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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3 산북면 송현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꿈꾸는 옹청박물관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2/27 [12:05]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여주마을 구석구석 3-산북면 송현리

송현리는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고개 아래 마을이라고 하여 소나무 송(松), 재 현(峴)을 써 송현리(松峴里)라 부른다. 자연 마을로는 안말, 샘죽골, 호통골, 윗말, 동막골, 풀무개 등이 있고 고려시대 공민왕이 잠시 머물렀다 하여 붙여진 공민봉과 공민왕이 사용한 우물이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국정개(國井漑) 일부가 송현리에 편입되어 있다. 
 
송현리 마을회관 앞 잔디밭에는 유달리 눈의 띄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문에는 ‘허원봉의 공적비’라고 쓰여 있다. 허원봉은 이북 출신으로 6.25 전쟁 때 월남하여 송현리로 들어와 남의 집 머슴으로 살았다고 한다. 허원봉은 가족과 친척도 없이 혼자 마을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머슴살이로 마련한 600평의 토지를 마을에 기증하였다. 이런 허원봉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 앞에 공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송현리에는 강석창(姜碩昌) 공 묘소가 있는데 강석창은 17세기 중반에 정3품 벼슬에 오른 사람으로 자는 숙하, 호는 낙재다. 송현리에 사는 진주 강씨 6대조 인데 강 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묘소를 옮겨왔다고 한다. 

퇴직교사 윤연한이 지은 책 ‘산북이야기’에는 송현리에서 광주 삼합리로 넘어가는 갈고개 중턱 172-1번지 밭에서 선사시대 돌도끼가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이곳은 선사시대 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998년 장마에 휩쓸린 경사지를 손질하다 길쭉한 돌이 나왔는데 예사롭지 않아서 확인해 보니 돌도끼였다고 한다.

▲ 도자기로 벽을 장식하고 옹기로 둘러 싼 옹청박물관     © 세종신문

옹청박물관(옹기마을·청학 박물관)

송현리 마을 북서쪽 언덕에는 한옥과 양옥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웅장하면서도 고즈넉한 고택 분위기의 옹청박물관(옹기마을·청학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2002년 10월 개관 했는데 인천가톨릭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최기복 신부가 수사 1명, 장애인 4명과 함께 생활하며 지키고 있다. 

옹청박물관은 이청학 여성 조의금을 종자돈으로 해서 지어진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21세기 동서시대를 맞아 한국 전통예술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생명문화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특히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정신, 서희선생의 평화외교사상, 주어사 강학회의 종교화합 창의정신을 계승하여 현재화하고 있다.   
 
세종대왕 후손들의 무덤과 공존하다

박물관 지킴이 최기복 신부는 박물관 제1보물은 박물관 울타리 안에 있는 세종대왕 후손들의 묘지들이라고 한다. 묘지들이 지금은 잘 정리가 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지만 처음에는 잡목이 우거져 있어서 폐묘처럼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박물관을 짓고 처음에는 찾아오는 사람들 마다 보기 안 좋다고 묘지를 옮기라고 성화였다고 한다. 최 신부는 하느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상생을 이 박물관이 도모하라’고 이 자리를 점지해 주신 것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최 신부는 “사람은 태어나 누구나 죽는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생명의 뿌리다. 모든 종교는 사실 뿌리의식의 심화다. 천주교가 한국에 와서 100년 동안 박해를 받으며 종교전쟁을 했다. 그 발단이 조상 제사 문제였다”고 했다. 따라서 최 신부는 한국의 제사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에서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성균관대학교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으며 유교 공부를 했다. 최 신부의 말에 따르면 가톨릭사상에서도 ‘산 자와 죽은 자는 하느님 아래서 하나가 되어 서로 영적으로 통교를 한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옹청박물관 주변의 묘지는 박물관이 동서 문화와 사상화합의 상징으로 되는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 로마 바티칸 우르바노대학에 걸려있는 나전칠화의 축소본.     © 세종신문

주거문화의 예술화, ‘나전칠화’
 
