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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16] 남한강 지키는 부처바위 마을, 흥천면 계신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5/28 [18:13]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흥천면 계신리 부처울 마을 전경.     © 세종신문

계신리의 유래

계신리는 원래 흥곡면의 계장동과 충신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마을이 통합되면서 계장동의 ‘계’자와 충신동의 ‘신’자를 따서 계신리로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는 옛날 마을 입구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주민들이 이 나무를 계수나무라고 믿고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마을사람들의 행운을 빌며 이 나무 밑에서 제사를 올리게 되어 계신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계신리의 자연마을은 부처바위(마애여래입상)가 있어 붙여진 이름의 부처울, 계신리 초입 부처울 서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 무성골, 부처울 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초에 단양 우 씨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며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소나무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중송골, 부처울 서쪽에 새로 형성되었다고 부른 신촌동, 부처울 북쪽 건너편 부채봉 아래 마을인 샛말이 있다. 그 외에도 부처울 북쪽 샛말바위 절벽아래 있던 자라바위가 있었고, 오래전에는 중송골 북쪽, 중송골과 이포 사이 계장 개울에 물레방아간도 있었다. 

▲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애여래입상.     © 세종신문

부처바위(마애여래입상)
 
부채봉 아래, 부처울 동쪽 한강 가 벼랑에 새겨져 있는 부처상이다. 계신리 마을에서 동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약 400m쯤 돌아가면 남한강의 벼랑 위에 지긋한 자태의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이 의연히 서 있다.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마애여래입상은 천 년의 풍상에도 변함없이 양각이 뚜렷해 옛 조상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삼중의 원형 두광을 둘러 석불의 위엄을 드러낸 마애여래입상의 안면은 부드럽고 섬세하며 오른손을 올려 어깨쪽으로 내장하고 있고, 왼쪽 손은 옆으로 벌리면서 내리고 있어 중생을 맞이하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

계신리 마애여래입상은 고려 말에 무학대사가 신륵사에 있을 때 배를 타고 한강을 지나다가 삿대로 벼랑에 그려 놓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영험하다 하여 주민들이 집안에 근심 또는 어려운 일이 있거나 아이를 못 낳는 부인이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남한강 수로를 따라 농수산물의 운반선과 뗏목꾼들이 이 부처바위 앞을 빈번히 왕래했으며 뱃사람들이나 뗏목꾼들이 이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이 마애여래입상 앞에서 항해의 안전과 무사를 빌고 갔다. 주민들은 이 마을을 불암동 또는 부처울이라고 부르는데 이 여래입상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집안에 근심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이 부처 앞에 기도를 드려 집안의 안녕과 자손들의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마애여래입상이 자리한 이곳 주변에서 얼마 전에 토기류와 석물 여러 점이 발굴되었으나 그 소재는 모른다고 하며, 여래상의 주변과 바로 밑의 강가에 기와조각이 산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과거 여기에 사찰이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수령 500년이 넘은 계신리 은행나무.     © 세종신문

500년을 훌쩍 넘긴 은행나무
 
계신리 192번지,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위에는 고목이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500년이 넘게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계신리 은행나무는 산 아래쪽으로 기울기는 하였으나 나무의 모양은 둥글고 비교적 안정적이고 높이는 높지 않으며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 서쪽으로 뻗은 굵은 가지에는 그 옛날 마을 주민들이 그네를 걸어 단오날에는 그네를 타곤 하였다. 계신리 은행나무 아래는 마을 주민들이 더위를 피하던 곳으로 6.25전쟁 때에는 전쟁을 피해 들어온 선비가 은행나무 아래에 서당을 차려놓고 마을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계신리 은행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보호수는 노목, 거목, 희귀목 중 보존 및 증식의 가치가 있거나 학술 참고를 위해 보호하는 나무를 말한다. 보호수는 용도에 따라 명, 보목, 당산목, 정자목, 호안목, 기형목, 풍치목 등을 보호수로 보고 있다. 명목은 역사적인 고사나 전설이 있거나 성현, 위인 또는 왕족이 심은 나무를 말하며, 보목은 역사적인 고사나 전설이 있는 보배로운 나무를 말한다. 그리고 산기슭이나 마을 입구, 촌락 부근 등에 있는 나무를 당산목이라고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성황목과, 마을에 큰 그늘을 만들어주는 피서목이나 풍치목으로 심은 당산목도 있다. 향교, 서당, 서원, 별장, 정자 등에 심어져 있는 나무를 정자목이라 하는데, 국가에 큰 변란이 있으면 나무가 운다는 등의 다양한 설화들이 있다. 모양이 기괴하여 관상의 가치가 있는 나무를 기형목이라 부르고, 해안이나 강 또는 하천을 보호할 목적으로 심은 나무를 호안목이라고 한다. 또 풍치의 효과를 주는 풍치목도 있다.

