을 우물가에 많이 심는다. 마을마다 제일 오래된 나무는 대부분이 향나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팔각정 터에 있던 공동 우물은 옛날 온 동네 사람들이 물지게를 물을 저다 먹었다. 오산리에는 물을 뜨는 곳이 세군데 있었다고 한다. 향나무가 있는 공동우물이 있었고 아래모퉁이라는 곳에 하나 있었고 마을의 논 한가운데에 샘이 하나 있었다. 아래모퉁이 사람들은 논 한가운데 샘을 많이 이용했으나 장마가 지면 흙탕물이 되어 공동우물을 같이 이용했다고 한다. 학교 뒤 새말에도 우물이 있기는 있었지만 날이 가물면 물이 말라서 향나무가 있는 공동우물에서 길러다 먹곤 했다. 향나무 아래 공동우물은 여름이면 동네 아낙들이 새벽같이 쌀 씻곤 하는 마을의 중심이었다. 

▲ 여주시 가남읍 오산초등학교 전경.     © 세종신문

주민들 손으로 직접 건립한 ‘오산초등학교’

오산초등학교는 오산리 236번지에 있는데 ‘큰 꿈을 키우는 오산 어린이’를 교훈으로 교목은 향나무, 교화는 장미다. 1946년 9월 1일 가남초등학교 오산분교장이 설립되고 1953년 오산국민학교로 승격 후 개교했다. 1981년에 병설유치원인 개설되었고 1996년 3월 1일에 오산초등학교로 개칭했다. 

현재 오산초등학교에는 오산리, 정단리, 화평1,2리, 본두1,2,3리 하귀리, 삼군2리 등 아홉 개 마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다. 

칠십대 중 후반의 마을 노인들이 오산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학교 건물이 없고 군용천막을 쳐 놓고 공부를 했다. 군용천막이 얼마나 큰지 비오는 날에는 천막 안에 100명도 넘게 들어가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여름이면 더워서 제방 둑이나 마을 동산 나무 밑으로 나가 공부하고 그랬다. 1950년대 말에 교실을 지었는데 마을 학부형들이 오산리 공회당, 본두리 공회당, 정단리 공회당을 헐어다가 재조립을 해 교실을 지었다. 이때는 집집마다 영(이영) 한아름씩 엮어서 학교에 가져갔다고 한다. 

학교 부지도 동네사람들이 기부하였다. 오산초등학교 1회 입학생들은 가남국민학교에 다니다 2학년으로 편입해 왔고 2회 입학생들은 오산공회당에서 입학식을 했다. 

처음 학교를 설립할 때 마을 주민들이 지역의 중심으로 되는 오산리에 지어야 된다고 해서 여러 집에서 밭을 시사하고 교실을 지어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에는 지금의 학교 부지가 전부 목화밭이었다. 주민들이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모두가 지게를 지고 나가서 날마다 부역을 했다.

[마을人터뷰]  박수남(72) 선생

오산리에서 얼마나 살았나?

1948년생인데 오산리에서 13세대 째 살고 있다. 독자라 군대도 안가고 평생을 오산리에서 살고 있다. 오산초등학교 5회, 지금의 제일중고등학교인 신성중학교 졸업하였다. 스물두 살 때 결혼했다. 외아들이라고 부모님들이 일찍 결혼을 허락했다. 부모님들이 나를 늦게 낳아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모셨다. 열여섯에 학교 갔다 오면 직접 쟁기질도 하고 그랬다. 나이 열일곱 부터는 어른 품앗이를 했다. 

▲ 가남읍 오산리 박수남(72) 선생     © 세종신문

결혼을 빨리한 이유가 있나?
 
스물둘이면 그렇게 빠른 것은 아니지만 외아들이라 그랬다. 9남매 중에 여덟 번째로 내가 태어났다. 안사람 나이는 동갑이지만 초등학교 후배였다. 얼굴도 마음도 다 예쁘니까 내가 사귀자고 꼬셨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셔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께 효도한다고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농사를 지었다. 안식구가 서울에 가 있을 때는 내가 서울로 찾아가 국도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시골에 내려오면 같이 신륵사에 놀러가고 그랬다. 여주대교 개통식을 할 때 안사람이랑 같이 수여선 기차타고 갔다 왔다. 그 당시 여주대교 개통식에 10만 명이 모였다고 했다. 아이스께끼 장사가 한번 들어가면 나오질 못했다. 다리를 걸어서 건너지도 못하고 영월루에 올라가서 구경하고 그랬다. 
 
오산리는 어떤 마을인가?

오산리는 벙어리가 들어와도 말을 한다는 동네다. 그 만큼 인심이 좋은 마을이다. 누가 이사를 와도 괄시하는 경우가 없다. 마을 앞이 확 트이고 보건진료소도 마을에 있다 보니 나이 드신 분들이 살기 정말 좋은 곳이다. 오산리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지금은 대략 반반정도 되는데 서로 부딪치는 일이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오산리의 자랑은 뭐니 뭐니 해도 동네사람들이 협조 잘하고 화목하고 인심이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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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10 [15:18]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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