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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1]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와 ‘한지’ 이야기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02/12 [14:51]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여주마을 구석구석

본지는 ‘여주마을 구석구석’이라는 꼭지로 2020년 한 해 동안 총 40회에 걸친 마을탐방 기획연재를 여주세종문화재단과 공동기획으로 진행한다. ‘여주마을 구석구석’은 여주시 12개 읍·면·동에 전해 내려오는 마을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 이야기가 현재 마을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해당 마을 취재와 주민 인터뷰 등을 통해 그려낸다. 또한 ‘여주마을 구석구석’ 기획연재를 통해 마을공동체와 그 공동체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고 알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공감과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그 첫 번째로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를 찾아 ‘고달사’와 ‘한지’ 이야기를 싣는다. <편집자주>


여주시 북내면 최북단에 위치한 상교리는 점골, 점말, 고달, 다리목 등 네 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된 곳으로, 양평군 지제면과 경계를 이루고 우두산(489m)과 고래산(543m)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자연마을인 고달(上高洞)과 다리목(橋項洞)의 한자 앞 글자를 따서 상교리(上橋里)로 이름 붙였다. 

상교리에는 국보4호 원종대사부도탑과 보물6호 원종대사탑비 등 많은 문화재가 발굴된 ‘고달사지’가 있다. 80년대 초반까지 전통한지를 생산했는데 상교리의 한지는 고달사지와 인연이 있다고 한다. 

▲ 북내면 상교리 점골 한지공장터.     © 세종신문

한지 만들던 사람들
 
전남 목포에서 열아홉에 상교리 한지 기술자에게 시집 온 김부덕 할머니를 만나보았다. 김 할머니는 당시 여주군 개군면으로 시집온 언니네 놀러왔다가 형부의 소개로 상교리 총각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결혼 후 점말 부락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나이 어린 시누이 둘을 돌보며 슬하에 3남매를 키웠다. 김 할머니는 가난한 시댁에 식량이라도 보태려고 남편이 다니던 한지공장에 취직해 15년 넘게 일했다. 남편 김태윤 씨는 열다섯 살 때부터 한지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한지공장은 국사령 고개가 시작되는 점골에 있었고 공장을 운영하던 사장도 점골 사람(원양의)이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한지 원료인 닥나무를 불리고, 껍질을 벗겨 삶고, 씻고, 갈고, 푸는 허드렛일을 하였는데 한 달에 쌀 두말 값을 품삯으로 받았다. 남편이 한지공장에서 기숙을 하며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을 했기 때문에 김 할머니는 매일 아침밥을 해서 이고 출근을 했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는 뽕나무과로 번식력이 강하다. 상교리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상교리, 외룡리, 석우리, 덕산리 일대에는 아직도 닥나무가 많이 서식하는데 북내면의 닥나무가 한지 재료로는 최고라고 한다. 잎이 떨어지는 가을부터 마을 주민들이 밭이나 논 언덕에서 자라는 닥나무를 베어 묶어서 마차 길에 세워두면 한지공장 인부들이 달구지로 실어 왔다. 실어온 닥나무는 무게를 달아 표시를 하고 생산한 한지로 값을 치렀다. 

▲ 상교리에서 한지를 만들었던 김부덕 할머니.     © 세종신문

닥나무는 쪄서 껍질을 벗기고 말린 후 다시 잿물에 담가 바깥쪽 껍질을 칼로 긁어내고 말려서 다시 잿물에 삶는다. 그렇게 하얗게 만들어진 닥나무 껍질을 갈아서 여러 번 잿물에 씻어낸 후 닥풀인 황촉규(黃蜀葵)와 섞어 물에 푼다. 질펀한 닥나무풀을 뜰채로 앞으로 한번, 좌우로 각 한번, 뒤로 한번 총 네 번 얇게 뜨고 난 후 발을 드러내고 그 안에 담긴 젖은 한지를 걷어내 말린다. 말린 한지는 삼등분해서 접어 차곡차곡 쌓아 보관하는데 기술자 품삯은 생산한 한지 수량에 따라 지급했다고 한다. 한지 한 장을 만드는데 아흔아홉 번의 손이 간다고 하니 그 품이 얼마나 드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상교리에서 한지생산을 언제부서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됐다. 현대식 종이가 보급되고 한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70년대 말에 김 할머니 남편은 한지 만드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그 무렵 한지공장도 문을 닫았다고 한다.  

