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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4] 여주 도자기의 뿌리 오학동 오금리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3/06 [17:01]
여주시 오학동에 위치한 오금리(오금통)는 세 개의 자연마을로 웃말, 중간말, 점말이 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점말이 생기지 않아 웃말, 중간말을 합쳐 오금동(烏金洞)이라고 불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광주분원에서 도자기를 만들던 사람들이 싸리산 아래 사기점을 열면서 ‘점말’이라는 자연마을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1890년대 초에 광주분원 도자기공 이희풍이라는 사람이 점말에서 제일 처음 자기공장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오금리 점말이 생기면서 여주 도자기 산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점말에 자기공장이 생기기 전 여주는 싸리산에서 캐낸 백토를 비롯한 질 좋은 도자기 원료를 광주분원에 제공하는 원료 공급지였다.  

▲ 싸리산 정상에서 바라본 오학동 오금리.     © 세종신문

웃말, 중간말 농사이야기 

오금리의 웃말과 중간말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였는데 도자기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 들면서 부터는 점말 주민들도 차츰 농업으로 전환하였다. 오금리의 전답은 대부분 천수답인데 천수가 이르면 4월 초에 모내기를 할 때도 있지만 늦어지면 하지가 지나서 모내기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오금리 농토의 토질이 좋고 물이 맑아 쌀이 좋다고 한다. 오금리 신오성 통장은 “능서면 내양리, 백석리 쌀이 좋다고 하는데 오금리 쌀은 거기 쌀보다 더 좋다.”며 자랑을 하였다. 밭작물은 과거 메밀, 목화를 많이 재배하였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드러 참외농사도 지었다고 한다. 80년대 중 후반 부터는 고추를 많이 재배했고 지금은 가지작목반을 만들어 가지농사를 짓고 있다. 

▲ 오금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마.     © 세종신문

오금리의 도자기 역사
 
19세기 말 광주분원이 민간자본에 넘어가면서 광주분원에 있던 도공들 중 일부가 백토 등 질 좋은 도자기 원료가 나오는 여주 싸리산 밑 오금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20세기 초 경기지역의 도자기생산시설 중 한강유역에서 자기를 생산하는 곳은 광주분원과 여주 오금리 뿐이었다고 한다. 20세기 초 일제강점을 전후해서 김수긍, 정규환, 함영섭, 이문영 등 4인이 오금리에 도자기공장을 차렸고 1927년경에는 오금리 도자기공장에 대한 경기도의 지방비 보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점말에는 세 개의 요업공장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일본식 재래 가마를 사용했는데 주로 사발, 대접, 제기접시, 조선자기, 각종 종지 등을 생산했다고 한다.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일본자기가 들어오면서 재래식 조선자기들은 일본자기에 밀려났다. 일본 도자기들은 가볍고 그림이 화려한데다가 값도 싸서 조선자기에 비해 경쟁력이 월등히 앞섰다. 여기에 일본사람들이 오학리에 <조선도기>라는 국영기업체 공장을 차려놓고 조그맣고 예쁜 찬그릇, 밥그릇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결국 오금리 자기생산은 일본자기에 밀려 해방직후 ‘요강’ 생산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해방직후 생산한 요강은 전통물레를 돌려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루꼬’라고 불리던 성형기로 찍어서 대량생산 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해방직후 시작한 오금리의 요강생산은 10여 년 동안 크게 성장하다 1960년을 전후해 스테인리스 요강이 출시되고 좌변기가 보급되면서 사기요강은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오금리 도예업은 요강 경기가 끝나자 바로 이어서 화분 생산으로 넘어갔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요금리에는 화분공장이 3개가 있었는데 2개는 문을 닫고 지금은 우진요업의 이석진(78) 옹이 소일거리로 화분을 만들고 있다. 

▲ 오금리 이석진 옹이 만든 옹기.     © 세종신문

싸리산 흙이 도자기로 탄생되기 까지 
 
오금리 도자기가 전성기를 누릴 때 싸리산 흙이 어떻게 여주도자기로 탄생하는가에 대해 기록을 따라 살펴본다. 가마꾼 중의 으뜸가는 기술자는 대장(大匠)이라고 불렀다. 가마 하나당 대장(大匠)이 두 명씩인데 한 명은 그릇을 뽑아 올리고, 다른 한 명은 도자기 굽을 만드는 일을 했다. 물레로 뽑아 올린 그릇의 굽 부분은 우묵한 덩어리 형태인데 그 덩어리를 잘라내고 그릇 안쪽을 다듬고 따로 만든 그릇의 굽에 올려 연결해서 마감하고 완성품을 만들었다.

오금리 도자기산업의 대장(大匠)들은 대부분 외부 전문인력이었고 그 외의 가마꾼은 모두 동네 사람들이 맡았다. 토물을 받는 사람이 싸리산 고령토를 채로 챈 고운 흙을 물에 풀어 앙금을 앉히고 그 앙금을 짓이겨 ‘떡’을 만든다. 이 떡을 가지고 대장(大匠)이 그릇을 만들고 나면 그릇에 유약을 먹이고 말린 후 가마에 차곡차곡 놓는다. 가마는 ‘가마부대장’ 두 명이 있는데 가마에 불을 때는 사람으로 대장(大匠) 다음 가는 기술자를 일컫는다. 그릇이 가마에서 구워지면 마지막으로 물걸레로 닦아낸다. 밥 짓는 사람들과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가마 하나를 사용하는 도자기 공장에 싸리산 흙이 도자기로 탄생하기 까지는 최소한 15명의 인부가 필요했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협력하여 수많은 공정을 거쳐 싸리산 흙이 여주도자기로 탄생되었다. 