박물관 제2보물은 실내 곳곳을 가득 채운 ‘나전칠화’라고 한다. 옹천박물관은 건물의 전체 목재를 옻칠함으로써 주거문화의 친환경 생명문화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 성경 73경을 동양사상과의 조화를 통해 나전칠화로 작품화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한국화와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 나전칠화에 중점을 두는 이유는 세계무대에서 한국 조형예술의 품격과 우수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분야가 나전칠화라고 한다. 더 나아가 나전칠화는 육지의 옻, 바다의 자개, 인간의 솜씨가 함께 어우러져 창출되는 예술작품으로 인류가 염원하는 하늘(天), 땅(地), 사람(人)의 상생화합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6년 전 프란체스코 교황이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왔을 때 한 말을 나전칠화로 형상화 한 것이 ‘일어나 비추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현재 로마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에 걸려 있는데 전 세계가 감탄을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장애인이 옹천박물관의 주인

옹청박물관의 제3보물은 박물관의 주인공이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유훈에 따라 장애인 수도공동체인 예수동자수도자들이 박물관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이 되어 관리 안내 운영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의 주인은 소희 돈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옹청박물관은 장애인이 주인공이 되고 잘나고 돈 많은 사람들은 뒤에서 도움이가 되는 방향으로 되면 좋겠다고 한 김수한 추기경의 유훈을 따르고 있다. 2012년에 예수동자수도회가 탄생하고 2015년에 재단법인 예수동자수도회로 되었다. 2019년에는 박물관을 처음에 만든 모든 분들이 옹청박물관의 모든 소유권을 예수동자수도회로 넘겼다고 한다.  

▲ 송현리 마을 어르신들.     © 세종신문

산북면 전체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목표
 
최 신부의 말에 따르면 산북면 주어리에 있었던 주어사는 한국천주교의 탄생지 일 뿐만 아니라 유교, 불교, 천주교의 종교화합의 상징이라고 한다. 18세기에 유교 선비들이 불교사찰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는 세계 종교역사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어사가 있는 산북면은 유교, 불교, 기독교의 상생화합의 상징으로 옹청박물관은 세계종교화합의 평화의 순례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옹청박물관에서 시작해 주어사, 서희선생 묘소, 해월 최시형 선생 묘소를 연결하는 세계종교화합 평화의 순례길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다 엮어서 산북면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 옹청박물관의 목표이고 김수환 추기경의 유훈이라고 한다. 

[마을人터뷰] 김재홍(84세) 선생

송현리는 어떤 마을인가?
1937년에 송현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우리 마을은 별스럽게 특별한 마을이 아니다. 예전에는 한 30호 정도 모여 살았는데 요즘은 외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100호가 넘는다.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는 물이 좋다는 것이다. 한강의 원천이라고 하는 샘이 마을 산에 있는데 그 물을 퍼 올려 마을사람들이 전부 다 먹고 있다. 물이 좋아 오래오래 장수하며 산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마을 이야기가 있나?
‘공민봉’이라는 산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고려 말 공민왕이 원나라의 침략을 피해 피난을 왔다가 잠깐 머물렀던 곳이다. 우리 마을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는 광주시 삼합리에는 국정개라는 곳이 있는데 공민왕이 물을 먹었다는 우물이 있어서 국정 즉 나라의 우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송현리 김재홍(84세) 선생     © 세종신문

마을 건너편 산 중턱에 ‘옹청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던데 무슨 박물관인가?

성경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나전칠화로 그림을 그려 둔 곳인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최기복 신부님이 맡아서 일을 보는데 그분이 정말 대단한 분이다. 가톨릭 대학을 처음에 세울 때 전 세계를 다니며 말로 대학설립기금을 다 모았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가. 그 신부님이 우리 마을에서 옹청박물관을 운영하며 유네스코에 등재할 준비를 하고 있다니 우리 마을로서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마을회관 앞 잔디밭에 서 있는 비석은 무슨 비석인가?

허원봉 공적비다. 허 씨라는 사람이 6.25때 북에서 피난 온 사람인데 혈혈단신 우리 마을로 피난을 와서 머슴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자기가 머슴 살며 피땀으로 모은 땅 600평을 우리 마음에 기증을 했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가!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 사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우리 후대들이 알게 하려고 회관 앞에 공덕비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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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2/27 [12:05]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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