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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2] 강천면 부평리 가톨릭 성지, 그리고 한백겸 이야기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2/19 [12:34]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여주마을 구석구석

본지는 ‘여주마을 구석구석’이라는 꼭지로 2020년 한 해 동안 총 40회에 걸친 마을탐방 기획연재를 여주세종문화재단과 공동기획으로 진행한다. ‘여주마을 구석구석’은 여주시 12개 읍·면·동에 전해 내려오는 마을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 이야기가 현재 마을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해당 마을 취재와 주민 인터뷰 등을 통해 그려낸다. 또한 ‘여주마을 구석구석’ 기획연재를 통해 마을공동체와 그 공동체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고 알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공감과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편집자주>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釜坪里)는 가마섬, 모도막골, 와평동, 운무실, 웃점 등으로 구성된 마을이다. 가마섬은 섬강 위쪽 부평1리 마을회관이 있는 곳으로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도막골은 어느 노인이 해질녘에 도착해 오두막을 치고 살기 시작했다는 구전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와평동(瓦坪洞)은 기와집이 있는 들판이라고 해서 지어졌고, 운무실은 구름과 안개가 많이 낀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웃점은 고려백자, 청자, 조선백자 요지가 있었던 곳이다.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법정마을을 정비하면서 가마섬(부도:釜島)의 부(釜)와 와평동(瓦坪洞)의 평(坪)자를 따서 부평리(釜坪里)라 명명했다. 

▲ 부론에서 바라본 범골 계곡. 가운데 뾰족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 아래가 강천면 부평리 범골이다.     © 세종신문


가톨릭대학교 전신 ‘예수성심신학교’ 터가 있는 범골(부엉골)
 
70년대 말까지 사람이 살았다는 부평리 범골은 19세기 후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들어간 교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인 ‘예수성심신학교’를 세워 운영했던 곳이다. 가톨릭대학교 연혁에는 [1885년 강원도 원주시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재건하여 2대 교장 L.Liouville 신부가 취임한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부엉골이 부평1리 범골이다. 

세종천문대 앞을 지나 섬강 강변을 따라 하류로 1km정도 가다 보면 오른쪽 계곡으로 길이 나있다. 그 길을 따라 다시 1km정도 올라가면 쓰레기매립장으로 가는 왼쪽 계곡과 오른쪽 계곡길이 갈라진다. 이 갈림길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흔적이 있는데 이곳이 천주교인들이 살았던 범골이다. 오른쪽 계곡을 따라 300m정도 올라가면 왼쪽으로 범이 살았다는 굴이 지금도 있다. 여기에 범골(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터가 있다.

예수성심신학교는 1885년 10월 28일 개교하여 온갖 수난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성소를 키워 내 오늘날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있게 한 모태이다.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년), 최양업 토마스(1821-1861년) 신부의 뒤를 이어 한국 교회의 목자들을 키워 낸 전당이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 범골(부엉골)에서 시작된 것이다.  

조선시대 최대 천주교 탄압 ‘병인박해’
 
1831년 교황청은 조선을 독립 교구로 설정하여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주교 1명, 신부 2명을 조선에 파견하여 몰락한 양반들을 중심으로 가톨릭을 전파해 갔다. 이 무렵 흥선대원군은 가톨릭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대원군의 아내 민씨(여흥 민씨)를 비롯한 집안 여인들이 천주교 신자였고, 관료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 세례자 요한을 대원군이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한편,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이 맞닿게 되었다. 러시아와 관계를 맺는 것에 부담을 가진 흥선대원군은 그 대항마로 프랑스와 연결된 천주교 신자들과 접촉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1866년 1월 청나라의 천주교 박해 소식을 들은 유림 세력들과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척화세력의 목소리가 강해지자 입장을 바꾸게 된다. 결국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고 박해의 서막이 올랐다. 병인박해는 1871년까지 지속되었다. 

▲ 강천면 부평리 범골에 남아있는 가톨릭대학교의 전신 ‘예수성심신학교’ 터.     © 세종신문

당시 천주교의 주요거점이었던 충북 제천에서 박해를 피해 부평리 범골로 들어 온 교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했다. 1885년 천주교인들은 범골에서 오두막으로 된 예수성심신학교를 짓고 중등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예수성심신학교는 2년이 채 되지 않아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다. 학교는 이전했지만 천주교인들은 70년대 후반까지 강천면 부평리 범골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현재 범골일대 산은 개인 소유인데 예수성심신학교가 있었던 마을 터는 가톨릭 소유라고 한다. 가톨릭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예수성심신학교 자리는 현재 평탄작업만 되어 있는데 여주시와 가톨릭이 잘 보존해야 할 역사적 의의가 깊은 곳이다. 