▲ 채굴을 멈춘 싸리산 백토 채굴장.     © 세종신문

오금리 주막이야기

오금리 주민들은 여주장과 대신장을 주로 이용하였다. 장꾼들을 여주장과 양평장을 오고갔는데 여주대교가 놓이기 전에 여주에서 양평을 가려면 여주나루-오학나루-오금리-당산리-율촌-천서리-개군면으로 해서 갔다. 지금의 37번 국도와 거의 일치한다. 해방직후까지 이 길은 역마차 길이었다고 한다. 장꾼들은 여주장에서 양평장으로 갈 때 오금리를 지나갔는데 오금리 입구에는 오래전부터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우진요업의 이석진 선생의 부친도 강원도 홍천에서 들어와 이 주막에서 머슴을 살며 결혼도 하고 4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여주 우시장에서 양평 우시장으로 옮겨 다니는 소장수들도 이 길을 이용했는데 주막에서는 소장수들이 사고 파는 소를 위해 소죽도 끓여주었다고 한다. 주막집은 웃말에 살던 아주머니가 내려와 꾸려나갔는데 술도 팔고 밥도 먹고 했다고 한다. 주막에서 파는 술은 북내면 석우리 도가에서 받아왔다고 한다.   

▲ 오금리 점말에 있는 향나무. 수령 5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세종신문

향나무 이야기 
 
점말 <보배네 식당> 입구에는 수령이 500년은 족히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오금리 주민들이 서낭제를 지내는 곳으로 바위틈에서 굳세게 자라고 있어 오금리를 대표하는 나무로 되고 있다. 향나무 옆에 정자가 하나 있어 주민들이 오고가며 잠시 쉬어가는 곳이 되어 있다. 올해 78세인 우진요업의 이석진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 선생이 어린 시절에도 향나무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 였다고 하니 향나무의 수령이 꽤 될 것으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향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하고 싶지만 수령도 모르고 개인 사유재산 문제도 있어서 추진을 못하고 있다. 

[마을人터뷰] 우진요업 이석진(78세) 선생
 
▲ 평생을 오금리에서 살며 칠기와 화분 등을 만들어 온 이석진 옹.     © 세종신문

오금리에서 얼마나 살았나?

1943년에 오금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아버지 고향은 강원도 홍천인데 결혼하자마자 오금리로 오셔서 남의 집 머슴을 살았다. 나는 북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신중학교를 다니다 2학년 때 중퇴를 하고 그 때부터 도자기 관련 일을 했다. 
 
전문분야가 무엇인가?

화분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화본을 다 기계로 찍어내기 때문에 색을 내는 것이 기술이다. 흙의 배합, 도료, 굽는 온도 등에 따라 색이 다 달라지기 때문에 원하는 색을 내는 것이 제일 어렵다. 젊어서는 칠기 만드는 것을 잘해서 28세 때 오금동에서 처음으로 칠기공장을 열었다. 칠기 만드는 기술은 충북 괴산에서 배워왔다. 옹기도 만들고 쌀독도 만들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은 화분 만드는 것이다. 

▲ 이석진 옹이 만든 화분.     © 세종신문

싸리산이 왜 싸리산인가?

산꼭대기 바위 밑에서 쌀이 나서 싸리산이라고 부른다는데 정확한 것은 잘 모른다. 나는 젊어서부터 싸리산 흙을 퍼 날라 돈을 벌어 먹고살았다. 그러니 싸리산에서 쌀보다 귀한 흙이 나온 것은 맞다. 싸리산은 명산이고 영험한 산이다. 싸리산에서 나오는 백토가 아무데서나 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광맥을 타고 나오는데 광맥을 따라 구멍을 파고 들어가 흙을 퍼낸다. 기둥이나 받침목을 세우지 않고 그냥 흙을 파내는데 천정에서 흙덩어리가 수시로 떨어진다. 사람이 굴 안에 있을 때 흙덩어리가 떨어지면 사람이 깔려 죽는데 내가 일하는 동안에는 단 한사람도 흙에 깔려 죽은 사람이 없다. 싸리산이 일꾼들을 보호해 준 게 아니겠나. 
 
요즘은 경기가 좀 어떤가?

한참 잘나갈 때 내 월급은 군수 월급 서너 배는 되었다. 88올림픽 때는 정말 장사가 잘 되었다. 옹기 쌀독도 내가 처음 시작했는데 한참 잘나갈 때는 한 달에 3천~4천개 팔았다. 지금은 천개 팔까말까 한다. 화분도 많이 나갈 때는 하루에 몇 트럭씩 팔려나갔는데 지금은 조그마한 가스 가마에 소일거리로 만들어 팔고 있다. 아들만 둘인데 둘째가 내 뒤를 이어가고 있다. 재주가 좋아 어릴 때부터 일을 했지만 아직도 내 성에는 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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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3/06 [17:01]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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