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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17] 송아지가 누운 형상, 오학 천송동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6/04 [20:19]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오학 천송동 소지개 마을 전경.     © 세종신문

천송동의 유래

2013년 9월 여주군이 시로 승격하면서 천송리에서 천송동으로 개칭되었다. 
청송동은 본래 여주군 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천서동과 송포, 조포동을 병합하여 천송리라 했다. 송포는 신륵사 앞 남한강(여강) 연안의 솔밭이 포구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에서 비롯되었고, 금당천변에 있는 부락이 점차 커지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자연마을로는 소지개(송포), 내서, 조포 등이 있는데 소지개는 12개 골로 이루어져 있다.
금당천 서쪽에 있는 마을 내서(천서동), 안동 김씨 세도시절 묘가 많아 붙여진 능골, 내서 북쪽에 있는 마을로 물이 좋다고 하여 붙여진 내수리, 송아지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소지개, 신륵사 동쪽에 암벽으로 형성된 곳인데 강월헌과 다층전탑이 세워져 있는 동대, 막힌 골짜기라는 뜻에서 멱골이라고도 하는 먹골, 소지개의 바깥쪽 마을 바깥소지개, 내서 동남쪽 남한강가에 있는 마을로 영릉에 제사 지내는 두부를 제조한 조포소(造泡所)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명칭 조포, 개울에 물고기가 많이 있어 붙여 진 어영곡 등이 있었다.  
 
소지개 고개

고려 말에 고승 무학대사가 천송동에 있는 봉미산에 올라 아랫마을을 바라다보며 사미승에게 “저 마을 뒷산의 형상이 무슨 상이냐?” 물으니 “네. 저 형상은 개 형상입니다.”라고 하자 무학대사가 이르기를 “아니다. 그 형상은 ‘소(牛)지 개(犬)’가 아니다”라고 하여 소지개로 불렀다고 한다. 
소지개 고개를 예전 마을사람들은 서낭당 고개라고 불렀다. 신륵사 입구에서 가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오른쪽에 큰 귀롱나무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목으로 여겼다고 한다. 소지개 마을 주민들은 이 신목을 서낭당으로 삼고 제사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귀롱나무는 고목이 되어 벼락을 맞아 쓰러졌는데 그 뿌리에서 가지가 나와 지금의 나무로 자라고 있다.  

▲ 여주시 오학 천송동 소지개 마을 앞 방풍림 ‘숲풍’.     © 세종신문

강바람을 막아주는 ‘숲풍’

천송1통 전원주택단지 뒤 마을 입구에는 천 여 평 되는 시유지에 숲풍이 조성되어 있다. 이 숲풍은 강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마을 주민들이 오랫동안 신성시 하며 보호해 온 방풍림이다. 60~70년대 까지만 해도 숲이 우거져 신작로에서 마을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고목들이 쓰러지고 개발이 진행되면서 많이 훼손 되었지만 20여 년 전부터 숲속에 정자도 만들고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숲풍은 그 명맥만 남아 소지개 마을의 앞뜰이자 전원주택의 뒤뜰이 되고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원효대사가 지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나옹화상이 오면서 크게 번창하였고, 성종 3년(1472)부터는 대규모로 확장시켰다. 성종 4년에는 절의 이름을 ‘보은사’라 하였다. 절 이름을 ‘신륵’이라 한 것은 미륵 또는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말을 막았다는 설과 고려시대에 마을에 나타난 사나운 말을 인당대사가 신의 힘으로 제압했다하여 마을 사람들이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해서 정조 24년에 완공되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내부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다. 또한 영조 49년(1773)에 제작한 범종과 후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의 정문 위에는 나옹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오는 ‘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 있게 써져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수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 신륵사 극락보전.     © 세종신문

신륵사를 일명 “벽절”이라 부르게 한 다층 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에서는 그 옛날 시인 묵객들이 시 한수를 읊고 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에 위치함으로서 대중과 접하고 구도의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곳이다.
 