▲ 부평리 가마섬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한백겸 신도비.     © 세종신문

 
실학의 선구자 한백겸과 신도비

부평1리 가마섬 마을 입구에는 구암 한백겸의 신도비가 서 있고 그 뒤 야트막한 야산에는 한백겸의 묘소가 있다. 
한백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한백겸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원주의 부론면 노림리에서 살았다. 한백겸은 실학의 선구자로서 역사와 지리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였고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 1611년 파주목사로 있을 때 광해군의 정치가 정도에 맞지 않다며 관직을 버리고 양주 물이촌(지금의 수색)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가마섬 마을 입구에 세워진 한백겸 신도비는 높이 약 573cm로 1998년 경기도기념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머리를 틀어 뒤돌아보고 있는 웅장한 거북의 등 위에 서있는 선도비의 비문은 당대의 대제학 우복 정경세의 글을 명필가이자 판서를 지낸 죽남 오준이 글씨로 쓰고 참찬 김광욱의 전서로 새겼다. 빗돌의 질이 좋아 400년 세월에도 글씨를 대부분 알아볼 수 있다. 비석 몇 군데에 총탄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있어 오랜 세월 비석이 안고 온 많은 사연을 알렸다. 

한백겸의 묘 초입에 들어서면 봉분 세 개가 일렬로 서 있는데 맨 위쪽이 한백겸의 묘, 그 아래쪽이 조부의 묘, 맨 아래가 손자의 묘다.  

▲ 한백겸의 묘에서 바라본 전경. 부론면의 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는 섬강이 흐른다.     © 세종신문

섬강을 경계로 건너편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이다. 섬강 주변에 조선시대 남인들의 고가가 몇 군데 있어 당시 남인 중에서도 청주 한 씨가 꽤 큰 집안을 이루고 살았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섬강을 끼고 지령(地靈)이 좋은 부평리와 부론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에 속해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라 한다.  

400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부론면 노림리와 흥호리에서 한백겸의 묘소를 찾아오려면 섬강의 나루터를 이용해 건넌다. 부론면 나루터 자리에는 사공이 살았던 옛집이 폐허가 되어 남아 있고 누군가 고깃배로 사용하는 작은 배 한척이 강물을 따라 출렁이고 있었다.   


[마을人터뷰] 이황주(68세) 선생

부평리에서 얼마나 살았나?
조상 대대로 7대째 살고 있다. 나는 1952년에 부평리 모도막골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아서 토박이가 몇 명 없다. 
 
모도막골이 무슨 뜻인가?
사람들이 모여살기 좋다고 모도막골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는데, 내가 어려서부터 어른들께 들은 말은 그게 아니다. 모도막은 해 저물 모(暮)자, 이를 도(到)자, 칠 막(幕)자, 골 곡(谷)자를 쓴다. 조선시대 영조 무렵에 어느 이(李)가 노인이 우리 동네로 낙향했다. 이 노인이 처음 마을에 들어올 때 이곳은 전부 가시나무, 참나무 밭이었는데 이 노인이 덤불을 헤치고 4인교(가마)를 타고 와서 보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날이 저물어 대충 막을 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노인이 처음 살게 된 그 당시 상황을 따서 ‘모도막골(暮到幕谷)’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 이황주 선생이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세종신문

범골이 가톨릭 성지라고 하던데?
가톨릭 발상지라는 말을 들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도 범골에 사람들이 몇 집 살고 있었다. 
구전에 의하면 내 죽마고우인 이씨의 증조부께서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시 어린 손자들의 목숨을 구하고저 인적이 드문 범골로 데려왔다고 한다. 그 후 함께했던 선교사는 떠났지만 조부님들은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다 돌아가시고 고손, 증손자들이벌초하러 왔다가 들르곤 한다. 
지금 기억에 <가톨릭 사목>이라는 잡지에 실어야 한다며 신부 둘이 찾아와서 그 터를 알려 준 적이 있다. 그 당시 온 신부들이 여기 범골이 두 번째로 유서가 깊다는 말을 했다.
 
한백겸 묘와 신도비의 유래를 아나?
한백겸은 살아서는 학식이 깊었고 돌아가신 후에 영의정으로 추서를 받았다. 한백겸의 묘와 신도비가 가마섬 마을 입구에 있는데 그 일대는 지금도 한 씨네 땅이다.  
90년대에 이장을 보면서 마을 회관을 건립할 때 청주 한 씨 네를 찾아가 땅을 좀 내 달라고 했다. 우리 마을회관 건물은 여주시 소유지만 땅은 한 씨네 땅이다.

▲ 여주시 강천면 부평1리 마을회관.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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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2/19 [12:34]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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