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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 77 - 장군 최윤덕, 세종이 아낀 장수
 
김태균   기사입력  2020/06/04 [18:40]
▲ 세종신문 김태균 대표     
세종시대 문무를 겸비한 장수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김종서 장군이다. 4군6진을 개척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문신으로 출발했지만 결국 무신으로도 족적을 남겼고 정승의 반열에 들었다. 최윤덕은 그에 비해 조금 덜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세종이 최윤덕 장군을 선발하고 후대하며 그를 중용한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최윤덕 장군은 세종 재위 15년(1433년)에 1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 너머 파저강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한 사람이다. 지금의 중강진 지역 너머다. 이 일로 우리의 국경을 압록강까지 넓히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처음에 토벌에 대한 의논이 분분할 때 최윤덕도 반대했다. 그 과정에서 세종의 끈질긴 설득이 있었고 결국 최윤덕을 그 일의 책임자로 임명하게 된다. 여진족 토벌을 반대한 최윤덕이었지만 일단 토벌하기로 결심한 후부터는 혼신을 다해 준비하고 뛰어난 장수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전쟁을 완벽한 승리로 이끌어 냈다. 
 
최윤덕 장군을 발탁하기 위해 세종이 묻는 장면이 나온다. 세종 14년의 일이니 36세이자 임금직책도 무르익었던 때이다.
 
임금이 좌대언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경이 최윤덕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람됨이 비록 학문의 실력은 없으나 마음 가짐이 정직하고 또한 뚜렷한 잘못이 없으며, 용무(用武)의 재략(才略)은 특이합니다.”
고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곧고 착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근신(謹愼)하여 직무를 봉행(奉行)하므로 태종께서도 인재라고 생각하시어 정부(政府)에 시용(試用)하였노라. 전조(前朝)와 국초(國初)에 간혹 무신(武臣)으로서 정승을 삼은 이가 있으나, 어찌 그 모두가 윤덕보다 훌륭한 자이겠는가. 그는 비록 수상(首相)이 되더라도 또한 좋을 것이다. 다만 말이 절실하지 못한 것이 많다. 하윤(河崙)이 정승이 되어 모든 정무(政務)를 처리할 때에, 조영무(趙英武)가 거기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일이 없었다. 만약 한 사람의 훌륭한 정승을 얻으면 나라 일은 근심 없을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14년 6월 9일)
 
세종은 이미 최윤덕에 대해 알고 있었다. 비서인 김종서의 의견을 묻고 싶었던 모양이다. 세종의 평가는 좋았다. 곧고, 착실하고, 거짓이 없이 근신한다는 점이다. 모든 인재의 기본은 곧고 착실하고 정직하며 근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최윤덕에 대한 기록이 있다. 
최윤덕은 어린시절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가 국경수비로 나가 있는 동안 경남 마산의 그릇 만드는 천인의 집에서 자랐다. 때문에 제대로 학문을 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고 천인 양부에게 배워 굳은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산속에서 가축을 먹이다가 덤벼드는 호랑이를 화살 한 대로 쏘아 죽일 정도였다고 하니 무략의 재질은 특이하다고 평가할 만했다. 
그런데 실상 최윤덕을 훌륭한 장수로 만든 것은 서미성이란 사람이다. 서미성은 서거정의 아버지다. 서거정은 세종시대 초기에 태어나 6명의 왕을 섬겼던 문신으로 매우 뛰어난 학자였다. 이 사람의 아버지가 경남 합포에 수령으로 와 있을 때 최윤덕을 만나본 다음 시험을 해 보았는데 활의 귀신이었다. 쏘면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서미성은 이를 보고 ‘이 아이가 비록 손이 빠르기는 하나 아직 법을 모르니 사냥꾼의 기술에 불과하다’며 활 쏘는 법과 말 달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뛰어난 인재가 나오려면 많은 스승들이 우연처럼 필연으로 붙어야 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키울 수 있는 모양이다.
 
최윤덕은 음관, 즉 부친의 공로에 따라 직이 제수되어 부친을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1419년에는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 정벌을 추진했고 북방이 혼란스러워지자 동북면의 군 사령관으로서 책임을 다했다. 그리고 최윤덕은 파저강 토벌의 공적으로 정승자리를 추대 받게 되는데 극구 사양하기도 했다. 
 
신은 초야의 한 쓸모 없는 사람으로 다행히 밝으신 성대를 만나서, 그릇 주상의 은우(恩遇)를 입어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신이 충의를 다할 때라 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신이 무신(武臣)의 집에서 생장하여 손(孫)·오(吳)의 병서를 간략히 익혔을 뿐, 고금의 변혁과 치란(治亂)의 기틀도 모르옵거든, 하물며 천지의 가르치심을 공경히 믿고 국사를 경위(經緯)하고 음양을 조화하여 백관에 관면(冠冕)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신은 매양 생각하옵기를, 의정(議政)의 직책은 본시 용품(庸品)이 얻어할 바 아니며, 국사를 경위하고 음양을 조화시키는 일은 무신이 의의(擬議)할 바 아니고, 또 신은 본래 병이 있어 밥을 먹지 못하옵고 단술로 이를 대신하고 있으니, 이 또한 음양을 조화시키는 재상의 할 바 아니온즉, 다만 사람들로부터 오늘날 웃음을 사고 후세에 기롱을 남길뿐입니다. 그러하오나, 의적을 막아서 북방을 안정시키는 일이라면, 신이 마땅히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진심 진력(盡心盡力)하겠사오니, 바라옵건대, 성자께옵서 신의 작위를 해면해 주시고 어질고 능한 사람으로 대신하여 주시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나이다.(16년 2월 5일)
 
최윤덕은 정승의 자리를 사양하면서 자신이 세운 모든 공은 임금의 성덕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정직하고 성실했을 뿐 아니라 겸양의 자세도 깊었다. 그래서 임금이 무슨 상을 줄까를 대신들에게 물었을 때 허조는 영중추를 가설해서 포상하자고도 했고 맹사성은 자신이 맡고 있는 관직을 대신하면 좋겠다고까지 한다. 위 아래와 좌우로부터 모두 인심을 얻은 것이다. 겸양하고 말수가 적었던 최윤덕이었다.
 
세종은 ‘만약 한 사람의 훌륭한 정승을 얻으면 나랏일의 근심을 없앨 수 있다’면서 최윤덕을 영의정감으로 지칭한다. 하지만 영의정은 그 임무가 지극히 무거우므로 전공만 가지고 임명할 수는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모두가 최윤덕은 영의정을 삼을지라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했지만 최종 결정은 우의정이었다. 
 
아버지는 무인이고 천인의 집에서 성장하며 학문할 기회가 없었지만 재능을 개발하고 좋은 스승과 만나고 자신의 성실함이 결국 정승의 반열에 들게 한 힘이 되었다. 그리고 세종시대 훌륭한 인재들 중 한명으로 후대에도 계속 언급되는 사람이 되었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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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04 [18:40]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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