▲ 남한강과 만나는 복하천.     © 세종신문

복하천

복하천은 한강 권역의 한강 수계에 속하며, 한강의 제1지류로 유로연장 18.7㎞, 하천연장 15㎞, 유역면적 124.11㎢이다. 복하천은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원두천이 합류하는 이천시 호법면에서 국가하천으로 바뀌며, 흥천면 계신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배들이 이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실으러 남한강을 통하여 드나들었지만, 지금은 수량이 줄고 하천바닥이 높아져 배를 운행하지 못한다. 청미천 등과 함께 일대에 평야를 잘 발달시켜 일대를 곡창지대로 만들고 질 좋은 여주쌀의 원천이 되고 있다. 

[마을人터뷰] 이포영(82) 선생

계신리에서 얼마나 살았나?

1939년에 계신리에서 태어나 이포초등학교를 다녔다. 우리 조상들은 한 350년 전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전주 이 씨 담양군파 18대 손이다. 담양군은 세종대왕의 막내아들이다. 중학교는 양평에서 다녔는데 할머니가 방을 얻어 밥을 해줘서 학교를 다녔다. 중3부터는 하숙을 했는데 한 달에 하숙비가 쌀 네 말이었다. 고등학교도 양평에서 다니면서 하숙도하고 자치도 하고 그랬다. 고등학교 마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 3년 하다가 군대에 갔다. 군대를 마치고 바로 장사를 배웠다. 그때는 공무원도 할 수 있고 선생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은 돈이 안 되었다. 서울에서 점원을 했는데 면서기 월급의 곱은 넘었다. 

▲ 흥천면 계신리 이포영 선생.     © 세종신문

계신리에서 주로 농사를 지었나?

22살 나던 해 군대 가기 전에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 한 달 있다가 군대에 갔다. 휴가 나왔는데 큰애를 낳았다. 군대 제대를 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좀 하다 농고 나왔으니까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고향에 정착했다. 논600평 물려받고 이것 가지고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돈을 모았다. 군대에서는 군의학과를 나와서 의무대 위생병으로 약재 담당이었다. 부산 육군병원에 있었다. 그 경험으로 고향마을에 구멍가게를 하나 열어 담배도 팔고, 문방구도 팔고, 약도 팔고 그랬다. 박정희 때는 나무젓가락 만든다고 마을 곳곳에 미루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그래서 강가에 미루나무가 많이 있었다. 목상들이 미루나무를 내다 파려면 인부가 필요했는데 농한기에 그 인부들을 내가 모아 일을 하고 그랬다. 땅을 600평으로 시작해 5천 평으로 늘리고 이곳 계신리에서 아들 딸 삼남매를 낳아 키웠다.  
 
계신리는 어떤 곳인가?

계신리는 마을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부처바위가 있는 부처울이 계신리의 중심인데 4대강 공사하기 전에는 남한강 물이 부처바위 아래로 흘렀다. 홍수를 막아 주는 것 빼고는 그 전 강이 훨씬 살기 좋았다. 예전에는 여주 다음으로 이포가 큰 마을인데 계신리가 이포 옆에 붙어 있어서 이포와 같이 갔다. 그래서 우리 마을에서 참외를 많이 심었다. 누에 키우는 양잠이 기울어지면서 부터는 밭에 있는 뽕나무를 다 파내고 그 자리에 참외를 심었다. 참외가 참 잘되었다. 옆 마을 이포와 함께 계신리는 물길과 육로의 중심지였다. 왜정 때는 여기서 서울도 걸어 다녔다. 해방되고 이포 부잣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 버스를 사서 아침에 서울로 출발해서 저녁에 내려오곤 했다. 해방 전에 우리 집안에서 시제를 지내면 파주까지 걸어갔는데 곤지암으로 해서 광주에서 하룻밤 자고 파주에 도착해서 시제를 모시고 돌아오면 1주일이 걸렸다. 지금은 조상을 우습게 생각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제사 하나를 모시기 위해 사흘을 걸어가고 사흘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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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5/28 [18:13]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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