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마을 구석구석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여주마을 구석구석 6] 여주땅콩, 여주고구마의 원조 대신면 양촌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3/19 [16:14]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여주시 대신면 양촌리(楊村理)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촌, 양파동 일부와 흥곡면의 충신동 일부를 병합하여 양파와 평촌의 이름을 따서 양촌리라 하였다. 양촌리는 흥천면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1972년 대홍수로 보통리 새마을로 이주 하면서 대신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마을주민들이 다시 양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1996년 대신면 양촌리로 되었다. 지금은 강물 속에 잠겼지만 마을을 옮기기 전에는 양촌리 동쪽에는 내시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양촌리에 있는 넓은 들(넓은 갯들) 광개, 굽치, 굽치 밑에 있는 들 오목함, 대추나무꼴 동쪽에 있는 골짜기 대서낭구골, 뱀이 많았다는 뱀벌, 평촌리라 불리며 양촌리에서 으뜸 되는 벌말, 벌말 남쪽에 있는 마을 웃말, 벌말 동쪽에 있는 돈대로 홍수가 났을 때 피난하던 곳인 헌성대가 있었다. 현재 마을은 1994년에 마을주민들이 3천 여 평의 땅을 매입하여 흙으로 돋아 이주하였다.  

▲ 여주시 대신면 양촌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마을 인터뷰 : 경한호(84) 옹]
1937년 양촌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경한호 옹에게 마을 이야기를 들어봤다.
 
평생을 홍수 걱정하며 살아온 양촌리

1972년도에 장마가 크게 져서 집이 여러 채 떠내려갔는데 그 때 우리 집은 주춧돌이 다 빠져나갔다. 그 당시엔 동네가 저 강 한복판에 있었다. 예전에는 강이 상백2리 쪽으로 돌아갔는데 물살이 엄청 셌다. 강이 여주에서 흘러오면서 양촌리 앞에서 강폭이 좁아지고 여울이 졌는데 평상시에는 좁은 여울로 흐르던 물이 장마가 지면 강둑을 넘어 마을로 들어왔다. 양촌리 앞에는 ‘속세미(속섬)’라는 섬이 있고 그 밑으로도 큰 섬이 하나 더 있었다. 4대강 사업을 하면서 그 섬을 다 파내고 일직선으로 강을 만들었다. 

대홍수가 난 72년도에 나는 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그 전날 흥천으로 건너가서 공을 차고 왔는데 그날 밤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다음날 물이 넘쳐 마을이 떠내려갔다. 그 때가 음력 7월이었다. 내가 강에서 고기를 잡곤 해서 노상 강을 왔다갔다 했다. 밤 9시쯤에 제방에 물이 넘치나 안 넘치나 하고 가봤다. 물이 찰랑찰랑 하더니 바로 제방 둑을 넘어 마을로 밀려들어왔다. 강둑이 막 무너졌다. 겁이 나서 들고 뛰었다. 동네사람들을 깨워서 물이 들어오니까 짐을 싸라고 했다. 우리 집 마루에 배를 대고 식구들을 싣고 나왔다. 우선 헌성대로 피신하고 그 다음에 헬리콥터가 와서 대신초등학교로 실어 날랐다. 그 당시 마을에 64가구가 살았다. 둑이 터지는 것을 빨리 발견하지 못했으면 얕은데 살던 사람들은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비가 얼마나 많이 왔으면 꿩이 날아가지 못하고 풀숲에 웅크리고 있어 그냥 붙잡았다. 그 해는 학교만 빼놓고 대신면이 다 잠겼다. 

잠시 피했다가 마을로 다시 들어오려고 하는데 못 들어가게 막고 그랬다. 옷을 머리에 이고 마을에 들어와서 보니 진흙범벅이고 형편없었다. 소나 돼지는 어디 옮기지도 못했다. 소는 고삐를 풀어놨더니 높은 곳으로 쫓겨 올라가서 나중에 임자들이 찾아가고 돼지는 더러 떠내려갔다. 