▲ 상교리 한지의 맥을 잇고 있는 봉순이 한지문화연구소.     © 세종신문

상교리 한지의 맥을 잇다
 
상교리의 가장 윗마을인 점골에서 한지를 생산하다 80년대 초 공장이 없어졌는데 수십 년이 지난 후 상교리의 가장 아랫마을인 다리목에 젊은 한지 공예가 봉순이 씨가 ‘봉순이 한지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상교리 한지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봉순이 씨의 말에 따르면 상교리의 한지는 고달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고달사는 고려 초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로 왕실의 보호를 받은 사찰이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직지심체요절의 목판본이 고달사가 있었던 혜목산의 취암사에서 인쇄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취암사와 상원사가 혜목산에 있었는데 취암사는 직지심체요절의 책을 쓴 백운화상이 입적한 절이다. 한지공예가 봉순이 씨는 당시 직지심체요철 목판본을 인쇄할 때 사용된 종이가 우리의 전통 한지였기 때문에 북내면 상교리 일대의 한지생산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고달사는 고려시대 대찰

한편, 여주시가 펴낸 [문벌귀족사회 불교문화와 여주 고달사]에는 ‘고달사’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적혀있다. 1993년 사적 제382호로 지정된 고달사지는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에 위치하며 약 1만 2,000여 평에 달하는 절터에는 국보 제4호로 지정된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하여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제 및 이수(보물 제6호),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고달사지 석조대좌(보물 제8호)가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도 1959년 고달사지에서 이전된 것이다. 

▲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 절터 발굴현장.     © 세종신문

고달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신라 말 9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봉림산문의 원조로 알려진 원감대사 현욱(圓鑑大師 玄昱 : 787~868)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혜목산 고달사에 주거하던 9세기 무렵에 크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의 제자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 : 854~923)가 고달사에 거주하였고, 심희의 대표적인 제자 찬유가 고달사에서 출가하여 심희의 법맥을 이었으나 892년 당으로 유학한 후 거의 30년간 머물다가 921년 귀국한 후 924년 고려 태조를 만났고, 고달사에 돌아와 부흥시켰다. 949년 광종이 즉위하자 찬유는 광종에게 ‘심왕(心王)의 묘결(妙訣)’과 ‘각제(覺帝)의 미언(微言)’을 설법하여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받았고, 광종은 그에게 증진대사(證眞大師)의 호를 내리고 궁궐로 불러들였다. 그 후 찬유는 국사로 봉해졌고 왕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하사받고 혜목산으로 물러나 제자교육에 진력하다가 958년(광종 9)에 입적하였다. 찬유가 입적한 후 광종은 971년(광종 22)에 원화전(元和殿)에서 대장경을 읽다가 ‘고달원, 희양원, 도봉원을 문하제자들이 이어 주지하여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소위 부동선원을 선포하였다.
 
이후 고달사는 천태종 주도세력에게서 밀려나 지방사원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주를 본향으로 하고 있는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에서 고달사에 대해 이렇다 하게 언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 중기 이후 고달사의 위치는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조선 초 1530년(중종 9)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달사가 취암사·상원사와 더불어 혜목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6세기 전반까지는 고달사가 사찰로서의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799년(정조 23)에 쓴 『범우고』에 비로소 고달사가 폐사지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18세기 말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 고달사 스님들이 시주하고 돌아와 신발에 묻은 흙을 털었다는 ‘신털이봉’.     © 세종신문

‘상교문화마을’을 꿈꾼다
 
지금의 고달사지 터에는 90년대 후반까지 고달마을 사람들이 30여 가구 모여 살았다고 한다. 당시 여주군에서 고달사지의 가치를 고증하기 위해 발굴 조사를 시작하면서 1999년 마을 주민들이 지금의 마을회관이 있는 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1942년 고달마을에서 태어나 이주하기 전까지 살았다는 이강덕 노인은 “그 전에는 고달마을에 절터가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큰 절인지는 몰랐다”며 “어렸을 때는 평범한 마을이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집터를 새로 마련하면서 석탑이 나오고 거북돌이 나오고 했다. 지금의 유적들이 처음에는 그냥 흙더미에 묻혀있었다”고 하였다. 

상교리 이규찬 이장은 “우리 마을은 많은 국보와 보물이 쏟아져 나온 고달사지와 고려석실묘가 있고 이인영 의병대장의 생가가 있는 문화와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 최근 외룡리 천연가스발전소의 송전탑이 설치된다고 해서 마을 주민들이 걱정이 많다”고 하며 ‘상교문화마을’ 조성을 꿈꾸고 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 대찰 고달사 터가 있는 마을, 한 공예가에 의해 전통한지의 맥을 실낱같이 이어가고 있는 상교리에 우리 문화와 전통의 꽃을 피울 고갱이가 만들어지길 마을 주민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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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2/12 [14:51]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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