조포나루

신륵사 입구 강둑 아래에 위치한 나루터이다. 지금의 신륵사보트장 일대로, 현재 조포나루 표석이 있어 이곳이 과거에 조포나루였음을 알리고 있다. 조포나루는 신륵사가 위치한 여주시 천송동과 연양동 연촌을 잇는 나루였다. 나루가 비교적 완만하였기 때문에 무거운 물자는 주로 이곳을 통해 운송하였다고 한다. 조포나루는 신륵사의 창건과 더불어 시작된 곳으로 마포나루, 광나루, 이포나루등과 함께 조선시대 4대 나루로 불릴 만큼 번성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하류 쪽으로는 보제존자 나옹의 이름을 딴 보제원이라는 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3년 조난사고가 있은 후 1년 뒤 여주대교가 개통되어 이 나루는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인근의 유람선 영업이 성업 중이며, 최근에 황포돛배 나루터가 조성되어 이 나루의 명맥을 잇고 있다.  

▲ 조포나루 표지석.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소지개 마을 박인섭(80) 선생

천송1통에서 얼마나 살았나?
1941년에 천송리에서 태어나 80평생을 살고 있다. 예전에는 천송리가 북내면에 있어서 북내초등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여주중학교, 여주농고를 다녔는데 암나루(학동나루)에서 배로 군청 뒤까지 건너가며 다녔다. 비가 많이 오면 배가 뜨지 않아 학교를 못 다니는 경우도 있고 학교에 늦어도 지각처리를 하지 않았다. 군대 갔다 와서는 천송동에서 평생 농사짓고 살았다. 스물여섯에 대신면 당산리가 고향인 아내와 결혼을 했다. 가산리에 사는 형님뻘 되는 사람이 진주 유씨인데 우리 집사람을 소개해 줬다. 자녀는 2남 3녀를 뒀다. 지금은 집사람이 허리를 다쳐 많이 아프다. 나는 벼농사, 땅콩 농사, 들깨, 참깨,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 우리 집사람이 농사도 같이 짓고 남의 집에 일도 다니고 하며 5남매를 다 키웠다. 고생을 참 많이 했다. 

▲ 소지개 마을 박인섭 선생.     © 세종신문

천송동이 어떤 곳인가?
우리 동네에는 12개 골이 있다. 소지개는 송아지가 누워있는 형인데 골짜기 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 턱골, 중간에 목골, 그 위에 올라가면 구영인데 거기를 용궁이라고 한다. 산박골, 능골이 있고 각골에는 절터가 있다. 샘골, 뒷박골, 앙지덤, 응달덤, 웃덤이 있다. 저 건너 턱골에는 열 댓 가구가 살았는데 남한강 뗏목이 들어오는 곳이라 장사를 많이 했다. 여주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신작로도 없고 자그마한 우마차길이 있었다. 예전의 큰길은 군청 뒤 여주나루에서 마차배로 건너 오학동을 지나 벅시고개를 넘어 신남리, 당우리를 거쳐 가정리, 강천으로 해서 원주를 다니고 그랬다. 천송리 앞을 지나는 신작로는 마을사람들이 70년대 초에 레일을 깔고 흙을 퍼 날라 만든 길이다. 
 
천송동의 자랑이 무엇인가?
우리 천송 1통의 제일 큰 자랑은 마을 이장이다. 나도 이장을 8년 봤는데 그 때는 단합이 잘 되었다. 지금 이장이 마을일을 20년 동안 보고 있다. 임기가 2년인데 임기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또 봐라 또 봐라 하다 보니 20년이 되었다. 이장이 마을 일을 잘 보니까 그렇다.
 
개발이 많이 되고 있는데 어떤가?
어디 공간만 있으면 집을 짓고 들어온다. 그 사람들이 안 들어왔을 때는 한 100여 호 되었는데 지금은 200호가 넘는다. 그 사람들이 들어온 이후로는 먼저 살던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너는 너고 나는 나다 하고 살고 있다. 동네 이장을 위주로 해서 길가나 시유지 숲풍에 풀을 깎는다고 해도 본체만체한다. 그리고 골목길은 좁은데 집집마다 자가용 두서너 대가 있으니까 동네에서 농기계가 다닐 수가 없다. 지금은 그냥 우리끼리 오순도순 살 때 하고 다르다. 그 사람들은 마을을 위해 뭘 하나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 마을이 단합이 되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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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04 [20:19]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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