주춧돌이 빠진 집을 내 손으로 다 고쳤다. 능서 미군부대에서 나일론 줄을 얻고 귀백리에서 작키를 빌려서 지붕을 들어 올리니까 기둥이 넘어져서 다시 말뚝을 박고 주춧돌을 바로 세워서 집을 수리했다. 그 때 고생은 말도 못한다. 한 달 동안 집을 고쳤다. 돈 있는 사람들이야 미장이나 목수를 대고 고쳤지만 나는 직접 고쳤다. 지금 사는 곳은 동네사람들이 땅을 3천여 평 사서 각 집 당 200평씩 분배를 했다. 보통리 사람 땅인데 그 당시 흙이 패나가고 물이 제일 먼저 고이는 땅이었는데 제방을 쌓으며 생긴 흙 덤프트럭 5천대 분을 퍼 옮겨 땅을 돋우고 집을 지었다. 양촌에 살면서 큰 홍수를 만난 것만 해도 네 번이나 된다. 

▲ 양촌리 경한호 옹이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세종신문

뱀장어, 참게, 숭어, 황복어 잡던 양촌리 여강

우리 아버지는 나루터 뱃사공이었다. 나는 배를 직접 만들고 낚시나 그물도 제작해서 고기를 잡았다. 
72년에 장마 때 정부는 보통3리에 새마을을 60가구 정도 만들어 분양을 해 이주 시켰다. 그래도 농사짓고 고기 잡는 사람들은 죄다 다시 들어왔다. 나는 여기서 고기를 잡고 살았기 때문에 나가지 않았다. 

여기 강에서는 뱀장어, 참게, 숭어, 황복어 등을 잡았다. 황복어는 먹으면 죽는다고 해서 잡히면 그냥 다 버렸다. 참게는 하룻저녁에 750마리 정도 잡는 날도 있었다. 싸리나무 껍데기를 장에서 사다가 강을 건널 수 있을 때까지 밤새도록 새끼를 꼬았다. 싸리나무 껍질 새끼에 수수 이삭을 끼워서 사용한다. 수수 이삭을 셋으로 나눠서 쪄서 주낙을 하듯 매달아 한발에 하나씩 돌을 달아 물에 가라 앉히면 참게들이 수수를 집게로 잘라먹는다. 밤에 등불을 배 앞에 매달고 노를 저어 나가며 줄을 걷어 올리면 한 이삭에 참게가 두 마리도 달리고 세 마리도 달리고 그랬다. 세 마리가 달리면 한 손으로 세 마리를 다 움켜쥘 수 없어 한 마리는 놓치기고 했다. 잡은 참게는 서울사람이 선금을 주고 사 갔다. 선금을 받아 놓으면 게 값이 더 비싸져도 값을 올릴 수 없었다. 숫게 2원, 암게는 3원 주고 받아갔다. 여강이 우리 식구를 먹여 살렸다.

▲ 1987년 당시 여강의 옛모습. ⓒ경준호 양촌리 이장 제공     

[마을 인터뷰 : 경정수·황금옥(81) 부부] 
1940년생 경정수, 황금옥 동갑내기 부부에게 마을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 수수, 땅콩, 고구마 재배했던 양촌리 들판

양촌리가 그전에는 흥천면이었다. 배타고 강을 건너 흥천으로 학교를 다녔다. 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는데 이쪽은 ‘양촌나루’, 강 건너는 ‘찬우물나루’였다. 여름에는 보리 한 말, 가을에는 서숙(조) 한 말을 냈다. 장마가 지거나 얼음이 얼면 학교를 못가고 그랬는데 그때는 결석으로 치지도 않았다.

예전에 양촌에서는 밭농사를 지었다. 보리, 밀, 옥수수, 조 이런 잡곡을 지어 먹었다. 여기가 다 모래밭이다. 강에서 물을 퍼오지 않으면 물이 없는 곳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논을 해먹을 생각을 못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샘을 파서 논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70년대 중반인가 그랬다. 처음에는 경운기로 모터를 돌려 강에서 물을 끌어왔는데 74년도에 상백리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도 사비를 내서 상백리에서 강을 건너 전기를 끌어왔다. 85년도 홍수에 전기선이 끊어져 그 후로는 대신에서 전기를 끌어왔다. 71년도에 제방공사를 한다고 제방을 한 1km정도 막았는데 72년 홍수에 제방도 장비도 다 떠내려갔다. 마을 동쪽에(지금은 서남쪽) 물난리를 만나면 사람들이 급하게 피할 수 있도록 동네사람들이 땅 300평을 사서 ‘헌성대’라는 것을 만들어 두었다. 헌성대는 1945년에 동네사람들이 지게로 흙을 져다가 모아서 만든 언덕이다. 준공식 할 때 여주에서 군수, 서장 이런 사람들이 단추가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왔다. 물난리가 나면 사용하라고 여주군에서 천막을 두 개를 줬다. 그 헌성대도 90년대 초에 제방을 쌓으면서 다 잘려나갔다. 지금은 거의 다 잘려나가고 쬐끔 남았다. 

