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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5] 천하제일 명당 금반형지(金盤形地) 흥천면 외사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3/12 [16:43]
예전에는 외사리를 ‘실밖’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천 백사면의 현암리 일부를 합하여 외사리라 부른다. 외사리의 자연마을로는 금반형, 돌꼬지, 새터, 지경계, 서낭댕이, 흙두지가 있다. 금반형은 복지관 뒤편 마을로 금소반의 모양을 하고 있어 집터로는 천하제일 명당이라 한다. 돌꼬지는 외사1리인데 마을의 으뜸이 되는 곳이고 바위에 붉은 돌꽃이 피어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새터는 돌꼬지 서쪽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고 지경계는 새터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서낭댕이는 과거 서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흙두지는 서낭댕이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김관주의 아흔 아홉 칸 기와집이 있었다는 금반형.     © 세종신문

천하제일의 집터 금반형지(金盤形地)

기록에 의하면 여주와 이천에 걸쳐있는 원적산 기슭 일대에는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금반형지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이곳을 찾아 집을 짓고 살면 36명의 대장군과 정승이 날 것이고, 또한 36성씨가 살만한 땅이라 하여 조선시대부터 이 금반형지를 찾고자 서울, 충청, 경상, 전라 등지의 명문가들이 대거 몰려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비결(秘訣)에 의하면 원적족립 앵무삼라(圓寂簇立 鸚鵡森羅) 풍변찰거래 택리관향배(風邊察去來 澤裡觀向背)라 하였고, 이 글귀를 해독하면 금반형지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금반형지를 찾아 외사리로 온 사람들

1961년에 금반형지를 찾아 울진에서 흥천면 외사리로 들어왔다는 전광홍(田光弘) 옹이 전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그대로 싣는다.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원정을 왔던 명나라 사령관 이여송(李如松)이 왜군을 물리치려고 고양군까지 왔는데 그때 금반형에 대한 비기(秘記)를 알고 있었다. 이여송의 지리담당 참모 두사충이 외사리 일대를 풍수지리가 좋다고 극찬을 한 거지. 그래서 이여송이 외사리 지형을 그려가지고 자손들과 외손들을 모아 놓고 나눠주면서 명나라는 금방 망하니까 나라가 망하게 되어 중국에서 살수 없거들랑 조선 땅 여기를 찾아가라 했다는 거야.

기록에 보면 이여송의 외손 중에 왕상서라는 이가 두사충을 데리고 금반형을 찾아 여주로 왔는데, 그 때는 외사리를 찾아오려면 뱃길로 여주로 와서 여주에서 다시 외사리로 들어와야 했어. 흥천면 신건리에 두무재(흥천중학교가 있는 언덕)라는 곳이 있는데 두사충이 그 재에서 원적산 아래 외사리 쪽을 건너다보고 금반형을 찾았다고 좋아서 춤을 췄다는 거야. 기록에는 왕상서가 왕거사로 되어 있는데 ‘상서’는 벼슬이고 ‘거사’는 그 벼슬을 높여 부르는 말인데 왕거사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나와. 왕거사와 같이 온 두사충이 외사리에 집터를 잡아 놓고 그 때 같이 온 자기 아들에게 이러이러한데 살만하겠냐고 물었더니 그 아들이 마음이 없다고 하여 마음이 없으면 그냥 가자고 해서 돌아갔어. 그 후 별별 사람들이 금반형 소문을 듣고 외사리로 찾아왔어.

▲ 두사충이 금반형을 보고 춤을 추었다는 두무재. 모퉁이를 돌면 바로 흥천중학교다.     © 세종신문

그러다 숙종 때 경주 김 씨 김관주가 중국으로 사신을 갔는데 그때는 알음알음 가서 서너 달 걸려 머물다 보니 객주에서 지내게 되었지. 마침 그 객주집 주인이 이여송의 자손이었다는 거야. 김관주가 한 달 남짓 신세를 지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 객주집 주인이 “우리 할아버지가 이거를 줬는데 가져가봐라”하고 그림을 하나 주어 무심히 챙겨 온 거야. 서해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오는데 풍랑이 무지무지하게 일었어. 그러니까 선장이 “중국에서 보물을 숨겨서 오면 용신이 시기를 해서 이런 수가 있으니까 중국서 가져온 건 다 버려라”고 했어. 그 당시 중국서 가져오는 보물이라는 게 금, 은, 비단 같은 건데 사람들이 그거를 다 바다에 버렸단 말이야. 그래도 파도가 안 잦아드니까 그 다음에 이 영감이 보따리 속에서 그림을 한 장 꺼내면서 “이것도 중국에서 가져왔는데 버려야 하냐?”했더니 선장이 “급하니까 그것도 버려라”라고 해서 그 그림을 한번 다시보고 바다에 버렸다는 거야. 그러니까 파도가 잔단 말이야. 김관주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 그 그림이 대단한 거로구나.’ 그래서 그 그림을 기억하고 와서 모사를 해서 찾아 온 곳이 이곳 외사리였어. 저 너머 잔등 금반형이라고 부르는 곳에 아흔 아홉 칸 기와집을 지어놓았다고 해.