▲ 홍수를 피하기 위해 만들었던 헌성대. 지금은 일부만 남았다.     © 세종신문

우리 집을 94년도에 지었으니까 우리 마을이 이쪽으로 옮겨 온 것이 1994년이다. 96년도 1월 1일부로 보통3리에서 다시 양촌리로 법정리가 되었다. 여기는 경 씨 집성촌이었다. 

땅콩은 내가 스무 살 정도 되었을 때인 1960년도부터 유명했다. 어른들에게 지금의 저류지 쪽에 호인(중국사람)들이 와서 살았다고 들었다. 그 사람들이 처음에 땅콩을 많이 했다. 그 사람들이 가고 난 후 60년대에 마을 사람들이 땅콩을 심기 시작했다. 지금은 중국산 땅콩에 밀리고 땅도 많이 없어지고 해서 땅콩을 거의 안한다. 겨우 자기네 먹을 만큼 만 하고 있다. 땅콩 값이 떨어지자 그 다음에 고구마를 심기 시작했다. 여주고구마의 출발도 양촌이다. 지금은 대신 일대에서 고구마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데 그 시작이 양촌이다. 
 
▲ 양촌리 이야기를 들려준 경정수·황금옥 부부가 카메라 앞에 수줍게 앉았다.     © 세종신문

추억만 아련한 양촌리 강과 들
 
4대강 공사하고 나서 홍수 안 나는 것 하나는 좋아졌지만 논밭이 전부 강으로 저류지로 들어가 이제는 농사지을 땅이 없다. 양촌은 먹고살 게 없어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가 힘들어졌다. 우리도 보상을 받았으니까 나가서 살라고 했는데 “못나간다. 여기에 살게 해 달라!” 해서 산거다. 지금은 마을 땅 대부분을 서울사람들이 샀다. 여기 사람들 땅은 별로 없다. 환경부에서도 땅을 많이 샀다. 환경부가 땅만 나면 사들여 풀밭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짐승들만 살고 있다. 고라니들만 뛰어다녀서 피해가 너무 많다. 

나만해도 90년대에 제방 만든다고 땅 3천 평을 베어 강에 들어가고, 4대강 한다고 4천 평 베어가고 그랬다. 밭 조금 있는 거는 준설토 쌓아둔 곳으로 들어갔다. 여기 사람들은 물 한 번 가면 한 몇 년 고생하고 그랬다. 홍수를 만나 헬리콥터를 72년에 한번 타고 85년에 한번 타고 그랬다. 옛 모습도 없어지고 땅도 없어지고, 우리 아이들이 나이가 들면 들어와 살지 모르겠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20/03/19 [16:14]  최종편집: ⓒ 세종신문
 
※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의 글을 게시하고자 할 경우에는 실명인증 후 등록하셔야 합니다.
실명확인 된 게시물은 실명인증확인 여부가 표시되며, 실명확인 되지 않은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 게시물은 선관위의 요청 또는 관리자의 판단에 의해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본 실명확인 서비스는 선거운동기간(2020.04.02~2020.04.14) 동안에만 제공됩니다.
※ 일반 의견은 실명인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가장 많이 읽은 기사
[여론조사] 최재관·김선교 43.6% 동률, 피 말리는 접전 / 송현아 기자
“여주·이천 접경은 함께 발전할 지역” 화장장반대비대위 집회 / 김영경 기자
‘단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다’ 여주민들레학교 지원 절실 / 김영경 기자
여주시의회서 재난기본소득 조례안 및 예산안 통과 / 김영경 기자
대진국제자원봉사단, 여주시에 마스크 10만장 제작 기부 / 김영경 기자
‘하리제일시장’ 여주시가 매입한다 / 송현아 기자
최재관 후보 후원회장에 ‘이낙연’ 확정 / 송현아 기자
여주시, 아동양육 지원 1인당 40만원 상당 포인트 지급 추진 / 송현아 기자
여주시‧양평군 선거구 총선 후보 5명 등록 마쳐 / 송현아 기자
대신면 주민들, 코로나19 방역 한 달째 / 김영경 기자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