그 사람이 남겨 둔 문서 속에는 외사리를 증명할 만한 글이 상당히 많아. 그 집안이 여기서 5대 이상을 살았어. 내가 외사리로 왔을 때 김관주의 종손부라는 사람이 90세 정도 되었는데 기와집은 다 없어지고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살았지. 그 집에 서출인 인간말종이 하나 있었는데 술 먹다 모자라면 보리쌀 한말에 땅을 조금 씩 팔아먹고 하는 식으로 결국은 그 넓은 땅을 다 팔아먹었어. 집 뒤 산이나 들이 그 집 땅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그 서출이 다 팔아먹었지. 그 집안사람들이 안성 어디서 살았는데 그 후에 묘를 다 이장해 갔어. ‘무명조선부영의정 누구누구’라고 쓰여 있는 유골함에 유골을 담는데 머리가 없었어. 부관참시를 당한거야. 그 때가 70년도 초나 되었을 거야. 그렇게 후손들이 김관주의 묘를 파 간 후에 저 북쪽에서부터 제주도까지 팔도 사람들이 외사리에 안온 사람들이 없어. 여기가 집터로 좋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내가 알기로도 하루에 20~30명 정도가 찾아왔지. 그 당시 찾아 온 사람들은 풍습이 달라 옷도 다르고 농기구도 다 달라. 그것을 모아만 놨어도 큰 박물관이 되었을 것이야. 여기 외사리는 금반형에서 모든 것이 뻗어나갔어. 

▲ 만락헌 장석인 선생 유허비.     © 세종신문

만락헌 장석인 선생 유허비

장석인(張錫寅, 1863~1938) 선생은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금계 이근원의 문인이다. 자는 형중(亨中), 호는 만락헌(晩樂軒)이며, 본관은 단양이다. 

장석인은 1863년 경상북도 문경군 동로면 수평리에서 1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4년 음서제도를 통하여 등용하여 혜민서 종사랑이 되고, 1904년에는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만락헌은 1895년 의병 때부터 군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해 1907년에도 항일의병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1908년 의병전쟁이 실패하자 의병에 참여했던 광암 이규현을 초빙하여 후손을 교육시켰는데 찾아와 글을 배우는 사람이 많았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관대를 버리고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졌는데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천지의 사이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사람이란 말인가”라며 탄식하였다. 그 후 1913년 의병을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고 신변의 위협을 받자 스승인 화서학파의 금계 이근원선생의 강학소와 가까운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로 이주하였다. 1920년에는 흉년이 들자 사재를 털어서 100여 호에 구휼미를 지급하였다. 1926년 애국지사인 이민응이 주도한 (재)선린회의 식산주식회사와 일제에 의한 양민들의 수탈을 막고, 농촌진흥을 목적으로 조직한 기동보린사의 창립에 큰 아들을 통하여 참여해 빈민구제사업을 하였다. 1930년~1938년 의병에 참여하였다가 쫓기는 몸이 된 애국지사 이규현을 비롯하여 유인석 의병의 중군장으로서 원주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운 이병덕 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그의 가족 전체를 돌보았다. 

만락헌 장석인의 생애는 1938년 향년 76세에 별세할 때까지 선비정신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고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남겼다. ‘단양장씨만락헌공화수회’에서는 2017년 3월 30일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외사전길 4 이여대로변에 [만락헌 장석인 선생 유허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 있다.   

[마을人터뷰] 전광홍(83세) 옹

외사리에서 언제부터 살았나?

박정희 군사쿠데타가 나던 해 울진에서 외사리로 왔다. 울진이 지금은 경북이지만 그 전에는 강원도였다. 우리도 결과적으로 금반형을 찾아 외사리로 왔다. 
 
외사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우리 선고(부친)께서 대학자(가암 전원식)이신데 그 분이 대전에서 족보를 할 때 그 곳에서 친분을 쌓은 사람이 있다. 이조판서 윤학사 자손 중에 한 분이 학자인데 선고와 아주 가까웠다. 그 사람이 선고와 이야기를 하다 자기 아버지가 금반형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땅을 하나 사 둔 것이 있다며 문서를 하나 보여줬다고 한다. 그 문서를 보기만 해도 아는 사람은 대번에 반하게 되어 있다. 그 문서를 쓴 사람도 무식한 사람이 쓴 게 아니다. 상당히 고단수가 쓴 것이다. 그것을 선고께서 읽어보고 여기 외사리를 오신 거다. 그 때가 1950년데 후반이다. 

▲ 전광홍(83) 옹.     © 세종신문

가족이 다 이사 왔나?

지금 우리 집이 있는 자리가 황무지 밭이었는데 선고께서 이 땅을 마음으로 지정해놓고 울진으로 내려오셨다. 선고께서 “앞으로 너희들이 살 곳이니 장남인 네가 가서 보고 좋거들랑 가서 살아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보따리를 싸가지고 군사혁명이 나던 해에 와서 남의 집에 살면서 이쪽 인심이라든가 여건이라든가 그런 거를 알아보기도 하고 얼굴도 익히고 그랬다. 그 당시 여기에 묘포(나무묘목)하는 집이 있었는데 낮에는 거기서 품 팔고 저녁에는 집에 와서 자고 그랬다. 마침 선고께서 봐두신 땅이 났다고 해서 알아보니 경쟁자가 몇이 있었다. 울진 집에 연락을 해서 땅이 났다고 알렸는데 대리인이 나보고 150원 달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100원정도 치고 있는데 내가 120원 줄 테니까 팔라고 해서 1700여 평을 샀다. 1700평이 다 보리밭인데 보리가 거의 안 되었지만 집 자리 만치만 장방형으로 보리가 파랗게 잘 되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선고께 말씀 드렸더니 “그럼 거따가 지으면 된다. 볼 것도 없다”고 하셔서 거기다가 집을 짓고 1년 후에 부모님과 가족들이 다 이사를 와서 살았다. 아이고! 참 옛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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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3/12 [16:43]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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